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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대인의 장자의 나비 꿈. 영화 <17 어게인>

영화 <17 어게인>, '지금 여기'의 소중함

by 무루 MuRu

그동안 브런치에 여러 글들을 써 왔는데요, 아마 영화 소개 이야기는 처음인 듯합니다. 물론 제가 글 쓰는 스타일 상 영화 이야기만 하진 않겠고 말이지요. 소개할 영화는 <17 어게인>입니다. 2009년 미국작입니다. 아래 링크를 보시면 조금 더 상세히 아실 수 있습니다. 우연히 봤다가 무척 매력적이라 브런치에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9197


영화는 마치 현대인들이 꾸는 '장자의 나비 꿈(호접지몽, 胡蝶之夢)'과 같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장자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자기가 나비였는데 깨어나서 보니 자기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었는지, 아니면 현실의 자신이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인지 혼란에 빠졌다는 유명한 설화입니다.


장자가 꿈을 통해 경험한 것을 현대인들은 영화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지요. 영화는 어떻게 보면 꿈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강력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기술을 발달시키며 어떻게 하면 좀 더 '나비 꿈'을 잘 만들고 잘 경험할 수 있을까에 온통 매달려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물론 우리의 삶 자체가 나비 꿈이기도 합니다)


초기 포멧은 사람들이 직접 연기하는 연극이었겠구요, 점점 발달해서 영화가 나오고, 더해서 엄청난 퀄리티를 보여주는 CG(컴퓨터 그래픽)의 시대로 왔습니다. 물론 그림과 문자를 포함한 책도 그 한 역할을 톡톡히 해 오고 말이지요.


이제는 더 기술이 발달해 VR(가상 현실), AR(증강 현살) 그리고 심지어 MR(혼합 현실)의 시대가 막 시작되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 이 기술들의 완성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 인간은 더욱 생생한 '나비 꿈'들을 꾸게 될 듯합니다. 나비 꿈의 시조인 장자가 현대에 온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주1) 스포일러 주의!: 이 글은 <17 어게인>이라는 영화를 소개하기 위한 글이므로 필요에 의해 줄거리를 많이 쓰게 될 듯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영화를 먼저 감상하고 싶으신 분들은 선 관람 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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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이 영화는 37살의 남자 주인공이 20년 전인 1989년 17살로 돌아가는 설정이 주된 경우입니다. 여러 영화에서 많이 쓰였지만 여전히 재미있는 구조이지요. 주인공의 이름은 '마이크 오도넬'입니다.

17살, 전도 유망한 고등학교 졸업반 농구 선수인 마이크는 대학 진학 스카우트가 걸린 중요한 경기에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경기 전에 사랑하는 연인인 스칼렛과의 대화에서 그녀에게 임신 소식을 듣게 됩니다. 경기를 잘 해서 대학을 가게 되면 할 수 없이 그녀와 떨어지게 되는 마이크. 얼마든지 오고 가면서 만날 수 있기에 그냥 둘만 서로 떨어지는 건 큰 문제가 없지만, 스칼렛이 아이를 낳게 되면 모든 상황이 달라집니다. 마이크는 그녀와 아기를 놓아두고 대학을 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멍한 상태로 경기에 임하던 마이크는 스칼렛과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선택합니다. 경기 시작 잠시 후 공을 그대로 코트에 놓고 스칼렛을 향해 뛰어갑니다. 아무도 없는 경기장 복도에서 둘은 포옹을 합니다. 그리고 결혼. 마이크는 자신의 보장된 미래가 아니라 사랑과 책임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20년 후의 장면에서 뭔가 삶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꼬이고 있는 마이크를 만나게 됩니다. 37살의 마이크는, 대학을 가지 않은 채로 제약 회사 영업부에서 16년 간을 일해 옵니다. 아내 스칼렛과는 이혼을 하기 직전이고, 고등학생인 딸과 아들과는 소원하며 심지어 직장에서도 괄시를 받아 그만 둘 상황에 이르러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마이크는 어느 신비한 인물을 만난 후, 어떤 사고를 당하고 나서 깨어나 보니 17살의 몸으로 돌아가 있게 됩니다. 시대는 37살의 마이크가 있던 시대 그대로입니다. 즉 모든 상황은 그대로인데 몸만 17살이 된 것이지요. 여기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다시 고등학교 학생으로 모교에 전입한 그가 여러 가지 일을 유쾌하게 시도하고 또 경험하게 됩니다. 영화의 색깔은 판타지가 조금 들어간 코믹 로맨스라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 이런 경우라면 이제 다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즉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는 스토리로 흐를 수 있는데요. 이 영화에서는 다르게 전개됩니다. 그게 이 영화의 장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속에서 상세히 나오진 않지만 자신의 미래까지 포기하며 사랑했던, 그녀와 아기를 위해 결혼까지 했던 스칼렛과 마이크가 왜 이혼을 하게 되었는지가 어쩌면 영화의 핵심 부분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나리오에서는 그 원인이나 장면 등을 자세히 보여 주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대사로 대략 말해 줍니다.


그것은 마이크가 가졌던 '자기가 이루지 못했던 미래에 대한 미련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이크는 자신이 선택해서 사랑과 결혼까지 했음에도, 그 후 삶에서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는 삶의 모습을 계속 후회와 미련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20여 년 동안 그러한 삶의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아내인 스칼렛을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부분을 영화는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냥 이혼과 아이들과의 소원한 관계라는 결과만 보여줍니다.


17살이 된 마이크는, 음악 파일 불법복제 방지 프로그램을 만들어 큰 부자가 된 고등학교 때 친구과 함께 임시로 살게 됩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신비한 운명의 흐름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심하다가,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농구와 대학의 꿈을 이루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임합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그게 아님을 깨닫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다시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힘들어하는 아내와,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고등학생인 딸과 아들을 돕는 것이 정말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아주 순수하게 말이지요.


영화는 자기도 17살 십대에 불과한 마이크가 자신과 같은 또래인 딸과 아들 그리고 이모 뻘인 아내까지도 정성을 다해 돕는 이야기들을 재밌고 유쾌하게 그려 냅니다. 비록 영화이지만 17살 청소년이 아빠처럼 또래들을 챙기고, 이모 같은 여인을 챙기는 모습이 뜻하지 않는 묘한 감동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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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곧잘 '과거'를 보게 됩니다. 어떤 이는 가끔씩, 어떤 이는 자주 말이지요. 특히 '실제 일어났던 것과는 다른 과거'에 대한 미련이 주된 것입니다. "그런 과거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그렇게 되지 말고 다르게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들 말이지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가 바뀌는 것 말이지요. 이렇게 과거가 바뀌기를 즉 '다른 과거'를 바라는 것은 '다른 현재'를 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나, 지금의 상황과 다른 나와 현실을 말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이미 경험했던 과거를 내 마음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엄연히 경험했고 존재했던 과거 과거의 나인데, 내가 도저히 그 존재를 인정하기 못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과거의 나와 과거는 그냥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즉, '과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나의 마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나만 괴롭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바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 꿈, 도전 등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되도록이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미래를 꿈꾸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문제는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서 미래를 바라보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과거의 경우와 같게 됩니다. 이미 존재하는 '현재의 나, 현재의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현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는 누구나 어떤 타당한 이유를 가지곤 합니다. 현재의 나, 현재의 상황, 환경, 관계 등이 아무리 봐도 불만족스럽습니다. 의미를 주거나, 정을 주거나, 가치를 부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현재의 그 누추함'을 혹시나 누가 물어봐도 자신 있게 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상황은, 환경은, 관계는'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나의 현실은 별 볼일 없어!" 하고 말이지요. 아주 확실한 사실을 이야기하듯이. 법정에서의 증인처럼. 정말 현재에는 아무런 다른 여지 없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가장 큰 함정은, 지금 자신이 파악하고 또 그렇다고 믿고 있는 그 '현실, 현실의 나'가 정말 자신이 파악한 그대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은 가장 선명히,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지요.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고치고 바꾸어야 할 부분들은 적극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게 삶이지요. 문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부족하게, 실망으로, 절망적으로 느끼고 믿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마음의 힘을 잃고 삶을 주저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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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속에서의 마이크가 그랬습니다. 그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은 성공이 보장된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선택한 것이므로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냅니다. 그러나 끝끝내 과거에 대한 미련, '바뀌었을 현재'에 대한 미련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한 마음은 마치 서서히 사람을 죽이는 독가스처럼 자신과 아내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20여년이 지난 결과가 바로 이혼과 서로의 불신입니다.


마이크가 다시 어려진 자신의 목표가, 중간에 멈춘 자신의 삶을 다시 완성시키는 게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의 삶이 온전하게 되게 돕는 것이라고 깨닫는 순간은 아주 큰 의미를 가진 장면입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극성이 두 개인 새로운 하나'라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이 영화에서는 '극성이 4개인 새로운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이크가 만약 '자기'라는 극성만을 '하나'로 여기고, 그것을 다시 제대로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면 아내와 아이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내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이크, 아내, 두 아이는 사실 '각각의 넷'이 아니라 서로가 '(극성이 4개인) 새로운 하나'를 만든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극성이 4개인 새로운 하나'라는 말은, 어떤 의무나 책임 혹은 도의적이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생한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 사실 '완전히 분리된 개체'라는 것은 어쩌면 가장 널리 믿어지고 있지만 가장 허황된 환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오히려 불가능합니다.


이 말이 우리 개개인의 개체성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중요치 않은 것이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말하려 했다면 그냥 '새로운 하나'라고 했겠지요. '극성이 N개인 새로운 하나'입니다. 즉 '극성'도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각각의 '극성'도 최선을 다해 살리고 보살피고 또 스스로도 살고 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새로운 하나'가 더욱 온전해 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극성'을 무시할 때도 일어나지만 또한 '새로운 하나'를 무시할 때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양태를 모두 유념해야 하고 살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더 많은 지혜와 사랑과 힘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극성을 무시하며 하나만을 위하는 것도, 하나를 무시하며 극성만을 위하는 것도 모두 '게으름'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그게 좀 더 편하고 쉽거든요. 어떤 경우는 '하나'만 우선시해서 극성들을 싸그리 무시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극성'만을 우선시해서 하나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둘 중 어느 경우든 고통이 온다는 것입니다. 각 극성과 하나 모두에게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게 본래의 모습, 상태가 아니기 때문니다. 극성도, 하나도 말이지요. 본래의 양태는 '극성이 N개인 새로운 하나'입니다.


어떤 측면에선, 영화 처음에 농구 경력과 인심한 연인 중에 연인을 선택했던 17살 마이크는 애써서 이것을 이루려 한 것입니다. '극성이 N개인 새로운 하나'를 위한 선택 말이지요.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스칼렛과 그리고 뱃속의 아기까지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 선택을 하면서 의미를 선명히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을 했다면 그러면 최선을 다해, 유쾌하게, 자유롭게 그 '새로운 하나'와 자신을 포함함 각각의 극성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마음과 행동을 잡아가면 되었는데 마이크는 그만 여전히 '나라는 극성' 쪽으로 마음이 많이 쏠렸던 것입니다. 전체인 '새로운 하나'에 소흘했고 결과는 모두의 고통이 된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를 위하는다는 것은 어떤 억압이나 의무나 책임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혜입니다. 자신과 다른 극성들과 전체를 행복하게 해 주는 지혜. 나도 살리고 모두도 살리는 지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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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소중함입니다.


37살의 마이크는, 현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틀렸습니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환타지적인 요소를 도입해 17살의 자신으로 돌아갔기에 그것을 이용해 여러 가지 시도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듯이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은 37살의 마이크도 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스토리 구조상 완전히 똑같게는 아니겠지만 비슷하게 혹은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영화가 '17살로의 역행'이라는 장치를 이용해서 보여주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 여기, 현재, 지금의 나'에서는 아무것도 할 없다고 느끼고 믿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만든 '가상의 유리벽'일 수 있습니다. 실제러도 그렇습니다. 17살로의 역행은 리의 마음의 유리벽을 깨뜨리는 하나의 장치니다. 나아가 그런 역행, 신비, 장치가 없어도 우리는 가상의 유리벽을 깨드릴 수 있습니다. 그게 가상임을 알아챈다면 사실 깨뜨리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없는 것이니까요.


위에서 '극성이 두 개인 하나'의 이야기도 했지만, 사실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바로 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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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 '지금의 나', '현재와 현재의 나'. 여기에 모든 가능성이 다 담겨 있고, 우리는 그 가능성을 능히 발견하고, 열고, 이용하고, 활짝 피워낼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지금 여기', '현재'는 시간 개념으로서의 것이 아닙니다. 즉 과거나 미래와 대비되는 '지금'이 아니고, 저기와 거기에 대비되는 '여기'가 아닙니다. '현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 속에서의 현재라면 그것은 너무나 제한된 시간과 의미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 여기'와 '현재'는 더 이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나눈 설정 속에서의 현재가 아니라, 시간 개념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넘어선 '지금 여기'이자 '현재'입니다. 공간적 개념의 구분도 넘어선 것이구요.


그게 가능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엄연히 시간과 공간의 구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엄중히 말하면 시공간의 분별은 인간의 개념에 불과합니다. 어떤 물리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시간 개념과 공간 개념은 존재하는 물리적 현상이나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인위적인 설정이자 모델이라는 말이지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사용은 하되 그에서 자유로운 '지금'과 '현재'는 여유롭고 자유롭게 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간적 나뉨, 구분에서 자유롭게 된 '여기'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개념을 사용하되 그것을 절대화 하지 않고 전부로 여기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이러한 느낌을 조금이라도 되살려 낼 수 있다면, 이 '나비 꿈'은 우리에게 충분히 그 역할을 해 준 셈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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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영화가 정말 이것을 표현하려 했다고 여깁니다. 모든 메타포는 해석자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만 명의 사람이 똑같은 영화를 보면 '만 개의 이해와 느낌과 해석'이 나옵니다. 그 만 가지는 모두 각각의 고유한 의의가 있습니다. 그게 메타포의 묘미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 '나비 꿈'을 꾸고 나서의 감흥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만약 이 영화를 보시게 된다면 또 어떤 다른 혹은 같은 꿈을 꾸실고 깨어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자, 이제 이 흥미로운 '나비 꿈'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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