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다루기: 안 느껴야 하는 게 아니라 느껴도 괜찮게 되는 것
누구에게나 감정은 큰 숙제이다. 감정 자체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조절할 것인가가 말이다. 여담이지만, 서양의 한 명상 단체에서는 인간이 세 가지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단다. 첫째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육체'이다. 물리적인 신체를 말한다. 영어로 말하면 physical body이다. 둘째는 '감정체'이다. 인간이 가진 감정계을 하나의 신체로 본 것이다. 영어로는 emotional body이다. 셋째는 '사고체'이다. 즉 생각 기능을 담당하는 몸체인 것이다. 영어로는 mental body이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신비주의적인 소재를 가져오지 않아도 우리 인간의 구성을 몸, 감정, 생각의 세 가지 요소로 보는 것은 나름 흥미롭다. 혹은 우리의 뇌로 본다면, 뇌 가장 깊은 곳인 뇌간과 연수 등은 육체에, 변연계는 감정체에, 대뇌 피질은 사고체에 대응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흥미를 위해 아주 거칠게 대응시킨 것이며 어느 정도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 글은 이 중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감정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이해하고 또 좀 더 잘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한.
감정 영역에 있어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부분은 당연히 '부정적 감정'이다. 우울함, 외로움, 슬픔, 분노, 두려움, 위축감, 부족감, 소외감, 무력감, 허무감 등이다. 부정적 감정은 되도록이면 느끼고 싶어 하지 않고, 일단 느낀다면 빨리 없애거나 멈추고 싶어 한다. 괴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반하는 긍정적 감정들은 계속 느끼고 싶어하고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하지만 감정 문제를 다룰 때는 부정적, 긍정적 감정 모두를 동일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에서 설명하겠다)
감정의 정체가 무엇이며, 진화 과정 중에 어떤 역할을 하며 발전해 왔고, 어떤 식으로 발현이 되는 가는 뇌과학이나 호르몬의 영향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과학적으로 밝혀져 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그러한 감정 발현의 기제나 프로세스보다는 이미 발생한 감정에 대해서(특히 부정적 감정) 어떻게 처리를 하는 것이 좋은지 그리고 차후에 비슷한 감정적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면 좋은 지를 볼 것이다. 말하자면 '감정 다루기'가 주제인 셈이다.
우리가 이미 느끼고 있는 부정적 감정을 다루거나 그에 대처하려 할 때 힘든 부분은, 그 감정을 멈추거나 다른 감정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한데, 글자 그대로 해당 감정이 '이미 발생'했기 때문이다. 생리적으로 말하면 그 감정을 일으키는 신경망이 이미 발화했고, 호르몬 등이 이미 분비되어 몸속에서 퍼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미 일어난 물리적인 현상을 마음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감정 문제와 관련하여서 우리가 가장 먼저 유념해야 하는 첫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이미 느끼고 있는 감정을 거부하거나 멈추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다.
: 즉, 느껴지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떻게 해 보려 하는 마음'을 멈추는 것, 바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인데,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멈추거나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면 당연히 되지도 않을뿐더러 또 그 '안 되는 것' 때문에 2차 고통들이 일어난다. 1차로 일어난 감정으로 안 그래도 힘든데 스스로 2차 감정을 일으키게 된다. 여러모로 손해인 것이다.
뭔가를 바꾸려는 그 자체가 2차 문제를 일으킨다. '이대로는 안 괜찮아. 바꾸어야만 괜찮게 된다'는 마음이다. 그런데 '감정을 어떻게 해 보려는 바람'을 멈추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바로 우리 마음의 믿음과 고집 때문이다. 여전히 감정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고집. 믿음과 고집은, 유용하게 쓰면 아주 훌륭한 도구이지만 통할 때가 있고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경우엔 통하지 않는다.
시중에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라면서 돌아다니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한번 실패한 틀린 방법을 계속 쓰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다." 정말 그가 한 것인지 아닌 지는 모르겠으나 누가 했다고 하든 아주 적절한 말이다. 말하자면 어떤 과학 실험을 하는데 한 번 실패한 방법론이 있는데 그 후에도 그것만 계속 되풀이하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냐는 뜻이다. 감정 멈추기나 감정 바꾸기 시도도 그러하다.(물론 '되는 방법'인데 몇 가지 요소로 안 되는 경우에 계속 반복 시도하는 것은 다르다. 그 경우엔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것이 맞다)
우리가 '감정을 바꾸려는 시도와 바람'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미 느끼고 있는 감정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감당하지 못해서 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러나 더 본질은 내가 스스로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감정의 존재를.
사실 살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가장 큰 행태 중 하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다(물론 정당하게 고칠 것, 없앨 것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다. 개인이나 사회의 모순이나 불평등 등이다. 이런 건 바꾸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개인적인 심리적 습관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감정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다.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가령 가족, 친구, 학교, 직장 그리고 여타의 공동체에서 계속 관계를 맺어야 할 상대방이 있는데 서로 맘에 들지 않거나 잘 맞질 않는 때가 있다. 이 때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그 사람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너는 이 가정, 친구 모임, 학교, 회사, 교회, 절, 학계 등에 있으면 안 돼!' 하는 마음. '너의 존재를 허락할 수 없어!' 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내가 힘이 있거나 능력이 되면 그 사람을 내칠 수 있다. 가끔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든 없든 중요한 것이 있다. 나든 상대든 모두 그 공동체 안에서 모종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각자의 고유한 입장이 있다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나도 상대도 서로가 원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내쳐지거나 없앨 수 없다. 이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집단적 구성'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동차에서 아무 부품이나 함부로 빼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다. 그런데 개인적 입장과 감정에만 매몰되어 상대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이제 그 공동체에서의 나의 생활이 힘들어진다. 물론 상대도 힘들어진다. 그리고 개인간의 문제가 조직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있는 것의 존재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불가능한 것을 욕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이미 존재하는 그 사람의 존재성을 일단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일단 허락, 허용해 주는 것이다. 비록 입맛은 쓰고 마음은 탐탁지 않지만 굳이 불가능하고 되지도 않는 '존재성의 부정, 있는 것을 없다고 함'에 매달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이득을 얻게 된다. 불필요하게 에너지도 빼앗기지 않고 마음도 서서히 안정되고 여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여유의 바탕(비록 마음은 탐탁지 않지만)에서 이제 나와 상대방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 전체를 위한 적절한 해결책이 자연스레 떠 오를 가능성도 커진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말이 참거나 회피하라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어느 경우든 답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열린 관점과 좀 더 열린 해결책들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다. 이렇게 한 후에 선택하는 해결책엔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좋게좋게 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상대와 절교할 수도 있고, 상대를 반대할 수도 있고, 논쟁을 할 수도 있고, 충고를 할 수도 있고, 말타툼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서로 좋은 말과 관계로 전환을 할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무관심할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면 부정적, 긍정적 관계없이 다 써볼 수 있다. 다만 먼저 마음의 바탕에 '상대의 존재성에 대한 허용'만 있다면 말이다. 이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이 이야기를 다소 길게 한 이유는, 나의 감정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상대'의 자리에 '나의 감정'을 넣으면 모든 상황이 똑같다.
그러므로 '부정적 감정에서 자유롭기' 위해 우리가 할 것은 다음과 같다.
감정을 바꾸거나 멈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느껴도 괜찮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감정이든 나타난 그대로 허락하는 것이다. 수긍하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개의치 않는 것이다. 부정도 긍정도 없이 그냥 느껴주는 것이다. 휘둘리리거나 매몰되지도 않고.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괜찮음'은 '괜찮다, 안 괜찮다'에서의 괜찮음이 아니라 둘 모두를 품고 넘어선 괜찮음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괜찮음은 다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블교의 선가에서 말하는 '걸림 없음'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보통 이를 수행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경우가 '걸림 없음에 걸리는 것'이다. 즉 일상에서 혹은 수행 중에 마주치는 여러 일에 걸림이 없는 것을 수행하려 하는데 자꾸 내가 걸린다. 그리고 그 '걸리는 것'에 마음이 불편해지고 불안해지는 식으로 걸리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당연히 '걸림 없음에 걸리지 않기'이다. 즉 '걸려도 개의치 않기'이다. '걸림이 있든 없든 상관치 않기'이다.
보통 이 글에서 말하는 '부정적 감정에서 자유롭기'와 같은 프로세스를 행하면서 가장 많이 실망하거나 포기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해 봤는데 여전히 '안 괜찮은 것'이다. 지침대로 '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면서 없애려 하거나 사라져야 한다고 바라지 않는 것'을 실천했다. 그런데 나는 괜찮아지지 않고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에이, 안 되잖아~'라고 하면서 포기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은 괜찮아져서, 좋아져서, 그 부정적 감정이 사라져서 괜찮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걸 바라면 또 기존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그건 과거에도 이미 하면서 실패했던 방법이다. 이걸 되풀이하면 결과는 당연하다. 그게 아니라 '있어도 괜찮음'이다. 결국 '있든 없든 상관없음'이다. 이것을 눈치채는 게 아주 중요하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의 강도를 1에서 10으로 본다면, 과거엔 우리가 6, 7정도의 감정이 되면 힘들어했다. 그런데 이제 점점 여전히 6, 7의 그 감정을 느끼지만 느껴도 괜찮게 되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다기 보다는 '그 감정을 느끼는 자체'가 괜찮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기꺼이 느껴주기, 기꺼이 경험해 주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1차 감정의 처리에 실패할 때 부정적인 2차 감정('아, 왜 안되지? 실망이야. 역시 난 안돼' 등)을 느끼는 것, 그 순간이 바로 위기이자 기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2차 감정(혹은 2차 화살)의 정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를 괴롭혀 오던 '보이지 않던 적'을 비로소 발견하는 것이랄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지거나 멈추면서 정작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모르고 지나왔던 지점이다. 우리, 이제 이것을 놓치지 말자.
우리가 눈치채고 앞으로 적용해야 할 '감정 다루기'의 또 다른 핵심은 바로 '2차 감정'의 처리이다.
일단은 먼저 느꼈던 1차 감정은 잠시 놓아두고, 그에 대한 2차 감정 문제를 먼저 해결하자. 2차 감정은 1차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거나 해결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실망, 후회, 부정, 두려움, 자기 질책, 포기 등의 감정이다. '아, 왜 이런 감정이 들지. 그런데 이 감정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안 되네. 아, 된다는데 나는 왜 안될까. 왜 이 감정을 계속 그대로 느껴야 하지?" 등등이다. 심지어 여기서 말해 주는 '감정 다루기'의 요령대로 해 봤는데 별 신통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이 2차 감정에 대한 최선의 방책은 무엇일까?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이다. 2차 감정으로 드는 부정적 감정들에 대해 '어떻게 하려 하는 것'을 멈추면 된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부정도 긍정도 없이 그냥 느껴주는 것이다. 기꺼이 경험해 주는 것이다. 그냥 '아, 이런 2차 감정이 일어나네'해 주는 것이다. 없애려거나 멈추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위대한 용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과거처럼 휘둘리거나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 발생으로 인해 또 다른 실망감, 걱정, 분노, 무력감, 자책감 등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냥 받아주고, 허용하고, 허락하고,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왜? 이미 존재하니까.
이렇게 2차 감정 처리가 꾸준히 이어지면 1차 감정도 삶 속에서 그 강도가 점점 더 사그라든다. 감정은 여전히 느끼지만 그에 수반되어 일어났던 불안이나 고통의 측면들이 줄어드는 것이다. 여기서도 주의할 것이 있다.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즉 '안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다. 느낌이 없는 것은 결코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그건 목석이나 시체의 경우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왜 느낌과 감정이 없는 상태를 바라는가? 그러므로 결코 감정이 무뎌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한다. '느끼지만 괜찮게 되는 것'이다. '안 괜찮음도 괜찮게 되는 것, 기꺼이 수용하는 것, 허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지금과 같이 감정의 혼란 상태가 그대로 가는가? 그것도 물론 아니다. 물론 그대로 가도 상관없긴 하다. 이 '상관없음' 때문에 사실은 점점 사그라드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방법대로 제대로 감정을 다루기 시작하면 하면 점점 사그라들게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감정에 대한 무조건적 반응'이다. 내가 느낀 감정(1차 감정)에 대한 충동적, 무의식적 반응(2차 감정)이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감정을 느끼되 그 느끼는 것을 개의치 않기 시작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며 점점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자, 그러니 중간에 별 변화가 없어도 개의치 말자.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이전과 같은 상태로 있지는 말자. 이왕이면 삶에서의 실용성, 효용성 등을 생각해서 조금 더 빨리 '감정 다루기'가 되게 하는 동기, 동력은 만들어 사용해 보자. 이것은 좀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어떤 방법을 취한다 해도 일상에서의 여러 가지 일은 계속 생길 것이다. 격한 감정, 감정적 충돌, 다툼, 망신, 실망, 불안, 슬픔, 분노 등은 또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그런 사건의 경험을 통해 '아, 역시 나는 안돼'라고 하지 말고, '아, 아직도 관성이 많이 남았네. 그럼 이걸 좀 더 빨리 멈추거나 없애보자. 어떻게 하면 될까?'는 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경험이 힘들고 괴로울 수록 그 패턴을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도 커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좋다. 1차 감정이든 2차 감정이든 그냥 그 존재를 허락해 주고, 그냥 느껴준다고 하자. 그런데 그 다음은? 그렇게 계속 부정적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느껴지고, 또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면 이전과 뭐가 다르지? 이 모든 시도와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지? 헛수고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제 다음을 명심하자.
모든 생리적인 감각과 느낌은 일어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인간의 한정된 신경 반응의 수명 때문이다.
즉 오감 반응이든 그리고 호르몬 등과 생각에 의해 일어난 감정 반응이든 결국엔 인간의 생리반응과 신경반응은 그 수명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자료에서는 이것을 대략 '90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러 시간대가 가능할 것이다. 여하튼 그 유지 시간은 그렇게 길진 않을 것이다. 물론 몸에 아주 큰 상처가 나거나 해서 자극이 지속되면 그러면 감각과 느낌도 계속될 순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감각과 느낌은 사실 몇 분만 지나면 사라진다. 신경의 활성은 영구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왜 많은 감정이 이토록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까?
그렇게 계속 이어지게 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즉 우리가 그 '내버려 두면 자연스레 수명이 다해 사라질 감정'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고집, 생각, 회상, 되새김, 2차 감정들, 욕망, 욕심, 후회, 욕구, 믿음 등으로 말이다. 감정에 빠지든 감정을 부정하든 두 가지 반응 모두 그 붙드는 역할을 한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붙드는 행위'를 멈추자는 것이다.
(#주: 그것이 몸의 상처에 의한 느낌이든 심리적 상처에 의한 느낌이든 아주 강한 경우는 당연히 느낌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는 치료를 해야 한다. 특히 마음의 중증의 우울, 불안, 두려움, 공포, 분노, 무력감 등은 당연히 적절한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건 다른 문제이다.)
자, 그러면 감정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이게 전부인가?
그렇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다.
위에서 말한 것은 심리적 대처면에선 전부이다. 분명 '되는 방법'이니 2차 감정에 속지 말고 잘 활용하면 좋은 효과를 볼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실제 행동의 대처'이다. 느껴지는 감정을, 굳이 거부하거나 멈추려 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허락하고, 그러면서 2차 감정, 2차 화살 마저도 제대로 다스리되,
이제 그 상황과 처지를 극복하거나 타개하거나 바꿀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능동적으로 취하자!
즉, 받아들인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여러 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하면 된다. 그럼 이전의 경우와 차이는 무엇인가? 내게 느껴진 감정에 대한 부정적 반응 즉 그 감정을 없애고 싶어 하는 욕망이 추동력이 되어 뭔가 하게 되며, 그럴 때는 행동도 충동적이거나 비전략적으로 되기 쉽다. 그래서 결과도 썩 좋지 못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감정 다루기'를 하면서, 즉 느껴지는 감정은 감정대로 놓아두기를 하면서 동시에 실용적인 목적으로 얼마든지 상황을 바꾸고 타개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이전에 감정에 매몰되거나 휘말려서 쫓겨서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더 침착하고 여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된다. 왜? 더 이상 내 목적 혹은 의식의 초점이 이 '감정 자체'에 있지 않고 '실제 그 일의 해결'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감정 자체에 마음이 많이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서 이제까지 말한 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대처'로서의 이야기이다. 만약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적극적으로 처리를 하고 수정하고 고쳐 나가야 한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 문제 등은 개인의 노력과 범위를 벗어난다. 개인이 아무리 감정이나 생각을 다스리려 노력해도 마치 거대한 파도 앞의 개미처럼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모두가 힘을 합쳐 사회구조적 모순을 타파해야 한다. 이 또한 위에서 말한 '실제 행동의 대처'에 해당된다. 이 경우엔 집단적 감정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왜 긍정적 감정도 문제가 된다고 하는가?
: 흰 페인트이든 검정 페인트이든 물드는 것은 같다
마지막으로, 글의 처음 부분에서 '긍정 감정'도 역시 부정 감정처럼 처리하여야 할 대상이라고 했던 부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좋기만 한 긍정 감정이 왜 문제가 된다는 걸까?
긍정 감정이든 부정 감정이든 감정임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극성만 다를 뿐 동일한 현상이다. 만약 긍정 감정에 대해서 그것 역시 '다루어야 할 감정'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바로 동일시하고 동화되고 매몰되어 버린다면, 차후 부정적 감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긍정 감정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거나 즐기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즐기고, 누리고, 만끽하는 중에도 실시간으로 그 감정이 '감정임을 잘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절대 사실이나 전부가 아님을 눈치채는 것이다. 그래야 차후 부정 감정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타인에 대한 혐오만이 아니라 무분별한 숭배도 또한 경계해야 한다. 스스로를 비하하는 열등감만이 아니라 대책 없이 빠져드는 우월감도 함께 조심해야 한다. 같은 맥락이 슬픔과 기쁨, 미움과 사랑, 불행과 행복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이 모든 상대적 감정들은 그 극성만 다를 뿐 똑 같이 '감정'이라는 하나의 기제임을 눈치채야 한다.
부정 감정처럼 긍정 감정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 매몰되거나 빠지면 부작용이 나타난다. 첫째는, 긍정 감정이 사라질 때의 고통이다. 이건은 긍정 감정에 과도하게 집착할 때 일어날 수 있다. 둘째는,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나 대처가 나오게 된다. 긍정 감정에 휘둘려서 과장되거나 어색하거나 뭔가 주위 사람이나 상황 흐름에 맞지 않는 반응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긍정 감정은 부정 감정만큼 그렇게까지 조심하거나 염려할 필요는 없다. 여유롭게, 잘 즐겨주고 누려주면 된다. 다만 본질적으론 위에서 말한 방법들을 사용해서 동일하게 취급하면 된다.
비유하자면, 흰 페인트이든 검정 페인트이든 벽에 색이 칠해지는 건 같다. 색칠이 잘못이거나 색칠을 안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페인트 칠하기'가 어떤 현상이고, 어떻게 이용해야 하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어떤 조치와 대응을 해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