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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루퍼, 시간 암살자>와 불교의 연기법

살고 싶다면 '나'를 제거하라!

by 무루 MuRu

아마 브런치에 올리는 글로서는 두 번째 영화 이야기인 듯합니다. 이번 영화는 2012년 출시된 할리우드 영화 '루퍼(Looper)'입니다. 조셉 고든-레빗, 브루스 윌리스 주연입니다. 역시 일반적인 영화 리뷰가 아니라 제가 보는 나름의 관점으로서의 리뷰입니다. 영화 내용을 상세히 말씀드리는 스포일러가 있는 글이므로 혹시 영화를 보실 분 중에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은 영화를 먼저 보시고 읽으세요. ^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8331


영화 '루퍼(Looper)'를 보고 각본과 연출이 만족스러워서 두 가지 모두 했다는 감독 라이언 존슨(Rian Johnson)에 대해 알아보니, 의외로 이전에는 그렇게 인상적인 영화 작품이 없었다. 인터넷에 있는 이 영화에 대한 관객 리뷰 등에서는 호평이 주로 많은데 가끔 영화 설정에 불만을 표시하는 글 혹은 영화 진행을 따라가지 못해 하는 불평들이 있다.


모든 ‘스토리’가 그렇다. 메타포(비유)는 그 자체보다는 그에 의해서 사람들이 뭔가를 '스스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본래 목적이다. 만약 영화를 메타포로 본다면, 내용이나 구성 자체를 가지고 모순이나 모자람 등을(특히 SF 장르 메타포라면 더욱더) 지적하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어차피 어떤 ‘스토리’든 꼬투리를 잡으려면 예외가 없는 법이니까.


각설하고,


영화 제목인 Looper를 보면 어떤 ‘archetype’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짐작된다.돌고 도는(하지만 평면의 원이 아닌 입체적 나선형) 그 무엇.


관점에서 이 영화의 주제 평소에도 관심이 많은 불교의 연기법으로 보였다. 기존의 전통적이고 고리타분한 인과론이 아니라 뭔가 좀 더 새롭게 조망해 보는 인과론.


참고: 연기법 혹은 인과법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남 또는 인연(因緣: 통칭하여, 원인)따라 생겨남의 준말로, '연(緣: 인과 연의 통칭으로서의 원인)해서 생겨나 있다' 혹은 '타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現象界)의 존재 형태와 그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因]과 조건[緣]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연기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 또는 줄여서 인과법칙(因果法則) 혹은 인과법(因果法) 또는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위키 백과에서 일부 발췌)


불교의 연기법은 인간이 개발한 가장 탁월한 개념의 하나로 인정할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대사 중에 계속 ‘cause and effect’라는 개념이 나오기도 했다(앞 세대 네오라고 추론되는, 재수 없는 프랑스인인 메로빈지언이 계속 말했던).


연기법의 가장 큰 약점이 있다. 물론 연기법만의 약점이 아니라 언어로 된 개념이라면 모두 해당되는 약점이기도 하다. ‘연기’라는 말 자체가, 본래 진리를 그대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 역시 언어에 불과하다. 근접하게 혹은 뭔가 유사하게 표현은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최대한 가까이 가도 벽에 비친 ‘그림자’이다. 실제 물건과 그것의 그림자의 차이란 사실 본질적으론 어마어마하다. 아예 다른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 ‘연기의 법칙’을 꿰뚫거나 혹은 깨닫는 것이 하나의 큰 깨달음이 되는데,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연기’라는 개념 자체 만들어진 인위의 개념일 뿐이니 그 존재 자체가 없 가치가 있기나 한지 의심할 수 있다.


(주의: 아래에서부터는 영화 내용이 상세히 나옵니다. 스포일러를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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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태의 시작은 ‘레인 메이커’라는 미래의 대학살자가 루퍼(시간 암살자)들을 막 죽이면서 시작되었다. 모든 사태의 ‘원인’다. 그 과정 중에 레인 메이커가 영화의 주인공인 '킬러 조(부르스 윌리스)'를 처리하려는 중에 그의 아내를 죽인다. 킬러 조는 분노하여 복수를 하고자(그리고 아내도 살리고자) 30년 전 과거로 돌아가 어린아이인 레인 메이커를 죽이려 한다.


늙언 조가 과거로 와서 ‘젊은 조(조셉 고든 래빗)'와도 얽히고 설키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벌어진다. 영화의 후반에 가면 결국 늙은 조, 젊은 조, 어린 레인 메이커, 레인 메이커의 엄마가 모두 모인 상황이 된다. 그렇게 모여게 되면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면이 펼쳐진다.


늙은 조는 미래의 모든 원흉인 어린 레인 메이커를 죽이려 한다. 이 놈은 자라면 악마 같은 놈이 될 것이니까. 이 놈을 죽이면 혹시 미래가 바뀌면서 자신이 다시 아내가 살아있는 미래로 갈지도 모른다는 그 애잔한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레인 메이커의 엄마는 아이를 착하게 키우면 그 모든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기가 대신 총에 맞아서라도 아이를 살리려 한다. 아이는 그 사이 도망을 가려한다.


여기서 질문이 있다! "이제 늙은 조가 아이를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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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젊은 조가 모든 상황을 한 번에 알아차린다!


영화의 마지막, 죽이느냐 마느냐의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만약 늙은 조가 엄마를 죽인다면, 엄마의 희생 덕분에 살아서 도망친 아이는 살인자에 대한 원초적 분노를 지닌 채 살아간다. 영화의 설정상 아이는 엄청난 염력(초능력)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성인이 되었을 때 모든 범죄조직을 접수해서 거대한 테러리스트가 된다. 자신의 원수인 루퍼도 다 잡아 죽인다. 늙은 조도 잡히고, 그 와중에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도 죽게 되었다.


늙은 조는 복수를 하려고(그리고 아내를 다시 살리려고) 과거로 돌아가서 원흉인 어린 레인 메이커를 죽이려 한다. 상황이 얽혀서 엄마가 대신 죽게 되면서, 간신히 도망가 살아난 아이는 트라우마와 복수심으로 미래에 흉폭한 (초능력) 테러리스트가 된다.


이제 인과가 엇갈리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 복잡한 복수극 혹은 비극을 먼저 시작한 건 누구지?’


기존의 단선적 시간 개념을 이용한 ‘인과론’으론 답이 나올 수 없다. 어떤 ‘언어적 개념’을 현란하게 쓴다고 해도 답은 안 나온다. 왜냐하면 ‘시간’ 그리고 ‘인과’라는 것들 자체가 사실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과학에 해당하는 물리학의 상대성 원리나 양자 물리학에서 이미 ‘시간-공간, 입자-파동’ 등이 ‘이름뿐임'을 보여주었지 않았는가?


불교의 연기법에서도 직선적이고 단선적인 모델을 사용하진 않는다. 단순한 인과법칙인 ‘원인-결과’론이 아니라 ‘dependent co-arising’의 뜻이 강하다. 심지어 화엄사상에서 나오는 ‘인드라 망’은 존재하는 모든 보석이 서로 연결된 실시간 '상즉상입' 네트워크 모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보석 ‘하나’가 반짝하면, 우주의 존재 전체망의 모든 보석이 그 영향을 받아 실시간으로 '다같이' 반짝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그 구분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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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자.


마지막에 감독은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늙은 조가 아기(레인 메이커) 엄마를 죽이기 직전의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젊은 조가 스스로 자신을 죽이게 만든다. 젊은 조가 죽는 순간, 늙은 조도 죽고(과거의 내가 없으니 자연히 미래의 나는 사라진다) 엄마는 죽지 않는다. 이제 아기는 ‘분노와 복수의 절대 화신’이 될 필요가 없다.


글이 길어졌다. 이쯤에서 결말을 내어 보자.


살다보며 언어로 만들어진 개념으로는 만족스러운 답을 구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특히 죽느냐 사느냐의 절체절명의 현실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는 뭐가 답인지 궁리만 하고 있다간 다 죽는다. 젊은 조는 ‘행동’을 취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이 ‘끝없는 죽음의 고리(Loop)’를 끊을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을.


젊은 조가 '자신'을 죽이기로 한 결말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이 '나'임을 눈치챈 것이다. 이것은 얼핏 불교의 '무아 사상'과도 연결된다. 주의할 것은 불교의 무아 사상은, '내가 있다, 내가 없다'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부분이다. 불교의 무아 사상은 '나'라는 이 '주체 설정 행위'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이다. 가령 '토끼의 뿔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있다, 없다' 모두 답이 될 수 없다. 이 질문의 본래 목적은, '토끼의 뿔'이란 것이 애초에 '설정(만들어진 것)'임을 눈치채게 하는 것이다.

'무아와 유아'의 주제도 마찬가지이다. '나라는 것이 없다, 나라는 것이 있다' 모두 답이 아니다. 우리가 '있다, 없다'를 따지려는 그 '나'란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허공 중에서 만들어진 '설정'에 불과하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내는 번민과 고통과 불안의 모든 근원이 바로 이 '나'라는 주체의 설정, 그리고 이 만들어진 설정 자체를 절대시하고 전부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깨달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깨달음은 이렇게 글로 간단히 끝나는 건 아니다. 꾸준하고 진실한 탐구에 의한 실제 눈치챔(통찰)이 있어야 한다. '나'라는 것은 설정된 것임을 눈치채되,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하거나 허망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잘 사용하고 활용하는 것임을 말이다. 최대한 잘 사용하되, 그것이 절대적이고 전부가 아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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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결말을 꼭 불교의 '나' 주제와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다른 접근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맞이하는 삶의 여러 문제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할 때 꼭 기존에 생각하던 방법만 있는 게 아니다. 원인이라 굳게 생각했던 것이 진짜 원인이 아닐 수 있다. 나도 미처 모른 상태로 내가 원인을 만들어 내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문제가 존재하고, 그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이제 좀 더 근본적인 원인, 좀 더 심층적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때로 마치 '나를 죽이는 것'과 같을 정도의 파격을 지닌 것일 수도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이 원인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나의 내부에 있는 경우도 있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설정을 했지만 실제 삶의 문제에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실패한 기존의 방법’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실패와 고통의 결과를 만들 수밖에 없는 '잘못된 해결책'들이 가장 피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의 연기성, 인연성을 지혜롭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삶에서 혹은 문제 상황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꼭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그 결과가 나와야만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고 강하게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마치 늙은 조가, 레인 메이커를 죽이고 자신의 아내를 다시 살리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은 목표라 여겼지만, 젊은 조는 그것이 아님을 눈치챘듯이 말이다.


젊은 조는 마지막 순간 핵심을 눈치채고 결국 문제를 해결한다.


/


마지막으로, 내가 말한 이번 리뷰와 상관없이 이 영화에 대해 어떤 내적반응을 일으킬지, 어떻게 이 메타포를 해석할 지는 관객 각 개인의 몫이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8331
감독 라이언 존슨(Rian Johnson). 1973년 12월 17일. 루퍼 (2012) , 브레이킹 배드 시즌3 (2010) , 블룸 형제 사기단 (2008). 2006년 19회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 유망감독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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