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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r 08. 2020

표현은 단지 표현만이 아니라 선언이기도 하다

표현을 주저하지 않게 훈련하기. 동시에 표현의 무게도 인식하기.

(* 이 글은 일반인 그리고 표현법, 대화법 전문가 모두에게 유용합니다.)


'표현법, 대화법'은 필자가 전문으로 하는 몇 분야 중에 하나이다. 이 분야에서만 근 10년 정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상담을 진행해 왔다.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그러한 경험과 통찰로서의 이야기이다.


두괄식으로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표현은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표현을 주저하지 말라. 표현에 자유로우라. 
동시에,
표현은 선언이다. 그러므로 표현을 주의하라. 표현의 무게감을 인식하라. 




많은 사람이 '표현'에 소홀하거나 약하다. 그래서 우선은 표현 훈련을 해야 한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 바람, 생각 등을 제대로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감정과 욕구가 중요하다. 


보통 생각이나 의견 등의 표현에 집중하지만, 필요할 때가 아니면 감정과 욕구의 표현이 더 효과적이다. 표현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와 상대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래야 관계와 소통이 좀 더 원활하고 제대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표현이 없으면 애초에 소통 자체가 없게 된다. 그래서 '표현을 잘하기, 표현을 많이 하기, 표현을 적절하게 하기'가 1차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먼저 되어야 하다. 


그런데 오랫동안 표현하기, 대화법 등을 진행해 오다 보니 '표현의 부작용' 부분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 말은 표현 자체에 부작용이 있다는 게 아니다. 표현은 되도록 권장되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하고, 많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표현의 선언성'이 무시되는 때이다. 사실 애초에 우리가 표현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망설이는 이유가 바로 이 '표현의 선언성' 때문이기도 하다. 한번 말을 하면 그게 굳어지고, 사실이 되어 버리고, 절대가 되어 버리기에 말을 하기가, 표현을 하기가 주저되는 것이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것이다. 


처음에 '표현하기' 훈련을 하는 이유는, 이러한 표현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경우 과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현해도 괜찮다. 표현이 나를 살리는 길이다. 표현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다.'는 관점으로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특히 나의 감정과 욕구를 중심으로. 물론 동시에 상대의 감정과 욕구 등도 표현하게 하고, 또 공감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표현은 내 것만 드러내는 '나 일방의 것'이 아니라 상대의 것도 함께 나누는 '상호 교환의 것'이므로.


다시 말하지만 일상에서, 아직도 수많은 우리는 먼저 '표현하기'를 더 해야 한다. 훈련하고 나누어야 한다. 대화법 훈련도 여기에 해당된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더 많이 관련 훈련, 프로그램, 실천들이 이루어져야 하다. 




그러면 위에 말한 '표현의 부작용'은 무엇인가. 왜 발생하는가.


표현의 부작용을 풀어서 말하기를 '표현의 선언성이 무시되는 것'이라고 했다. 애초엔 너무 과장되어 표현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던 것이 이제는 또다시 살펴야 하는 지점이 된 것이다. 표현 훈련, 표현하기, 대화법 훈련을 많이 하다 보면 이제 역으로 '반드시 표현을 해야만 한다'는 관성이 생기게도 된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긴다. 인간은 정신적 관성의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던 것은 계속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표현의 선언성'이란 무엇인가. 말이란(글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일단 표현되면 '굳어진'다. 


물론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그 '말의 굳어짐'이란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우리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생긴 일종의 '근본 착각'이라는 것이다. 말은 말일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말을 만들어 놓고, 이제 그 말이 실재이고, 실체가 있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 사실인양 믿게 된다. 도구로서 만들어진 말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표현의 선언성'이다.


인간을 일단 말을 해 놓으면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서로가 그렇다는 걸 알기에 말에 조심하게 되고 때로는 두려워하게도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도 큰 문제는 없다. 어떤 대상을 '무엇'으로 정의해 놓고, 이제 그것을 유용하게 잘 쓰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절대시'하게 되면서, 스스로 붙잡히게 되면서 유용성과 별도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말을, 표현을 망설이는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갈 수는 없다. 우리는 '말은 단지 말일뿐임'도 알아채야 한다. '표현은 표현일 뿐'인 것이다. 한번 말했다고, 표현했다고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 말에 붙잡혀 고민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필요에 따라 언제든 표현하고, 그리고 타인의 표현을 들을 수 있어야 하다. 그래서 그 표현이 유용하면 잘 쓰고, 아니면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어야 한다. '표현의 선언성'이란 것도 다만 하나의 도구성일 뿐임을 깨치는 것이다. '표현의 선언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표현의 선언성'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내가 표현을 하면, 그것은 선언적 기능을 해서 어떤 식으로든 나와 상대에게 사실 시 되고, 중요하게 되고, 결정적으로 될 수도 있음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함부로 표현하지 않게 되어야 한다. 


너무 과도하게 말과 표현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말과 표현이 일으킬 뒤의 과정까지도 알아채고 인식해야 한다. 통찰하고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생길 수 있는 영향과 결과를 알고 잘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잘 챙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표현의 선언성을 유념한다'의 의미이다. 


꼭 표현하기나 대화법 훈련에 의한 관성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수많은 우리는 '말하고 싶음, 표현하고 싶음'의 욕구를 강하게 느끼고 또 실제 그 욕구를 해소하며 다닌다. 말도 많이 하고 표현도 많이 한다. 문제는 그 말과 표현이 적절하지 않거나 차라리 하지 않으면 더 좋은 경우들이다. 


사실 표현법 훈련, 대화법 훈련은 단순히 표현하기, 대화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제대로 표현하기, 제대로 대화하기'가 목적이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표현하기와 표현하지 않기 모두에서 자유롭기'가 궁극의 목적이다. 


어떤 표현도 '하고 안 하고'를 자유롭게 하고, 어떤 표현도 '듣고 안 듣고'를 자유롭게 하는 것. 

어떤 표현도 '해도 안 해도' 상관없고, 어떤 표현도 '들어도 안 들어도' 상관없게 되는 것.

다만 그 필요성과 적절성, 유용서에 따라 하고 안 하고를 선택할 뿐인 것.


이것이 대화법 훈련의 궁극적 목표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표현하기 훈련에서 '표현하지 않기'도 목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표현이다. 무표현, 비표현도 표현이다. 


이것을 알아채는 게 중요하다. 무조건 표현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표현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표현도 무표현도 모두가 표현이므로,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잘 사용하면 된다. 즉, 표현하지 않는 게 적절할 때는 표현하지 않을 수가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필요한 표현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동시에 불필요한 표현을 부적절하게 하는 것도 문제이다. 둘 다 '표현의 문제'이다. 표현할 것을 표현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도 많지만, 반대로 표현하지 말아야 할 것을 표현해서 생기는 문제도 많다. 아마 사실은 후자가 훨씬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표현하지 않기'의 표현 훈련도 상당히 중요하다. 


이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표현하기 훈련'을 하면서 된다. 표현하기를 잘할 수 있어야 표현하지 않기도 잘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둘 다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치 '0'도 숫자이듯이. 그래서 표현하기 훈련이 필요하다. 


표현의 부작용인 '표현의 선언성 무시'는, 그래서 이 '표현하지 않기'를 잘 표현하는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다시 처음의 '표현을 두려워하기, 표현을 주저하기'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이다. 표현의 달인이 되자는 말이다. 표현하지 않기에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표현하기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표현하고 싶다고, 표현해야 한다고 해서 다 표현할 필요가 없음을 눈치채자는 것이다. 


그러면 일상에서 그리고 표현법, 대화법 훈련에서도 '불필요한 표현'을 능동적으로 멈출 수 있게 된다. 혹은 '적절하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나의 '하고 싶음'의 욕망에 내가 매몰되어 나도 모르게 말하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을 때, 그것을 멈추거나 줄일 수 있다. 혹은 '표현해야 한다'는, 훈련에 의해 생긴 어떤 관성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사실 '공감'에도 같은 측면이 있다. 우리 사회에 공감은 많이 부족하며, 자기 공감과 상호 공감 모두를 지금보다 훨씬 많이 키워야 힐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동시에 그 와중에 자칫 들어갈 수 있는 '공감에의 지나친 갈망'은 조심해야 한다. 공감은 필요하며,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많이 해 줄수록 좋은 건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감이 절대적으로 필수이며, 공감이 없으면 뭔가 허전하고 서운한 듯한 것도 조심해야 한다. 공감이 있으면 더 좋은 게 사실이지만, 공감이 없어도 사실은 아무 이상 없다. 공감이 없어도 모두가 잘 살고 잘 행해 나갈 수 있다. 이 바탕 위에서 공감을 더하는 것이다. 있으면 좋은 것이니까. 




우리,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많이 듣자. 

더 자유롭게 표현하고 더 자유롭게 듣자. 


그리고 


어떤 표현이든 적절하고 유용하게 할 수 있게 되자.

그래서 표현이 필요할 때는 편안하게 잘하고, 

굳이 표현이 필요 없을 때는 편안하게 하지 말자.


타인과 세상의 어떤 표현이든 잘 듣자. 

필요한 표현이면 잘 듣고 잘 활용하고,

굳이 필요치 않은 표현이면 그냥 그 '표현의 자유'를 허락해주며 넘겨버리자. 

(물론 외부의 표현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적절한 대응의 표현이 있다면 또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자!)


표현을 하는 것, 안 하는 것 모두에 자유로운 것. 

표현을 듣는 것, 안 듣는 것 모두에 자유로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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