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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주 Sep 13. 2019

도덕성의 폭력

기회 평등의 오해와 한계

자신이 가진 특권을 포기할 때만 동일한 기회를 누리지 못한 누군가에게 공감할 수 있거나 공감할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론 지나치게 획일화된 잣대로 하나의 정의justice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잣대가 모든 경우에서 동일한 정도와 방식으로 적용될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다수의 윤리적 맥락은 행위자 자신과 행위자의 주변 상황을 포괄한다는 점이다. 행위자가 누구인지, 행위자의 의도와 품성, 감정 상태는 어떠한지에서부터 그의 행위가 무엇 또는 누구와, 어느 시점에, 어떻게 관계하는지 등의 맥락 모두가 도덕적 판단의 전제인 것이다. 흔히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졌는가'를 도덕 판단의 원칙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사실 기회의 평등은 룰의 공정성 문제이지 한 개인의 도덕적 평가를 다루지 않는다. 물론 공정하지 못한 지형을 악용하여 타인의 기회를 강제로 빼앗는 행위가 발생할 수 있고 이로 인하여 누군가가 직접적 피해를 겪을 수 있지만, 이러한 맥락적 고려 없이 단지 기울어진 운동장의 혜택을 받는 참가자라는 이유로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유감을 표하는 건 기회 평등의 원칙을 개인에게 확대 또는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혜택을 받은 모두를 가해자로 규정하는 프레임은 따라서 기울어진 운동장의 구조적 불공정성만큼이나 한 개인에게 과도한, 공정하지 못한 도덕적 책임을 짊어지게 만든다.


기회의 평등에 관한 주된 오해는 주로 사실과 당위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는 참인가, 거짓인가? 기회 평등 원칙의 근간이 되는 이 명제는 오랜 논의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도덕적 함의와 굳건하게 형성된 사회적 믿음 탓에 더는 사실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곧장 가치 판단의 영역, 곧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 명제로 대치된다. 문제는 일단 이렇게 당위의 영역에 다다르면 바로 이 토대 위에서 도덕 원칙이 세워지고, 이렇게 세워진 원칙이 우리 삶에 적용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사실 판단이 아닌, 가치 판단 위에 또 다른 가치 규범들을 겹겹이 쌓아 만들어진 도덕 체계는 우리가 복종의 의무를 고민하기에 앞서 근본적인 질문, 곧 '규범들이 실제 삶의 토대 위에 있는가'라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실제 삶을 반영하지 못한 도덕 체계는 완전한 허상으로 강한 이념성을 가질 뿐, 한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삶을 개선하는데 실질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회의 평등 문제도 당위가 아닌, 사실 명제에 관한 사실 판단이 먼저 다뤄져야만 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만 한다'는 심리적 끌림affection과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종교적 함의를 걷어내면, 우리가 처한 현실은 관점에 따라 다소 비관적인 모습을 띠곤 한다. 단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룰이 불공정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엔 언제부터인지 딱 잘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꽤 긴 세월 동안 인간은 모든 것이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지 않음을 경험해왔다. 나아가, 한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또한 한 개인이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불운이 삶에 개입하거나,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자격이 없는 누군가에게 삶의 큰 행운이 따르는 등 이른바 우연성이 삶을 비극으로, 때로는 희극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일은 특별히 우리가 만든 인위적인 시스템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기회 평등의 원칙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전제가 아닌, 실제 삶의 우연성에 기초하여 설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원칙은 사람들에게 낭만적인 기대감을 갖게 할지언정 현실의 관점에선 적어도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토대 위에 기회 평등의 원칙을 다시 세우더라도 기회 평등 원칙의 근본적 한계, 곧 제한성은 극복될 수 없다. 기회 평등의 원칙은 애초에 룰의 공정성에 관한 것으로 룰이 적용되는 범위 내의 경쟁과 성과를 다룬다. 바로 그래서 공정한 경쟁을 위한 축구경기의 룰과 야구경기의 룰이 다르고, 각각의 룰을 서로 바꿔 적용할 때 공정성의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만약 기회 평등의 원칙을 우리 삶 전체로 확대한다면, 우연성의 개입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삶의 운동장을 어떻게, 어느 선까지 인위적으로 바로 잡을 것인지에 관한 어려움 외에도, 삶을 단지 경쟁과 성과의 장으로만 바라볼 것인지, 나아가 이러한 빈약한 관점의 토대 위에 서있는 원칙을 잣대로 한 사람의 또는 한 사람의 삶에 관한 도덕적 평가를 온전하게 내릴 수 있는지 답해야 한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도덕적 평가에 있어 중요한 건 평가 대상이 놓여있는 고유의 맥락이고, 특히나 평가의 대상이 '사람'인 한, 이때의 맥락은 하나의 도덕 원칙으로 통제될 수 있는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진보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몇몇 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배하고 있는 강한 도덕적 이념성 때문인지 절대적 믿음이 투영된 원칙을 내세워 근엄하고 엄격하게 누군가의 품성과 삶을 가감없이 단죄하려한다. 우스운 건 이런 식의 행태는 정도에 있어 지나칠뿐더러 자기 프레임에 갖힌 편협성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강박증에 가까운 도덕적 사명감까지 더해지고 나면 단죄는 곧 폭력이 되고, 이러한 도덕성morality의 폭력은 삶의 짐이 됨과 동시에 그 자체로 반도덕적immoral이 된다.



illustration by Gérard DuBoi, The New Y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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