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는 배를 그리워하고, 배에서는 집을 그리워하다
(이 글은 브런치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아주 긴 글'이 되겠습니다. 보통은 독자분들의 읽는 분량을 생각해서 적절히 양을 조절하는데, 이 글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여지는대로 쭉 썼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 미리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브런치에서는 세 번째로 올리는 영화 이야기입니다. 영화 <Triangle>, 2009년, 영국과 호주 제작, 감독은 크리스토퍼 스미스, 여주인공은 멜리사 조지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인간의 영원한 현재 불만족'이라는 주제로 한번 풀어볼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모든 인간이 빠져 있는 이 함정, 그리고 영화 속에서 주인공 제시가 빠진 끝없는 시간의 트라이앵글을 빠져나올 방법은 무엇인가?
아래는 네이버와 영문 위키피디아의 영화 소개 페이지 링크입니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3087
Triangle (2009 British film)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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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대한 리뷰들을 보면 대부분 신비로운 시간과 상황의 반복인 스토리 자체의 구도, 그리고 영화 속 각 장면이나 스토리들의 연결성, 감독의 의도, 주인공이 빠진 심리적 혹은 무의식적 문제로 접근합니다. 시지프스 신화 이야기를 주로 많이 인용하며, 가끔은 기독교의 연옥(죽음 후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가기 전에 임시로 머무르는 곳)에 대한 관점이 보입니다. 내가 사용하려는 불교의 윤회나 카르마(업)적 관점의 리뷰는,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주되게 쓰진 않을 것입니다만, 저는 마지막 관점으로 주로 보기도 합니다. 모두 '실제'가 아니라 일종의 메타포(비유)로서입니다.
이 리뷰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관점들 중 필요한 것은 도구로 사용하되 좀 다른 질문을 던져보고, 그리고 그 질문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들어가 볼 것입니다. 그 질문이 바로 위에서 말한 '제시가 빠진 시간과 상황의 반복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입니다. 물론 단지 영화 속 인물과 이야기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전반적인 하나의 문제 하나의 해결과도 연결시켜 볼 것입니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기 원하지 않으신다면 영화를 본 후에 계속 읽으시면 됩니다.
영화의 전체 흐름은 상황이 반복되는 구도입니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로는 사랑의 블랙홀, 타임 크라임, 소스 코드, 이프 온리, 타임 패러독스, 엣지 오브 투모로우, 나비 효과 등이 있습니다. 영화들 속에서의 '반복'의 패턴은 비슷하거나 또는 다릅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가장 최근의 영화로는 넷플리스의 오리지널 영화인 'ARQ'가 있습니다.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호주 출신의 매력 있는 여배우 멜리사 조지는 여러 영화와 TV 시리즈에도 나왔습니다만 개인적으론 2012년 영국의 첩보, 스릴러 드라마였던 'Hunted'에서 무척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래는 비교적 상세한 줄거리입니다.
(스포일러가 되므로 영화를 보실 분들은 영화 감상 후에 아래 글을 읽어 주세요. 혹은 이 영화의 스토리 전개의 복잡성상 만약 먼저 어느 정도 전개를 파악하고 영화를 보실 마음이면 아래 글을 읽으셔도 됩니다만 되도록이면 먼저 영화를 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영화 속 주인공 제스는 자폐증인 아들인 토미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극 중 상황을 봐서는 아이의 아빠가 제 구실을 못하거나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간 듯합니다. 혹은 합의 하에 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제스는 아마도 토미를 돌보는 데 많이 지쳐있는 듯합니다. 토미에게 종종 폭언을 하고 때론 때리기도 합니다. 어느 주말에, 웨이트리스 일을 하다 새로 사귀게 된 부자 남자 친구(그렉)의 요트에 초대되었고 아이는 특수학교에 맡기고 오랜만에 주말을 즐기러 갑니다.
항구에 도착해서 타게 되는 요트의 이름은 '트라이앵글'입니다. 바다로 출항한 지 얼마 후 배는 예보되지 않은 폭풍을 만나 뒤집어집니다. 곧 폭풍이 잦아든 후 뒤집어진 요트 위에 있는 일행들에게 아주 큰 유람선 하나가 다가옵니다. 배의 이름은 아이올로스(AEOLUS), '바람의 신'입니다. 아이올로스는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를 속인 시지프스에게 벌을 준 신입니다. 돌을 산 정상으로 밀고 올라가 정상에 도달하면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그 무한 반복의 벌입니다.
일행은 다행히 배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 큰 배에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객실 복도를 함께 돌아다니던 제스는 이상하게 자신이 이 배를 이미 알고 있는 듯 느끼며 그것을 일행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일행은 그냥 제스의 착각으로 여기고, 객실과 연회장, 극장 등으로 선원과 손님들을 찾아다닙니다. 제스는 집에 두고 온 토미 걱정이 점점 커집니다.
그러다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하나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혼자 배 안을 둘러보다가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채 갑자기 나타나는 일행, 누군지 모를 이가 쏜 통에 맞아 죽는 일행. 결국 마지막엔 제스만 남습니다.
마지막에 배의 외부 데크에서 두건을 쓴 의문의 인물과 마지막 결투를 벌이는 제스. 마침내 그를 난간으로 밀어붙여 바다로 떨어뜨리게 됩니다. 그때 그 의문이 인물이 제스에게 다급하게 소리칩니다. "모두를 죽여야 해. 그것만이 집으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이야. 토미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해. 모두를 죽여."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 채 제스는 그를 쳐서 바다로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잠시 후 배 아래에서 갑자기 도와달라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난간에 가서 바라보니, 처음에 이 배를 오르기 전의 상황 그대로 뒤집어진 요트 위에 자기 일행들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제스 자신도 포함된. 일행이 모두 죽은 그 순간 상황이 처음부터 다시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요트 위의 일행은 멀어서 배 위의 제스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채 배에 오릅니다.
하지만 아직 전체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제스는 그들에게 위험을 알려 배에서 내리게 하고자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일행에 제스 자신도 있으므로 쉽게 나서지를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혼돈에 빠져 실수로 혼자 배를 조사하던 일행 한 명을 죽이게도 됩니다(앞 팀에서 죽었던 그 일행은 앞 팀의 제스가 실수로 죽인 것이었던). 제스는 곳곳에 남아있는 일련의 흔적들을 통해 이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제스 자신의 말인 듯 한 내면의 목소리가 제스에게 '상황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아들인 토미에게 돌아갈 방법은 다른 일행을 모두 죽이는 것이다'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모두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스는 그 목소리를 거부하고 일행을 배에서 내리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때 머리에 두건을 쓴 의문의 인물이 일행들을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처음의 그 총격 상황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가 제스마저 총으로 쏴 죽이려 하기에 제스는 도망칩니다.
상황은 흘러, 배의 외부 한 데크에서 두 번째 팀의 일행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이가 제스의 품 안에서 죽어가게 됩니다. 배에 이미 타고 있던 이전 팀(주인공인 제스 팀의 이전 팀)의 제스에게 치명상을 입은 것입니다. 그때 제스는 아래 데크에서 다른 두 명의 제스가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마지막에 배에 오른 제스가 이전에 탔던 다른 제스(일행들을 죽이고 있는)를 때려서 기절시키고 바다에 빠드리는 장면입니다. 역시 다시 반복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데크 위에서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제스의 품에 안겨 있던 마지막 일행이 죽자, 곧이어 다시 배 아래에서 새로운 제스 일행이 바다에 뒤집어진 요트 위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나타납니다. 다시 반복입니다.
이제 제스는 흐름을 선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배에 오른 일행이 모두 죽게 되면 다시 새로운 일행이 나타나고 배에 오르게 되는 것을 파악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감정적으로 당황하거나 혼돈스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 할 일이 무엇인지 아주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도 결국 부분적인 파악이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배에 오른 일행을 다 죽여야 다시 새로운 일행이 올 것이므로 최대한 빨리 남은 일행을 다 죽이고, 새로운 일행이 나타나면 처음부터 배에 오르지 않고 보트에 그대로 남아 있게 하려 마음먹습니다. 그게 뒤에 올 일행을 살리는 방법이라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건을 쓰고 총을 들고 새롭게 배에 막 오른 일행을 쏘아 죽이기 시작합니다. 역시 이전 상황의 반복입니다. 처음의 그 두건을 쓴 인물은 바로 제스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제스는, 이전의 제스들의 행위를 자기도 모르게 따라하게 되는 겪이지만 약간의 데쟈뷔를 느낄 뿐 스스로 그것을 선명하게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세 번째 배에 오른 일행 모두를 죽이고 이제 마지막 남은 제스도 죽이려 합니다. 두건을 쓴 제스와 배에 막 오른 제스가 싸우는 바로 그 상황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싸움과 같이 두건을 쓴 제스가 싸움에 져서 배에서 떨어집니다.
잠시 후, 배에서 떨어진 제스는 한 해안가 모래 위에서 눈을 뜹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도로가로 나와 차를 빌려 타고 집으로 갑니다. 집에 도착한 제스는 집 밖 창문을 통해 집 안에 있는 토미와 그리고 자기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실수를 한 토미에게 심하게 말을 하고 때리기까지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면 죄책감에 잠깁니다. 그 행위는 사실 처음에 제스가 항구로 가기 전에 집에서 했던 바로 그 행위입니다. 그걸 보던 제스는 잠시 괴로워하다가 단호히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못난 자기를 죽입니다. 아이를 학대하는 자기는 아이와 함께 살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또 자신이 아이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자기는 이제 토미에게 잘 해 줄 마음이 확실한 것입니다. 제스는 죽인 자신의 시체를 차 뒤 트렁크게 싣고, 토미를 태우고 집에서 나옵니다.
어딘가로 향하던 제스의 차는, 그러나 해변 가 도로 위에서 마주 오던 트럭과 부딪치고 제스와 토미는 사망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차 사고 현장을 또 다른 제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영화와 다른 전개입니다. 그리고 한 택시 운전사가 제스에게 와서 아이를 살리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어디로 가는지 물으며 태워다 주겠다고 합니다. 다소 멍하게 보이는 제스는 무심한 어투로 항구로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바로 영화 초반에 나왔던, 남자 친구 그렉의 요트 '트라이앵글'이 기다리는 그 항구입니다.
택시에서 잠든 제스는 항구에 도착하여 깨어납니다. 택시 기사는 미터기를 켜 놓을 테니 돌아올 것이냐고 묻습니다. 제스는 꼭 돌아오겠다고 답 합니다. 그리고 요트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일행 한 사람을 만납니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처음 항구에 도착하던 상황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어디 있냐고 묻는 일행에게 잠시 멍하게 있다가 학교에 있다고 답하는 제스. 그리고 남자 친구를 만나 안도의 포옹을 하고 배에 오르며 영화는 끝납니다.
이제 제스는 다시 같은 상황을 반복해 경험할 것입니다.
영원히.
본질적인 변화가 없다면...
이렇게 영화의 줄거리를 비교적 상세히 쓴 이유는 이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바탕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영화를 보았어도 한 번에 전체 스토리가 완전히 들어오지 않기도 하기에 어느 정도의 의도적인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이후의 글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뉩니다. 우선은 이 영화에 대한 해석 몇 가지 버전입니다. 각각의 설정과 모델로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경우라 일부러 주요한 관점들을 다루어 봅니다. 그다음은, 실제 주요 부분인데, 제가 애초에 이 영화를 리뷰하고자 했던 그 관점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다른 관련 리뷰나 접근에서는 없었던 것이라고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는 주요 관점은 대략 아래처럼 있을 수 있습니다.
1. 순수한 '버뮤다 삼각지'식 미스터리
2. 여주인공인 제스의 의식과 무의식의 전개(꿈 포함)
3. 기독교식 세계관의 '연옥' 이야기
4. 불교식 세계관의 윤회와 카르마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의 관점입니다.
5. '무루의 조금 다른 영화 이야기'의 관점: 인간의 영원한 현실 불만족
아래는 영화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풀어 보는 말들입니다. 물론 어느 것이든 '맞다, 틀렸다'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본래 메타포(은유)는 다양한 해석이 원칙이니까요. 또 각각의 해석은 잘 이용만 하면 모두 나름의 효용성과 유용성이 있습니다. 재미도 있구요. 또한 어느 해석이든 너무 완벽성을 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메타포 자체가 완벽성이 목적이 아니라 적절한 자극과 깨우침이 목적이니까요.
1. 순수한 '버뮤다 삼각지'식 미스터리
가장 영화스러운(?)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스와 일행의 보트가 신비한 폭풍에 의해 4차원 혹은 평행 우주로의 이동 같은 그런 미스터리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물론 반복 상황 중에 제스와 토미가 탄 차가 사고를 당해 둘이 모두 죽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처음 시작에서는 제스가 토미를 주말 학교에 맡기고 혼자 항구로 간 것으로 하면 됩니다.
그리고 요트가 폭풍을 겪으며 4차원 혹은 다중 우주의 어떤 포털에 들어가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이제 계속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반복에서는 이제 교통사고로 마무리되면서, 제스는 새로운 제스로 다시 형성되며 항구로 가는 것입니다.
왜 이런 반복이 생기고, 언제까지, 어떻게 진행될지는 사실 모릅니다. 글자 그대로 '미스터리' 자체가 목적인 것입니다. 이런 스토리도 많죠.
이러한 유형으로 보더라도 충분히 이런 질문을 해 볼 순 있습니다. 이 리뷰의 메인 질문이기도 한데요. "어떻게 하면 제스가 이 무한 반복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입니다. 어쩌면 제스에게 이러한 미스터리한 일이 발생한 이유도 제스로 하여금 그걸 깨달으라고 혹은 그 방법을 찾으라고 주어진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 경우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미스터리한 존재들이나 외계인들이 실험일 수도 있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말이지요. 이런 가설은, 사실 이 영화와 영화 속의 제스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니기도 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바로 이런 반복 혹은 실험일 수도 있으니까요. 전체 인류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실험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 있는 관점입니다.
사실 이렇게 들어가면 뒤에 나오는 불교의 윤회와 카르마적 관점하고 연결되는 부분도 있게 됩니다. 그런 실험을 행하는 주체와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는 사실 핵심적인 게 아닙니다. 어차피 모르니까요. 그 주체가 누구고 그 대상이 누구냐와 상관없이 '지금 이 현재'는 존재합니다. 이 실험적 상황이 말이지요.
영화 '다크 시티(Dark City , 1998)'가 좀 다르긴 하지만 약간 비슷한 설정이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엄청난 염력 능력을 지닌 외계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인류를 완전 통제하는데, 매일 밤 12시마다 모든 사람의 기억과 역할 그리고 건물 등까지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새롭게 깨어난 사람들은 이제 주입된 기억으로 쭉 자신이 평생을을 살아왔다고 믿으며 하루를 보냅니다. 밤 12시에는 다시 새롭게 세팅되고 말이지요. 주인공이 어느 순간 그걸 서서히 눈치채게 되면서 외계인들을 물리치는 내용입니다.
2. 여주인공인 제스의 의식과 무의식의 전개(꿈 포함)
이 경우는 심리적 문제, 심리적 치유와 연결이 될 수 있겠습니다. 혹은 1번의 상황인데 그것이 당사자의 의식적, 무의식적 전개에 의해 마치 일종의 가상현실처럼 펼쳐지는 것으로 해도 되겠습니다. 아니면, 다만 복잡한 제스의 내적 심리를 영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구요. 꿈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제스가 스스로의 심리적 갈등, 억압, 왜곡 부분을 눈치채는 것입니다. 제스가 아니라 비슷한 경우의 누구라도 마찬가지이겠죠.
제스는 자폐를 앓고 있는 토미를 양육하면서 무척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경제적 어려움도 있을 거구요. 그래서 일터에서 만나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부자인 그렉과 인연이 되어 이 어려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은 바람도 클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토미에게 좀 더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최책감과 자책감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영화의 반복되는 혼란하고 비극적인 상황은 말하자면 제스의 의식적, 무의식적 갈등과 혼란의 표현인 셈입니다. 부자 남자 친구와 더불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도피 중에도 다시 아들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 이 양쪽 마음을 모두 느끼며 혼란스러워하는 마음, 느껴지는 죄책감 등. 모두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 영화를 해석하는 어떤 관점이든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일 수 있습니다. 제스가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꼭 무엇을 피하거나 억압하거나, 새로운 무엇을 가지거나 해야만 해결책이 되는 게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지혜로운 선택과 행동이 될 수 있을까?
꼭 제스와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다 보면 누구나 비루하거나 부족한 혹은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감과 우울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현실을 꿈꿉니다. 뭔가 부족한 것이 해결되고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이상적 현실. 그리고 그 둘의 차이에 대한 괴리감으로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이걸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내가 피하고자 하는 이 현실 그리고 되었으면 바라는 그 이상적 현실, 이 두 가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진짜일까? 오히려 이러한 바람, 상상 자체가 내가 스스로 만드는 하나의 의식적 감옥은 아닐까 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은 현실에 무조건 만족하고 안주해야만 한다거나, 이상을 꿈꾸지 말고, 변화를 추구하지 말라는 말이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계속 변화와 발전을 추구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게 여러 면에서 바람직합니다. 다만 그 때문에 현실에 대한 불피요한 습관적 불만족, 무의식적 부족감에 나도 모르게 매몰되거나 빠지게 되는 그런 과정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린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습관적 현실 불만족은 우리 몸과 마음의 힘을 뺏아갑니다. 걸어 나가라면 디딘 발아래의 바닥이 단단해야 하는데 무의식적 현실 불만족감은 그 바닥을 허물어 뜨리기 때문입니다. 디딜 곳이 없으면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법입니다. 심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에서는 의식적, 무의식적 갈등과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습관적 현실 불만족이란, 실제 필요하거나 절대적인 게 아니라 다만 우리가 스스로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해 일어날 수 있는 일종의 '오류'인 것을 우리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잘못된 방법이자 잘못된 전략으로서의 '습관적 현실 불만족'인데,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불만족감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거나 충실하지 못하고 오지 않을 미래, 이상을 계속 그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실제 현실과 상황을 제대로 바꾸는 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즉 집에 있을 때는 배를 그리워하고, 배에 있을 때는 항구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느 곳에 있어도 결국은 항상 불만족인 상태로 있게 됩니다. 마치 영화 속의 제스가 그랬듯이 말이지요.
사실 이 영화와 관련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미스터리설, 무의식설, 연옥설, 윤회설 등의 해석이 아닙니다. 그런 건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해석은 해석일 뿐이며, 어떤 해석으로 한다고 해서 그게 뭔가를 결정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화를 통해 그려지고 보이는 모습과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상황을 알아채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거울을 보고 나의 모습을 보듯이 말이지요. 그리고 그 알아챔으로 뭔가 실제적이고 실용적으로 바꿀 건 바꾸고 고칠 건 고치는 것입니다.
이 글의 본래 주제에 해당되는 이 이야기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더 깊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3. 기독교식 세계관의 '연옥' 이야기
동양에서는 없지만 서양 특히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중요한 영역이 '연옥'입니다. 물론 같은 기독교라도 개신교 과 성공회 등에서는 부정하는 세계관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가톨릭 그리고 그 이전의 기독교 내에는 연옥설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연옥설이 맞다, 틀리다 혹은 있다, 없다를 이야기하진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여부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해를 위해 연옥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 중 핵심 부분을 참고 삼아 한번 보겠습니다.
연옥(燃獄, 라틴어: Purgatorium)은 기독교 신학에서,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내세관 중의 하나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았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일시적인 정화를 거치는 상태를 말한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세상에서 지은 경죄나 용서받은 사죄(死罪)에 대한 잠벌을 미처 보속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지옥에 가지 않고 연옥에 가서 일정기간 동안 단련을 받는다. 그리고 연옥에서의 단련 기간을 채우고 영혼의 정화가 이루어지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신학적 개념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에서도 입증되었다. 하지만 지리학적으로 존재하는 장소로서의 연옥에 대한 시적 개념은 대체로 중세 그리스도 신자들의 경건함과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이다.
연옥이라는 개념은 특히 라틴 전례 가톨릭 교회에서 특히 받아들이고 있으며(동방 가톨릭 교회에서는 연옥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마지막 정화라고 부른다), 성공회나 루터교 일각에서도 대체로 이를 수용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도와 성찬예배 봉헌을 통해 죽은 이들의 영혼의 처지가 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많은 정교회 신자들, 특히 수도자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희망하며 기도하고 있다. 유대교 역시 사후 정화의 가능성을 믿으며 이를 게헨나라고 표현하는데, 게헨나에 대해 설명할 때 연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즉 영화 속에서 제스는 교통사고 장면에서 죽었고, 이제 그 영혼이 연옥이라고 할 만한 중간 영역에서 갇혀서 고통이 반복되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적 관점에서 제스가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 지의 여부도 따져볼 부분이긴 합니다만 역시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냥 놓아두기로 합니다.
이 연옥은 꼭 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만 보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역시 역사적으로 그 이전에 있었던 연옥 모델을 어딘가에서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와 전혀 관계없이 여러 시대와 지역에서 연옥과 같은 일종의 중간 지역, 정화의 구역과 시간대를 설정한 전승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중간 정화 구간이란,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의 상상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지요.
사실 이 모델로 볼 때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긴 합니다. 즉, 이미 제스는 죽었고 그리고 죽은 후에 모종의 형벌 혹은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충분히 될 때까지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옥에서의 징벌 혹은 정화 과정이 꼭 '반복'인 것만도 아니겠습니다. 한자 '연(燃)'이 '탈 연'자입니다. 원어의 어근도 그럴 것입니다. 본래는 '불'을 통한 것인데, 이것이 실제 불인지 은유적 표현으로서의 불(괴로운 상태 등을 의미하는)인지 모두가 해석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대로 올수록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역시 이 부분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무의식적, 습관적 현재 불만족'의 문제와 같이, 연옥에서 제스와 같이 어떤 징벌 혹은 정화 과정을 누군가 가지게 될 때,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깨닫는가'가 되는 것입니다. 깨쳐야 할 것, 알아채야 할 것, 눈치채야 할 것, 통찰해야 할 것, 각성해야 할 것을 여전히 모른 채 상황에 임하게 되면 결국 계속 같은 반응으로 같은 상황과 고통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어쩌면 현실의 고통이든 연옥의 고통이든, 그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여전히 알아채야 할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일 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지 누가 벌을 따로 주는 게 아닌 것입니다. 상황을, 남을, 신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선에서 자신의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면 이제 그 알아챔 자체가 상황과 상태와 경험을 바꾸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 이미 바뀐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린 '모르기에' 계속 잘못된 반응과 행위를 반복하며, 이제 '알아채게' 되면 바꾸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든 현실 혹은 연옥은 징벌도 정화도 아니라 오히려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오류를 깨우칠 기회 말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깨우침은 스스로에게 이익이 됩니다. 더 이상 어리석은 행위와 반응으로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지 않으니 말이지요.
유명했던 미드 '로스트(Lost)'에서도 마지막 시즌의 마지막 장면이 이 연옥 모델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무인도에 추락한 비행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기나긴 시리즈 동안 미스터리한 섬에서 온갖 상황과 모험을 겪는데요. 마지막 장면에 가면서 이들이 섬이 아니라 도시 등에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장면이 교차로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섬에서는 서로 알던 사람들이 전혀 모른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일종의 '각성'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모두가 서로 알아채고 상황을 알게 된 후, 마지막에 그 도시의 교회 같은 장소에 모두가 모입니다. 그리고 교회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모두가 함께 그 문 밖 그 빛으로 걸어 나갑니다.
비행기 추락 시 이들은 사실 모두 죽었던 것이고, 섬과 도시는 일종의 연옥 같은 중간계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자신들이 본래 상태를 깨치게 되고, 그리고 이제 다음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물론 드라마는 '로스트'는 꼭 연옥 모델이 아니라 다른 모델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합니다.
4. 불교식 세계관의 윤회와 카르마 이야기
이 관점에서는 실제 현실과 상징적 표현 모두가 가능합니다. 즉 이 영화가 실제 윤회 모델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윤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적절히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윤회 모델은, 사람의 경우라면 그가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죽은 후에 저승에 머물다가 다시 때가 되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 등의 저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모델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인간이 가질 본능적 느낌으로는 윤회 모델이 조금 더 상식적일 것 같은데,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게 그렇게 돌고 도는 게 관찰되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태양은 매일 지고 또 솟으며, 달은 기울고 또 차고, 지역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계절은 반복되어 돌아옵니다. 생명체들은, 비록 개체는 죽기는 하지만 집단적으로는 계속 죽고 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하지요.
그런데 윤회 모델의 보통 의미는 '특정 개체'가 어떤 식으로든 고유성을 유지하며 계속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걸 영혼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고유성'입니다. 즉 어떤 구별성입니다. 사람의 경우라면, 비록 태어나는 몸체는 달라지겠지만 그 영혼은 동일한 놈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모델은 한계가 많습니다. 우선 그 '고유성, 동일성'을 무엇으로 결정할 것이냐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고유성은 대체로 '기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혹은 '정보(데이터)'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이번 생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쌓인 기억과 정보에 의해 특정 개체의 정체성, 고유성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다 그 개체가 죽습니다. 뇌에 담긴 모든 정보는 뇌 기능의 멈춤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의 고유성은 이제 어디로 갈까요?
상식적으론 그냥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 가지 상상을 덧붙이면 그것이 비물리적 어떤 수단을 통해, 즉 영혼 같은, 보관되고 기억되고 그리고 이어진다고 설정해 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아뢰야식 혹은 장식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번 살았다 죽은 개체의 개체성과 별도로 쌓이는 정보인 셈이지요. 그리고 그게 차후에 다시 생명체로 내어나는 현상에서 어떤 식으로 영속되는 것입니다. 그건 에너지일 수도 있고 혹은 파동일 수도 있습니다. 모르죠, 현대 천문학에서 말하는 '암흑 물질 혹은 암흑 에너지'가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지도. 물론 하나의 모델이자 설정이자 상상일 뿐입니다.
모델에 따라선 한 개체의 경험이, 특정한 정보 양태로 보관되어 있다가 여러 개체로 나뉘어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여러 개체의 경험과 정보가 한 개체로 모여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개체적인 정보의 전이보다는 집단적인 정보의 전이가 본래 형식일 수도 있습니다. 한 종끼리만이 아니라 종 간에도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별과 별 사이에서도, 은하와 은하 사이에서도 가능하겠죠. 이러한 상상이 무한으로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윤회론과 관련해서는 마치 SF 소설처럼 여러 가지 설정이 가능합니다. 창의적으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윤회론을 이용한 소설, 드라마, 영화들이 이미 여럿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어떤 바탕은 있겠습니다만, 본질적으로 그것이 '설정'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윤회에 대해서는 또 다른 모델도 가능합니다. 꼭 죽었다가 태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사 모든 것이 윤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 하루가 시작했다 끝나는 것, 하나의 생각이 들었다가 사라지는 것, 내가 어떤 행동을 반복하는 것 등 모든 것이.
사실 마당의 풀이 올 한 해 잘 피었다가 가을에 말라서 죽으면, 겨우내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다가, 봄이 오면 씨가 발아하여 따시 풀이 자라납니다. 이 풀은 작년의 풀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별개의 것도 아니지요. 하나의 윤회입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다음 순간의 나로 윤회하고, 오늘 내가 내일의 나로, 올해의 내가 내년의 나로, 이번 생의 내가 나의 아이로 혹은 다음 생의 나의 또 다른 후손으로 윤회합니다. 모두 윤회입니다.
특정 윤회론으로 한정 짓지 않는다 해도 우주가, 자연이, 우리의 삶은 다분히 윤회적 흐름으로 진행된다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면,
집에서 배로, 배에서 집으로. 제스의 반복되는 상황은 기실 우리 인간의 윤회적 삶의 상징입니다. '카르마'는 '업'이라고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윤회 속의 '정보' 즉 데이터입니다. 데이터 자체이기도 하고 데이터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상호 작용의 과정과 결과이기도 하겠습니다. 어쩌면 물리적 법칙과도 비슷합니다.
크게 보면 윤회는 기본적으론 '반복'입니다. 완전히 똑같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게도 아닌, 어느 정도 비슷한 유형 안에서 어느 정도의 '변이'를 가지며 반복되지요. 이 변이가 어떤 면에서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보통 윤회니 업이나 말할 때는 아무래도 선업이니 악업이니 혹은 인과응보니 하면서 뭔가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선악, 호오(좋고 싫음)의 요소로 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냥 드라이한 흐름이라고 봐야 합니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하는 판단은 순전히 인간의 판단일 뿐 그냥 정보와 조건에 의한 자연스러운 반응과 과정들이 있는 것이지요.
여하튼, 제스는 '반복' 속에서 매번 조금씩 다른 선택이나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미세하게 그다음 반복에서 다른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요. 몇 초간의 단위에서, 하루 단위에서, 혹은 일 년 단위에서, 혹은 수 십 년의 단위에서, 우리는 매번 같은 반응과 행동을 하기도 하고 조금씩 다르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다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 변이의 정도에 따라 그다음 초, 일, 년의 상황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장하면 이제 이 생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의 모습이 영향을 받는다 할 수 있겠지요. 물론 '다음 생'은 하나의 설정입니다. 그러나 다음 초, 내일, 내년, 수 십 년 후는 실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반복을 하는 혹은 윤회를 하는 당사자는 '기억을 잃어버림'이라는 설정에 의해 그 전의 모든 경험을 그대로 선명하게 가져가지 못하는 핸티캡은 가지고 있지만, 여하튼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이전의 문제가 있었던 반응, 선택, 생각, 느낌, 행위와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기억을 잃어버림'은 얼핏 보면 설정이기만 할 것 같지만, 그러나 실제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라고 합시다. 그러면 이제 아이에게 내가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잘못이 그렇게 크지 않거나 혹은 설사 어떤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뭔가 좀 더 지혜롭게 혹은 성숙하게 대응을 하고 지도를 할 수 있는데 그만 그냥 짜증을 내고 화풀이를 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며, 그렇게 한 나도 마음이 영 좋지 못합니다. 후회를 하고 다음엔 좀 더 다르게, 잘 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후에 또 아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나는 그 잘못된 반응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실제 과거의 그 일을 기억하고 심지어 스스로 한 맹세도 기억하지만 실상 '기억을 잃어버림'의 상태와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망각'은 꼭 어떤 설정만은 아닌 것입니다. 실제 바뀌지 못하면 그건 '망각'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영화 속 제스는 계속 '잘못된 반응'을 되풀이합니다. 조금 바뀌는 듯한 부분도 보이지만 본질적으론 그렇게 크게 바뀌는 게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결과도 같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루 단위, 일 년 단위, 수 십 년 단위의 삶 말이지요. 확장하면 이생과 다음 생의 단위도 가능합니다. 윤회하는 주체가 있는가 없는가는 잠시 놓아두고 말이지요.
제스의 반복을 밖에서 관찰하는 우리는 이제 제스가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압니다. 그러나 제스 본인은 망각으로 인해 알지 못합니다. 데자뷔의 기시감은 있지만 선명치 않아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같습니다.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가장 큰 단위의 윤회에 걸쳐 모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능동적이고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적절할 다른 말로 하면 '알아채는 것'이고 '눈치채는 것'입니다.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의 경험, 이전의 윤회를 헛되게 하지 않고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생과 생 사이의 윤회가 아니라 순간과 순간의 윤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윤회, 작년과 올해와 내년의 윤회에서 말이지요.
5. '무루의 조금 다른 영화 이야기'의 관점
(이제 드디어 마지막입니다. 글의 처음에도 썼지만 이 글은 브런치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아주 긴 글'이 되겠습니다. 보통은 독자분들의 읽는 분량을 생각해서 적절히 양을 조절하는데, 이 글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이는 대로 쭉 썼습니다. 그러므로 양해하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에 쓴 4가지 정도의 관점과 별도로, 이제 제가 이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집에서는 배를 그리워하고 배에서는 집을 그리워하는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집에 있을 때는 집에 있는 대로 불만이고 배에 있을 때는 배에 있는 대로 불만의 상태가 될 뿐이다. 결국 어디에 존재하든, 어디로 가든 불만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문제를 저는 애초에 제목에서 '인간의 영원한 현재 불만족'이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살면서 현재를 잘 즐기고 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체를 따져보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만족하며 존재하는 순간보다는 '다른 때, 다른 곳'으로 주의를 빼앗기며 존재하는 구간이 훨씬 많은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다른 때, 다른 곳을 지향하지 말자는 것은 아닙니다. 추구하지 말거나 바라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좀 더 나은 것, 다른 것들을 추구하고 바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또 삶의 동력이나 보람이 되기도 합니다. 적절하게 잘 사용하면 말이지요. 그래서 그 변화와 성취로 만족과 보람을 얻으면 되니까요.
문제는 부적절한 바람의 경우들입니다. 특히 엄연히 존재하는 '현재'에 대한 무의식적 불만족에 자꾸만 빠지게 되는 경우라면 더더욱 말이지요.
우리가 그런 패턴에 빠지게 되는 것, 즉 우리가 다른 때와 다른 곳을 바라는 것은 '현실이 불만족스럽다'는 우리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판단이 맞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으며 우리는 항상 바람직한 변화와 좀 더 성장하게 되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현실은 항상 불만족 상태이다. 현실의 불완전성은 사실이다'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비록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모종의 변화를 위한 동력도 되고 에너지원도 되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만족감, 충분함, 풍족감, 안정감, 좋음을 느끼고 누리면서 동시에 변화를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 만족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나아가 건강한 현실만족은 긍정적 변화의 추구를 더 자연스럽게, 능동적으로 하게도 도와줍니다. 이러한 현실만족은, 개인적인 심리적 차원도 있겠고 사회적인 시스템의 구비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 안전망, 충분한 복지 정책의 구축이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과 사회, 두 축에서 모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현실 불만족은 우리에게서 에너지를 뺏어갑니다. 즐거움과 여유도 말이지요. 삶을 쫓기듯이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마땅히 누리거나 바라보아야 할 것들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적게 가지면 적게 가진대로,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진대로 각각의 수준에서 현실 불만족감을 가집니다. 개인과 집단 모두에서 그렇습니다.
영화 속의 제스라면, 집에서 자폐증이 있는 토미와 산다면 그걸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배에 가서는 집과 토미를 그리지 않았습니까?(물론 여기서 말하는 배는 꼭 그 유령 유람선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제스가 집과 토미에게서 자유롭고 싶어 바랬던 부자 남자 친구와의 요트에서의 주말, 바다에서의 주말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걸 '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아이러니를 한번 보십시오. 배에서 제스는 얼마나 집에 가고 싶어 하고 토미를 그리워합니까. 집에서는 그렇게 힘들어하고, 토미에 대해서도 학대 비슷한 행위를 할 정도로 뭔가 자기 조절 능력을 잃었던 제스인데요. 그리고 반대로 항구와 배로 떠나기 전의 제스는 집에서 배를 그리워합니다.
영화 속의 상황이 버뮤다 삼각지의 미스터리 상황이든, 심리 상황이든, 연옥이든, 윤회이든 그 무엇이든 제스는 사실 그 자리에서 이 반복을 끝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에서는 집의 삶을 온전히 살고, 배에서는 배의 삶을 온전히 사는 것입니다
말이 쉽지 그게 잘 되겠냐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분명 힘들고 또 어려운 게 확실한데 무조건 현실에만 만족하란 말이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연 내가 지금 불만족스럽다, 부족하다 여기는 현실은 '절대적'으로 그런가. 그리고 내가 그리는 이상은 또 절대적으로 그런가.
물론 실제로는 집과 배를 왔다 갔다 하는 반복이 아니라 집에서 파티 장소로, 파티 장소에서 배로, 배에서 여행지로 다양하게 그 바라는 상황이 바뀌기도 합니다. 이전의 상황과는 다른 새로운 상황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결국은 여기에 있을 때는 저기를, 저기에 있을 때는 여기를 바라는 패턴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항상 '이미 있는 곳에서 다른 곳을 바람'의 양태인 것입니다.
만약 제스가, 집에 토미와 함께 있을 때는 마치 나중에 배에서 바랄 정도로 토미에게 잘 해 주면 토미와 함께 잘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만약 제스가 배에서, 이전에 집에서 바랬던 것처럼 유람선 자체를 즐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집에서는 집에서대로, 배에서는 배에서대로 잘 살게 될 것입니다.
배에서는 제스가 잘 지내려 해도 이전의 제스가 두건을 쓰고 총으로 사람들을 죽일 것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총격 행위 자체가 이전의 제스가 배를 떠나고 싶어 하기에 행하게 된 행위입니다. 즉, 처음부터 제스가 배에서는 배의 생활을 온전히 즐기기로, 누리기로,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 후의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모든 경우에 적용됩니다. 신비하고 미스터리 한 상황이든, 무의식 상황이든, 연옥이든, 윤회이든 모두 말이지요.
물론 앞서 말했듯이 '현실 불만족'이 모두 개인의 문제인 것만은 아닙니다. 또 정신적 문제인 것만도 아닙니다. 분명 현실적, 사회 구조적, 경제적 원인도 아주 큽니다. 특히 부의 양극화와 대중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전 지구적으로 퍼져 있는 현 시대에서는, 실제 생활과 삶이 어려운 다수의 대중들은 당연히 힘든 현실에 불만족감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런한 집단적, 구조적 모순과 미성숙은 처리하고 올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류의 공동 과제이자 책임입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측면을 보면, 인간은 자신이 어느 수준에 있든 그 자리에서 결국 현실 불만족감을 가지게도 됩니다. 이것은 잘잘못을 떠나 신경생리적으론 '역치(閾値)'의 기제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신경과 의식은 이미 익숙해진 자극에 대해선 당연한 듯이 여기게 되며, 더 이상 그것이 자극이 되지 못하기에 계속 더 강한 자극 혹은 새로운 자극을 바라게 되는 부분입니다. 혹은 적극적으로 바라진 않더라도 더 강한 것이 와야 자극으로 느껴지게 되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신경적 무덤덤함, 무감각'을 우린 잘못 해석해서 '습관적 현실 불만족감'으로 느껴지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 대한 통찰도 필요합니다.
역치(閾値)
1 . <물리> 일반적으로 반응이나 기타의 현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계(系)에 가하는 물리량의 최소치. 보통 에너지로 나타낸다.
2 . <생물>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자극의 세기를 나타내는 수치.
일전에 한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재산 순위가 상위권에 드는 한 대기업 2세 경영자에게 자기가 가진 돈에 만족하는가라고 물었던 적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무엇이었을까요? '만족하지 않는다'였습니다. 자기는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조스 같은 부자만큼 더 벌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인이 봤을 땐 차고도 넘치는 재산이지만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는 그 정도 재산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냥 당연한 것이지요. 심지어 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종의 불만족 상태이지요. 자신이 알고 있는 지구 상 최대 부자 중 한 사람만큼 벌어야 만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런 존재입니다.
인간적이고 지혜로운 풍모와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현 가톨릭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부자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결코 '낙수 효과' 즉 넘친 부가 아래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그릇은 내용물이 넘치면 넘칠수록 더 커지기 때문이다."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큰 통찰의 말입니다.
제법 오래전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대기업의 계열사 사장이 인사철에 더 상위급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지방에 있는 기업 소유 큰 공장의 사장으로 가게 됩니다. 그는 결국 자살을 택합니다. 자신이 기존에 있던 위치에서는 지방 공장 사장으로의 변화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이고 탈락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머리 속에 그려진 '배'가 있었기에 그 배가 아니면 스스로 절망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재산도 상당하며, 그리고 지방 공장의 사장 직위도 결코 완전히 망한 위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는 그게 끝이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남달리 성공과 성과를 추구했던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론 본인과 그리고 가족들에게 너무나 안타까운 일로 결말이 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이야기가 무척 길었습니다.
이 글은 사실 '행복'에 대한 글입니다. 혹은 '잘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본인이 그릴 수 있는 최선의 비전과 바람들을 그리고, 또 이를 성취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해서 마침내 이루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린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그런 삶을 살면 됩니다.
다만, 그런 성취의 삶을 살든 살지 못하든 '행복 혹은 잘 사는 것'은 별개의 것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정한 무엇이 되고, 특정한 무엇을 이루어야만 만족이고, 행복이고, 제대로 사는 것이고, 제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건, 말하자면 영화 '트라이앵글'에 나오는 일종의 '집에서 그려진 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배를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또 타고 싶으면 타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곳이 집이든 배이든 우리는 그곳에서 잘 살 수 있습니다. 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채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더욱 능동적으로 다음 과정을 그리고 성취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낫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집에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냅니다.
배에 있을 때는 배에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냅니다.
그러면 어떤 미스터리도, 무의식적 혼란도, 연옥도, 윤회와 카르마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