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자기 미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루 MuRu Jul 25. 2016

신경 쓰이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

신경 쓰이는 것들과 별도로 나의 '신경씀' 자체를 보기

뭔가가, 누군가들이 신경 쓰여서 힘들 때 그들을 신경 안 쓰려하는 건 힘들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신경이 이미 발화되고 있는 거니까.


그러므로 그냥 그 대상들이 계속 신경 쓰이도록 내버려 두는 게 오히려 편하다. 그것들의 몫이고 그들의 자유이다. 내가 그들이 자유를 독재자처럼 억압할 수 없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 대상과 상황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신경 쓰임' 현상 자체에 무심하는 것.


진짜 문제는 그들 이전에 나 자신이다. 내가 나의 '신경 쓰임'을 아주 대단한 무엇, 중요한 무엇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니라 나의 '신경 쓰는 행위'를 말이다. 근데 별 것 아니다. 내 신경의 자동적 활성화 이상의 의미는 없다.


신경 쓰이는가? 신경 쓰라. 신경은 쓰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그 신경 쓰임 외에 정작 실제 무슨 일이 있는가? 


있으면 잘 대처하면 되지만, 신경 쓰임과 별도로 실제 일어나는 일은 별것 없는 경우가 많다. 나의 상상 이외에는. 




우리가 뭔가를 신경 쓸 때 그것은 오랜 진화의 결과로 생긴 모종의 기능이기도 하다. 주의하고 경계해야 나에게 닥칠 위험을 미리 알아채고 또 대비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원시 시대나 야만의 시대엔 이 기능이 많이 필요했지만 현대에는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실제 위험이 됙 실제 해로움이 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위험에는 물리적인 위험과 심리적이거나 추상적인 위험이 모두 있다. 원시, 야만의 시대엔 주로 물리적인 위험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므로 우리 인간은 극도로 예민하게 '신경을 쓰는' 기능을 발전시키고 잘 이용해야 했다.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런 실제 물리적 위험 대신, 차후 나에게 뭔가 해로움이나 손해를 줄 수 있는 심리적, 추상적 위험들이 많아져 왔다. 문제는 우리 마음의 착각이다. 혹은 전략적 미스이다.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뇌에서 '물리적 장애를 감지하고 느끼는 부위'와 '심리적, 추상적 장애를 감지하고 느끼는 부위'가 같다고 한다. 즉, 내가 길을 가다가 앞에 큰 장애물이나 위험한 대상이 있을 때 느끼는 부담감과 일상 등에서 심리적, 추상적 위험이 있을 때 느끼는 부위가 같다는 것이다. 우리 의식은 그 둘이 다른 경우라고 구분하지만 우리의 뇌는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느끼는 심리적, 추상적 위험, 위협, 장애 등은 실제론 그렇진 않다."


즉, 우리의 뇌가 마치 그것이 실제 물리적 장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심리적, 추상적 위험과 장애를 느낀다면, 우리 뇌는 어느새 그것이 마치 실제 앞에 놓인 물리적 위험인 양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리적 위협감이나 위축감이 그렇게 우리에게 생생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단지 생각, 상상, 느낌일 뿐인데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도 모르게 그걸 '물리적 실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신경 쓰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우리가 어떤 사람, 대상, 상황에 신경 쓰이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추후 발생할 여러 가지 안 좋은 후속 현상, 행위, 상황들에 대한 어떤 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고 행동한다면 저것이 나중에 이러저러한 번거로운 일들을 만들어 내겠지?' 혹은 '지금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중에 더 복잡하고 큰 일로 이어지거나 확장되겠지?'하는 식이다. 


여기엔 명백히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내가 상상하는 그 '나중에 벌어질 일'들이 과연 얼마나 실제 벌어질 것인가이다. 걱정하는 본인이야 거의 확실히 벌어질 것이라 확신하겠지만, 과거의 일들이나 타인의 경우들을 보라. 대부분의 걱정은 '단지 상상'으로 끝날뿐인 경우가 많다. 즉 내가 스스로 '가상의 위험, 위협, 장애'를 설정하고, 내 뇌는 또 그걸 '실제 물리적 장애로 전환'해서 스스로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실제 그 걱정하는 어떤 일들이 벌어진다 한들 어떻겠냐는 것이다. 여기도 또 상상이 가미된다. 상상의 위험, 위협, 장애들이 말이다. 정말 내가 미리 걱정하는 모종의 어떤 일들이 발생한다고 정말 지금 걱정하는 정도까지 뭐가 총체적 혼동의 상황이 일어날까?  지금 본인이 경험해온 과거를 쭉 돌아보라. 비슷했던 상황들 말이다. 가만히 보면, 실제 일어나게 되면 걱정하던 그 정도는 아닌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그건 '뇌의 착각 혹은 고집'이었기 때문이다. 심리적, 추상적 위험을 물리적 위험으로 여겼던.




'신경 쓰임'에 대해 우리를 도와줄 또 다른 말이 있다. 사람들이라면 그들에게 그들의 느낌, 생각, 행위의 자유를 허락해 주라는 것이다. 상황이라면 '이미 발생한 일'이 존재를 허용해 주라는 것이다. 내가 '안돼~!'하고 마음속에서 금지하고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일어나거나 멈추지 않는다. 내 마음만 힘들 뿐이다. 안될 일을 계속 소망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다른 누구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사람이든 상황이든 그 자유, 그 존재를 냅둬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 


아니다. 상대와 상황의 자유와 존재를 허락해 줬으니 내 자유와 존재도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를 잘 하면 된다. 싸워야 한다면 잘 싸우고, 논쟁을 해야 한다면 잘 해서 이기고, 무심해야 한다면 개뼈다귀 던져 주듯이 주고 무심하면 된다. 상대와 상황의 자유를 허락지 않고 이렇게 할 때와 허락하고 이렇게 할 때의 차이는 아주 크다. 마음이 더 여유로워지고 더 지혜롭고 창의적이 대처들이 떠오른다. 




'신경 쓰임'에 대한 마지막 도움말은, 제일 앞에서도 썼지만 '나의 신경 쓰임 자체에 대한 무심함'이다. 이건 좀 미묘한 부분이므로 잘 보아야 한다. 미묘하지만 사실 제일 핵심이고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보통 우리는 누가 신경 쓰이거나 상황이 신경 쓰이면 계속 그 '대상'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서, 그 상황에 대해서 계속 신경 쓰지 않으려 하거나 무시하려 한다. 그런데 그게 되는가? 당연히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가 뇌와 신경망에 그동안 그 사람이나 그런 상황에 대해 신경 쓰도록 쌓여온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뇌와 신경은 그냥 충실하게 그 자료에 바탕에 자동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신경이 이미 발화되었을 때, 즉 어떤 게 떠오르고, 느껴지고, 감정적으로 왔을 때 그것을 멈추려 하거나, 안 하려 하거나, 무시하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미 일어난 반응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아니다, 있다. 물론 과거와 같은 그런 '발화 조건, 발화 요소'들을 이제 점점 없애 가거나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꾸준히 나와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바꾸어 간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내 안에 부정적 반응의 자료로 쌓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분명 필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과 별개로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나의 신경씀 자체'에 대한 반응과 다룸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내가 신경 쓰는 무엇이 있으면 그게 정말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라 여긴다. 즉 나의 '신경씀' 행위 자체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착각이다. 물론 그게 중요하고 신경 써야 할 경우들도 있다. 그럴 땐 그렇게 해서 나를 보호하면 된다.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이다. 그럴 필요가 없을 때이다. 


그런데 대상의 중요성 문제에서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즉, 우리 인간이 가진 '신경 쓰는 기능' 자체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이전의 다른 조언들과 다른 부분이다. 대부분은 그 대상이나 상황 자체를 말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우리의 '신경 쓰기' 반응 자체를 말한다. 


우리의 '신경 쓰기' 기능은, 물론 유용하고 여러 도움을 주지만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절대적인 게 아니다. 전부가 아니다. 그냥 하나의 기능일 뿐이다. 잘 발전시켜온. 다만, 지금은 아직 진화 상의 과도기여서 그런지 우리는 내가 신경을 쓰면 그게 절대, 전부인 줄 안다. 그래서 뭔가 신경 쓰이면, 내가 신경 쓰는 이 판단과 과정, 현상 자체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결국 그 대상과 상황마저도 그렇게 여긴다. 


자, 대상과 상황의 중요성도 따져봐야 하지만 우리 이제는 나 자신의 '신경 쓰기' 반응 자체를 보자. 이게 별 게 아님을 눈치채자. 필요하면 잘 써먹지만, 아닐 땐 이것 역시 일어나더라도 그냥 무심해 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쉽진 않다. 하지만 점점 더 무심하게 될 수 있다. 특히 그 정체를 선명히 보면 볼수록 말이다. 


나의 '신경 씀' 자체에 무심해지기 시작하면 상대나 상황에 대한 무심은 이제 저절로 따라오기 시작한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무심하려, 신경 안 쓰려하지 않아도 말이다. 이건 경험적으로 오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신경 쓰여도 괜찮다. 그걸 도구로 해서 내가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잘 대처하면 된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실제 그 상대, 대상, 상황이 그럴만한 가치, 의미, 정도가 있는지 드라이하게 보는 것이다. 아닌 부분들은 그 아닌 만큼 쳐내가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나의 '신경 쓰기' 기능 자체를 보자. 


신경 쓰인다고 무조건 휘말려 들지 말고, 그냥 심드렁하게도 한번 보자. 나의 '신경씀' 자체를 말이다. 


이것이 좋은 방법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