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 세 가지. 탐구심, 꾸준함, 진실성
'열정'과 '노력'은 본래는 좋은 뜻이나 한국 사회에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열정 페이, 노~~~력' 같은 단어가 그런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본래의 뜻이 왜곡된 것이다.
열정과 노력이 왜곡되어 버린 가장 큰 원인은 비정상적 사회 시스템이다. 왜곡된 사회 구조와 제도 그리고 인식이 그것이다.
열정과 노력은 여전히 삶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의 문제는 개인이 아무리 열정을 가지고 또 노력을 해도 그에 상응하는 합당하고 정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열정을 가진 만큼, 노력한 만큼 그 결과가 나오게 되어야 한다. 현 한국 사회의 비정상적 시스템은 그러한 가능성을 막아 버렸다. 뒤따르는 결과는 개인들의 실망과 무력감이다.
기득권, 기득층이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비기득권자들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허무화시켜버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열정과 노력이 그 정당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결과에 따른 성취를 가질 수 있는 정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개인 혼자의 노력, 개인 대 개인 간의 충돌 등만으론 한계가 있다. 사회 구조, 제도, 정치, 경제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많은 이들에 이에 공감하며 각자 나름대로 애쓰고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그 힘이 부족하다. 더 뭉치고 더 지혜와 힘을 내야 한다.
열정과 노력이 왜곡되어 버린 또 하나의 원인은, '무엇'과 '왜'가 빠졌기 때문이다.
열정을 가지는 건 좋은데 무엇을 위해 가져야 하는가? 그리고 왜 가져야 하는가? 노력을 하긴 해야 하는데 무엇을 위해, 왜? 여기에 대한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고민과 모색과 답 없이 '그냥' 열정을 가지고 또 노력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기껏 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건 본인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타인들과 사회가 타성적으로 던져준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버린 경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무엇과 왜는 오래가지 못한다. 애초에 답이 되는 것이 아니었거니와, 그걸 위해 애쓰고 성취한다 해도 많은 경우 결과적으로 허상이 된다.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들은 속여도 자기 자신은 속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정히 열정과 노력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무엇과 왜를 반드시 먼저 선명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지 없이 차를 달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도, 차를 몰면 몰수록 뭔가 이상해지는 것이다.
탐구심, 꾸준함, 진실성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제 이 사회에선 그 효용성이 다한 열정과 노력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 삶의 기둥을 함께 보고자 한다. 그 세 가지는 탐구심, 꾸준함, 진실성이다. 이 세 가지 안에는 또한 앞서 말했던 '무엇'과 '왜'도 함께 들어가 있다.
첫째, 탐구심이다.
탐구심은 다른 말로 하면 호기심이다. 또한 궁금해함이다. 알고 싶어 함이기도 하다. 내 관심을 끄는 어떤 대상, 내용, 현상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마음, 궁금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궁금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지 '만드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삶에서의 나의 탐구욕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정말 궁금해하는 그 '무엇'들을 즐겁게, 성실히 찾아가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리고 타인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각자가 삶에서 기꺼이 관심을 가지고, 몰입할 수 있고, 잘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고,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게 바로 삶이라 할 수 있다. 그건 이상적인 것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그 현실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이상을 현실로 점점 만들어 나가면 된다. 이미 그렇게 만든 다른 사회들도 있다.
특히 한국의 어른이나 기성세대들은 아이들이나 젊은 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하기 싫어한다, 어떤 의욕도 없다' 식으로 매도하곤 한다. 당연하다. 현재는 한국 사회가 그리고 어른들이 아이와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의욕, 동기, 하고 싶음을 철저히 틀어막는 식으로 교육과 사회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에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아이들과 젊은이들 탓만 하고 있는 건 부당하다. 물론 모든 것은 '자기 책임 50% + 외부 책임 50%'인 측면은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둘 중 어느 요소가 더 큰 것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현재 한국의 경우엔 명백히 후자가 크다.
(기성세대들은 본인들의 시대에 자기들이 열심히 해서 뭔가 성공했다고 여기고 있다. 실제 급격한 경제 발전과 부를 이루었다. 그 노고와 노력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본인들의 열정과 노력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시대적, 상황적 외부 조건의 뒷받침도 큰 것인데 순전히 '본인들의 노력'으로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열정과 노력이 통했던 사회적 환경의 잇점도 큰 데 미처 그걸 생각지 못한다. 기성 세대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 사고의 과정이 그렇다. 내가 뭔갈 잘 하면 그건 내가 잘한 때문이고, 그 후에도 계속 같은 방식으로 될 것이라 여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실제 상황을 직시하고 그에 맞는 생각과 대응을 해야 한다. 기성 세대들에겐 이게 힘든 부분이다.)
마약 중독과 관련해서 유명한 실험이 있다. 좁은 케이지에 쥐 한 마리를 놓고, 작은 관을 통해 마약 물질이 든 액체를 조금씩 흘려주면 결국 그 쥐는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액체만 핥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험의 오류를 눈치챈 다른 실험이 있었다. 작은 케이지에서 마약 액체에 중독되어 계속 마시던 한 쥐를 큰 케이지에 넣어 주었다. 거기엔 친구 쥐들도 있고, 놀이 기구들도 다양하게 있었다. 그러자 그 쥐는 더 이상 그곳에 있는 마약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와 놀이기구와 넓은 케지이 안에선 더 이상 마약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쥐마저도 이렇게 다양한 대상들과 선택지가 있을 땐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본능이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삶이란 나의 책임 반, 외부의 책임 반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궁극적으론 나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서 외부 환경, 시스템, 정치, 경제, 사회적 요소들을 바꾸어 나가고 발전시켜 나가는 건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공동의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함께 해야 한다. 다만, 그러는 와중에 이제 내가 정말 알고 싶어 하는 것, 계속 궁금해하는 것, 스스로 찾아가고자 하는 것, 즐겁게 임할 수 있는 '무엇'을 능동적으로 찾아서 하는 것이다. 이건 다른 누가 해 줄 수 없다. 해 주어도 그건 가짜다.
꼭 무슨 엄청난 사명이나 소명 같은 게 아니어도 된다. 때로는 직업이나 일과 그 '무엇'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어떤 경우든 내가 처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서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사람들이 특히 아이들이 이것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 '무엇'은 또한 계속 변화해 갈 수도 있다. 나이에 따라, 환경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말이다. 그러면 또 그 변화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따라가면 된다. 중요한 건 그 '무엇'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고 누리고 향유할 나 자신이므로.
둘째는, 꾸준함이다.
혹시 꾸준함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아니, 그거 또 노~~력하라는 말 아니야?'라고 놀랄 수도 있다. 그러나 안심하자. 그 노력 아니다.
꾸준함은, 여기서는 '자연스러운 이어짐'이다. 앞서의 내가 스스로 알고 싶어 하고, 하고 싶어 하고, 누리고 싶고, 탐구하고 싶은 대상(들)과 관련하여 중간에 섣불리 멈추지 않고 계속 탐구해 들으가는 것을 말한다. 그게 노력 아니냐고? 그래 노력 맞다. 하지만 기존에 강요하는 노력과는 다른다. 기존에 '무엇'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도 답도 없이 그냥 무작성 타인들이, 사회가 주입한 뭔가를 위해 대책 없이 하던 그 노력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솔직히 모든 인간에게는 분명 게으름의 문제가 있다. 혹은 방심이나 무기력, 방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음의 요소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도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번 아웃(Burn Out) 증후군'이란 개념을 들어봤을 것이다. 글자 그대로 '다 타버리는 것'이다. 특히 현대 사회는 '피로 사회'이다. 강제로 되었든 자발적으로 되었든 인간은 자기 용량을 넘게 살아가면 결국 번 아웃되게 되어 있다. 엉뚱한 것을 해 주느라 정작 자기가 해야할 것,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심리는 하나의 치료책이기도 하다. 혹은 자연스러운 상태이기도 하다. 잠도 그렇다. 인간이 잠을 자는 동안 뇌세포들은 하루 동안 세포 안에 쌓였던 불순물들을 밖으로 내 보낸다고 한다. 또한 하루 동안 받아들인 경험과 정보를 정리한다. 그런데 만약 잠을 자지 않는다면?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게 되는 것이다. 휴식도 그렇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도 그렇다.
그렇게 우리 인간의 게으름(사실은 꼭 게으름이라 할 필요는 없는)은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긍정적 작용과 부정적 작용이다. 부작용은 뭔가를 해야 할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즉 '하지 않는 것'이 과도하게 되는 것이겠다. '꾸준함'은 이 게으름의 부정적 작용에 대한 능동적 대처라 할 수도 있다.
강제나 강요에 의한 꾸준함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행하는 꾸준함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사람에게 유익함을 준다. 기술과 재능은 더 정교해질 것이고, 지식과 정보는 더 쌓일 것이고, 관점과 통찰은 더 깊고 넓어질 것이다. 모든 게 더 선명해질 것이다. 자발적 꾸준함과 함께라면 말이다. 사실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남이 말려도 하게 되는 게 기본 원리이다. 그래서 첫 번째 '탐구심'의 요소가 중요한 것이다. 그게 자연스러운 꾸준함을 유발한다.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건 죄가 아니다. 오히려 안 해야 할 것을 억지로 하게 만드는 것이 죄이다.
셋째는, 진실함이다.
진실함? 그게 뭔지? 얼핏 듣기엔 앞서 두 개의 요소보다 뭔가 애매하고 추상적이기도 할 것이다. 무슨 진실함? 누구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진실하라는 거지?
여기서의 진실함은 일종의 '자가 점검'의 의미이다. 즉 자신의 진실함을 스스로 측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측정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과 반응을 계속 수정하고, 발전 시키고,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두 개의 요소인 탐구심과 꾸준함을 통해, 내 삶에서 내가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것들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바로 '과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가?'이다.
내가 생각하는 어떤 원칙, 진실, 원리, 근본, 순수에 따라서 잘 하고 있는가이다. 이것은 물론 어떤 '근본주의나 원리주의'적 측면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딱딱한 혹은 경직된 원칙이나 규칙 등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오히려 나와 타인을 죽인다.
이것은 좀 더 넓고 부드럽고 유연한 의미에서의 진실성이다. 내가 나를 위해서 그리고 타인들과 사회 공동체를 위해서, 내가 세운 그리고 함께 지키고자 한 보편적이고 고유한 원칙 등을 스스로 잘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뭔가를 스스로 깊이 탐구하고 또 꾸준히 해서 깊은 수준을 이루었다 해도, 이제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가 남게 된다. 나만을 위해서? 내 가족, 내 집단만을 위해서?
사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성'에 대해선 하나로 정해진 답은 없다. 만약 누가 누구에게 그런 걸 강요한다면 그건 또 다른 패착이 될 것이다. 이미 세상에는, 사회에는 그런 부당한 강요가 넘치고도 넘친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잘 살피고 있다면 느끼게 되고 행하게 되는 보편적 측면들이 있다. 누구든 좀 더 상식을 추구하고, 보편적 이타성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물론 인간의 뇌에는 '개체 이익을 추구하는 시스템'과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시스템'이 각각 존재한다고 뇌과학에선 말한다. 실제 뇌의 해당 부위, 신경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이기성과 이타성이 본능적으로 공존한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본능적 이타성의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무조건 타인과 전체 집단만 보라는 건 아니다. 인간은 그 누가 뭐라 해도 스스로 자신을 먼저 지켜야 한다. 내가 있고 세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당하고 당당하게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부분에서 최선을 다해 하자. 다만, 그러는 가운데에서 또한 또 하나의 본능인 이타성도 잘 지키고 수행하는 것이다.
사실 '진실성' 항목에 대해서는 이타성만이 전부가 아니다. 추가로 더 할 수 있는 말들이 있다. 이타성은 그냥 하나의 보기일 뿐이다. 진실성의 내용은 각 영역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즉 임하는 영역이 어디냐에 따라 적용할 진실성의 내용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스스로 주의 깊게 살피고 통찰해 나가야 한다.
다만 조금 넓은 의미에서의 기준이라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 그 진실성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분야, 어느 영역에서든 말이다. 이 기본으로 충분할 수 있다. 세부적인 적용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진실되게. 그런데 실은 인간은 결코 자기가 자기를 속일 순 없다. 혹 그런 듯 보이는 경우라 해도 그건 자기가 자기를 속인 게 아니라 본인은 뭔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억지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긴다. 그걸 알아채고 그러한 자기 기만에서 스스로 나오는 것이 진실성 요소의 핵심이기도 하다.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