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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Jul 18. 2020

말 해도 한 방, 안 해도 한 방이다. 어떡할 것인가?

'방망이 화두'의 의미 - 일상과 삶 속의 '방망이'들 처리하기

유명한 '방망이 화두'의 풀이를 안내한 글이다. 불교를 모르고 선을 몰라도 이해될 수 있다. 본래 화두란 개인이 직접 깨쳐야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설명과 안내를 잘 들어서 통찰될 수도 있다. 이 안내를 통해 직접 깊이 통찰될 수도 있고 혹은 이 안내가 씨앗이 되어 차후 본인의 삶 속에서 통찰로 이어지게 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유용하니 잘 활용해 보면 되겠다.


선가에 내려오는 화두 중에 '말 해도 한 방, 말 안 해도 한 방' 이야기가 있다.


스승이 제자에게 이야기한다. 

"지금 네가 말을 해도 몽둥이로 한 방 맞을 것이고, 말을 하지 않아도 한 방 맞을 것이다. 자, 어찌하겠느냐?"


(* 상세 내용은 조금씩 다른 몇 가지 버전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가장 간단한 이 버전으로 한다)




제자는 요리조리 궁리를 할 것이다.


'말을 해도 한 방, 말을 안 해도 한 방이라고? 어쨌든 맞는 거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지? 참, 난감하네...'


여러 가지 생각을 할 것이다.


'어차피 방법이 없으니, 그냥 방망이를 뺏어 버릴까?

아니, 그냥 이 자리를 떠나 버릴까?  

이렇게 말을 안 하고 있으면 곧 한 방 맞겠지?

곤란하군.'


어쩔 수 없다. 결국 제자는 한 방 맞게 되어 있다.

 

해답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직접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떡할 것인가 생각해 보라.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경우를 줄여서 '방망이 화두'라고 명해 보자)


실제 때리느냐 아니냐는 여기서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 모두 비유일 뿐이다. 이 상황은 일종의 '막다른 골목'의 상황을 말한다. 이렇게 해도 문제가 생기고, 저렇게 해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피할 방법이 없다. 진퇴양난이다. 딜레마이고 역설의 상황이다.


핵심은, '방망이 화두'와 같은 비슷한 경우에는 특정 답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란 것이다.


'그냥 맞겠다, 피하겠다, 방망이를 뺏겠다, 도망가겠다, 맞은 안 맞든 상관치 않겠다' 등등 여러 답이 있을 것인데, 그중 어떤 답을 하는 것이 이러한 화두를 행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지혜로운 답을 하거나, 기발한 해결책을 찾거나, 창의적인 대응을 하는 등은 상대적인 재미는 있겠으나 본질적인 의의는 없다.


특정한 답을 생각해 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화두 자체를 통해 기존에 미처 보지 못하던 근본적인 무명 혹은 무지를 깨치게 되는 것, 그리고 이것이 상대적 통찰로 머무는 게 아니라 근본적 통찰로 꿰뚫어 들어가는 게 소위 '화두'들의 목적이자 용도이다.




그렇다면 '방망이 화두'를 통해 우리가 근본적으로 뚫어야 할 통찰은 무엇인가?


이 화두에서 스승이 제시한 막다른 골목의 상황은, 사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떻게 해도 한 방을 맞는 것이다. 도망을 가거나 방망이를 뺏는다 등의 답은, 답으로 말을 할 수 있고 행동도 그렇게 취할 수 있지만 화두의 본래 목적인 근본적 통찰은 없다. 그러므로 무의미하다. 다시 말하지만 답이 문제가 아니다.


답이 아니라,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스승은 나에게 해결책이 없는 상황을 제시하며 해결책을 찾으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은 없다. 그런데 왜 여기서 어떡할 것인가를 묻지? 답이 있지도 않은데?




자, 그런데 가만히 보라. 도대체 '이 상황'이라는 게 뭔가?


이 막다른 상황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주어진 조건에 의해, 그 전제에 갇히면 꼼짝 못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애초에 그 '조건', '전제'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절대진리나 절대사실인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는 것이지, 만약 내가 그 자체를 아예 개의치 않는다면? 그 조건과 전제에 갇히지 않는다면, 그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그래도 이것이 풀지 못하는 난관, 막다른 골목의 골치 아픈 상황이 되는가?


자,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결국 '방망이 화두'가 우리에게 깨치라고 하는 것은 말해도 맞고 말 안 해도 맞는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어떤 답이 아니라, 지금 이와 같은 상황, 내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이 상황이 사실은 내가 스승의 말(조건, 전제)을 절대사실로 받아들이면서 발생한 것일 뿐이라는 것.


'피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 조건도, 내가 그렇게 믿고 그렇게 받아들이면 그렇게 되는 것일 뿐, 내가 그 정체를 알고 무시하든가, 넘겨 버리든가, 개의치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걸 깨치고 나면 이제 그 후의 나의 반응과 행동은 그냥 열려있게 된다. 어떤 말이든 답을 해 줄 수 있고, 어떤 행동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더 이상 그 말과 행동들이 중요한 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 '놀음'에서 이미 자유롭다.


일단은 이 통찰이 핵심이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보자.


만약 이 통찰이 그렇게 선명하게 오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이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에이, 그게 뭐야. 당연히 스승의 말이고 제시한 화두이니 그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답을 찾으라 하니 답을 찾는 게 제자가 할 일인데. 그 말 자체를 무시하면 될 일이라고? 무시될 수 있는 거라면 애초에 왜 그런 조건은 왜 주는가? 그것도 어느 정도 자극이 되긴 하지만 그러나 고작 그거 하자고 이 화두를 사용한 건가? 별로 의미가 안 느껴지는데?".


그럼 이제 아래에서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방망이 화두'의 좀 더 깊은 의의를 살펴보자.




위에서 말한 부분만 깨치는 것도 결코 작은 건 아니지만, 이제 이 깨침을 좀 더 실제적으로 만들어 보자.


'방망이 화두'를 통해서 우리는 스승이 제시하는 딜레마를 해결함에 있어 애초에 그 '전제 조건, 말 자체'에 내가 갇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음을 통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방망이) 상황에서의 해결책일 뿐이다. 우리의 실제 일상,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일상과 삶에서는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많은 '곤란한 상황, 피할 수 없는 고난, 막다른 난관' 등의 상황이 발생한다. 그냥 간단히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하고 퉁 친다고 해서 넘어가거나 해결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방망이 화두'의 통찰은 실제 삶에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가?




자, 여기가 핵심이다.


과연 아까의 '방망이 상황'과 일상에서의 곤란한 상황, 어쩔 수 없는 상황, 딜레마들이 다른 경우일까?


아니다.

 똑.같.다.


'방망이 상황'은 스승이 제자에게 제시한 것이었지만 일상과 삶에서의 '방망이 상황'은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 나에게 던져주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그것을 막다른 상황, 곤란한 상황으로 최종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해석이다. '나는 지금 이걸 선택할 수도, 저걸 선택할 수도 없어. 어떤 것을 선택해도 고통이고 어려움이고 절망이야~' 하는 것이다.


삶에서 경험하는 '막다른 골목'과 같은 상황들은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마치 또 하나의 '방망이 상황'처럼 그것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라고 철석같이 여긴다. 실제 사실들이 그렇고, 실제 조건과 상황이 그렇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은 것으로 넘길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기만 한가?


마치 우리가 '방망이 화두'에서 스승의 어떤 조건의 말을 들었을 때 그에 대해서 전혀 다른 생각을 못했던 것처럼, 삶에서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말을 들으면서도 '에이, 실제 상황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니까. 이건 그런 이야기와는 달라요.'라고 할 것인데, 바로 그 '실제 상황'이 결국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고 절대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각자의 '방망이'가 된다는 말이다. 이해되는가?


예를 들어, 과거 내가 도저히 빠져나갈 곳이 없다고 여겼던 상황, 입장, 처지, 상태를 경험한 후에 나중에 다시 보면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이는 경험들을 많이 할 것이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었거나, 틀린 인식이었거나, 좁은 관점이었던 경우들 말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르게 보기도 한다. 내게 안 보이는 부분이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막다른 상황이라 여기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가 보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출구와 길이 있을 것인데 나는 보지 못한다. 스스로 만든 조건과 전제들, 믿음들에서 자유로우면 되는데 그게 되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이 '만들어진 방망이 상황'임을 눈치챈다면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시야를 돌릴 수 있고, 다른 해법을 찾을 수도 있고, 아예 문제 자체를 떠나 버릴 수도 있다. 여러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한번 더 깊이 들어가 보아야 한다.




위 지점까지 오면 '방망이 화두'를 절반만 푼 것이 된다. 더 나아가야 한다. 방망이 화두는 이렇게 상대적으로만 적용되는 통찰이 아니다. 위에 이야기에서는 우리 일상에서 부딪히는 특수한(어려운) 상황에서 적용되는 부분을 이야기했지만, 실은 '방망이 화두'의 통찰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경험, 모든 인식, 모든 앎에 말이다.

'나'라는 앎, '나 자신'에 조차도.


인간의 모든 것이 이 '방망이 상황'이다. 

인간 자체도.


특별히 어려운 상황만이 아니다. 이 화두에서는 뭔가 역설적인, 모순적인, 어려운 상황을 설정했지만 결국엔 인간의 모든 상황이 이에 해당됨을 눈치채야 한다. 그래야 끝까지 꿰뚫은 게 된다.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통찰된 것이다.


가령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만약 그 상황이 단지 한 대 맞고 안 맞고 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이걸 선택해도 죽고 저걸 선택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이면 어떻게 되는가. 그럴 때에도 이 통찰로 그 상황에서 자유롭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국 죽게 될 것인데?


'방망이 화두'는 이런 지점까지 꿰뚫어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다.




잘 보라. 


우리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지막 막다른 골목'이라고 여기는 그 '죽음'의 경우도 결국은 일련의 '방망이'로 이루어져 있다.


'나'라는 설정된 주체의 방망이, '죽음'이라는 방망이, '있고 없음'의 방망이.


우리는 실체로서 '내'가 있고, 그리고 실제 어떤 현상으로서 '죽음'이라는 게 실재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뭔가 나라는 존재가 '있다가 없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방망이'들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꼼짝 못하는 것이다. 죽음만이 아니라 인간의 앎 자체가 그러하다. 


물론 이것은 그냥 이론적으로, 그리고 생각으로 '아, 그렇구나. 맞아, 그렇지'라고 한다고 해서 바로 근본적 통찰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돌이켜지지 않는 근본적 '각성, 자각, 통찰, 깨달음, 눈치챔'으로서 와야 한다. 이러한 화두를 통해 이 자각이 바로 올 수도 있지만, 이러한 측면을 이해하면서 계속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면밀히 관찰하는 중에 어느 순간 '문득' 올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중요한 것은 '꾸준함, 궁금심, 진실함'을 가지고 실제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탐구를 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든, 그 자리가 아닌데 '여기가 그 자리인가보다' 하고 스스로 착오하여 머무고 머물면, 그러면 아무 것도 되어지지 않는다.




'방망이 화두'를 꼭 거창한 상황과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일상에서 우리가 맞이하는 나 자신의 고민, 혹은 타인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갈등의 순간, 어쩔 수 없다며 당황하는 여러 상황이 다 해당된다.


나는, 그 상황들 속에서 이전처럼 무조건 꼼짝할 수 없다고 있지 말고 내가 스스로 빠져 있는 '믿음, 설정, 분별'이 무엇인지 깨쳐야 한다. 그것들이 절대적인 무엇, 어쩔 수 없는 사실이 아니라 '다만 방망이'일 뿐임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제 그 '고민, 문제, 갈등, 상황'들을 좀 더 지혜롭게, 구체적으로, 여유롭게 해결할 수 있으면 된다. 해결할 게 없지만 그래도 기꺼이 해결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망이 화두'와 비슷한 또 하나의 전통적 화두를 예시로 던지며 이 글을 마치겠다. 해결해 보라.


"손가락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입구를 가진 큰 유리병에 다 큰 오리가 한 마리 들어가 있다. 이 오리는 살아있다. 자, 이제 유리병을 깨지 말고 오리를 꺼내라. 물론 오리는 산 채로 꺼내져야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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