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로 철학하기
2022년 7월 블로그에 썼던 글 옮기기 (약간의 내용 추가)
최근 재밌게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로 철학을 해보고자 한다. 처음에 1-3회? 정도는 별로 재미없게 보다가 점점 빠져들어 정신없이 마지막까지 봤던 것 같다. 대사가 정말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정말 좋았다. 대사가 너무 좋아 어디에 적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매번 들었고 계속 곱씹게 되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마지막회가 인상적이었다. 미정의 '환대'라는 표현에서 내 머릿 속에 레비나스가 지나갔다. 그래, 해방일지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드라마로 옮긴 것이었구나ㅡ.
그걸 깨닫고 나니 모든 내용이 레비나스 철학으로 연결되는 것을, 착착 퍼즐이 맞춰짐을 느꼈다. 주인공의 해방= 주체성 회복 = 타자에 대한 추앙과 환대.
이 공식이 바로 '나의 해방일지'의 핵심이었다. 드라마로 변신한 레비나스의 철학. 너무 매력적이었다.
나는 어떻게 내가 되는가?
나는 어떻게 ‘나’일 수 있는가?
이 것은 신체적, 물리적 구분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철학적 의미의 주체에 대한 물음이다. 주체는 세계 안에서 거주하고 세계를 향유하며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그런데 누가 이것을 방해하는가? 타자다. 나와 다른 사람들. 나를 지켜보고 뒤에서 이야기하는 타인들.
- 기정이 고깃집에서 애딸린 이혼남에 대한 얘기를 하고
- 기정이 술집에서 50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 미정의 회사에서 여직원들이 늘 남에 대한 뒷담을 한다
- 창희는 차있고 돈 많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 타자들을 동경한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 늘 불안하고 불편하게 눈치보며 괴롭게 사는 우리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나의’라는 표현은 중요하다. 미정의, 구씨의, 창희의, 기정의 … 각자 자기 주체의 해방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가 처한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타인의 시선과 억압 속에서의 해방, 나 ‘OOO’으로 당당히 바로 서고자 한다.
나로 제대로 해방된 삶에서는 어떤 기분이 들까?
내 생각엔 미정이 스스로 ‘내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자기 안에 사랑밖에 없어서 사랑만 느껴진다고’ 하는 그 순간이 미정이 완전한 주체로 섰던 순간이자 그 징표가 아닐까 싶다. (창희가 마지막에 장례지도사 강의를 듣게 되었을때 표정이 어느때보다 편해보였던 것도 자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드라마는 이러한 주체성 회복의 과정을 타인에 대한 추앙, 타인에 대한 환대를 통해 묘사하였다. 타인을 무시하고 회피하거나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타인을 높이고, 내 집으로 기꺼이 초대할때 주체가 해방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해방일지에서 주인공들이 보여준 이 과정은 정확히 레비나스의 철학과 일치해 보였다. 작가님은 아마 레비나스의 철학은 그대로 드라마로 풀어놓으신 것 같다. 작가님은 아무래도 철학전공자이신것 같다;;
구씨와 미정의 스토리를 보자.
매일 아침 구씨는 머리속에 찾아오는 타인에게 고통받으며 그들을 머리 속에서 내보내기 위해, 니들보다 내가 더 불행하다고 외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알콜에 절어서 매일을 살아간다. (16회 중)
어떻게 하면 구씨는 타인에 의해 지배받는 절망적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사실 진정한 구씨의 주체성의 회복은 매일 아침 찾아오는 그들을 웃으며 내 집으로 환대하는데에 있다.
(미정의 대사: 아침마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
주체성 회복이 타인에 대한 환대이고, 추앙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미정은 구씨에게 자신을 높이라 추앙하라 한다. 이 것은 바로 레비나스 철학을 실천하는 첫 걸음이다. 사랑이 아니라 추앙을 해야하는 이유는 레비나스 철학의 특별한 점인 '타자와의 불균등성'을 보여준다. 레비나스에게 타인은 나와 동등하지 않다. 오히려 타인은 나보다 높은자이다. 그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외재성(내가 완전히 지배할 수 없고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타인)을 가지고 내 앞으로와 나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두렵다.
실제로 구씨에게 미정은 그 어떤 존재보다 두렵다. 미정의 얼굴, 미정의 모습은 구씨를 쫄게한다. 어떤 공격성과 무기도 없는 미정의 그 완전한 약자의 모습이 구씨를 가장 무섭게 한다.
(구씨의 대사: 넌 날 쫄게해. 네가 보이면 긴장해.)
그러한 완전한 약자인 타인 앞에서, 그의 고통받은 얼굴 앞에서 도와줘야할 책임과 의무를 느낀다. 그 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추앙'이다. 그리고 미정이 구씨에게 요구하는 추앙이다. 그러한 타인을 높이는 과정 끝에 오히려 자신이 바로 서게 된다. 타인의 부름에 응답할때 나만의 이기심과 자기보존을 위해서만 작동하던 자신이 응답하는 주체, 책임지는 윤리적 주체로 바로 선다. 타인의 부름에 응답할 때, 나는 고귀한 존재로 해방된다.
구씨의 미정 추앙 과정은 드라마에 자세히 묘사되어있다.
미정에 대해 사소한 것 하나하나 추앙하다보니 오히려 자기자신이 폐인(?)의 삶에서 해방되는, 변화하는 구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주병 가득한 방을 청소하고, 매일 그녀의 퇴근길을 데리러가고 챙기며 그녀가 좋아할 간식을 사고 그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는다... 등등
그건 미정도 마찬가지다. 구씨가 미워질때 오히려 구씨를 추앙한다. "숙취로 고생하지말길. 감기 한번 걸리지 않길." 그러면서 미정의 내면은 강해졌다.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추앙은 타인이 아닌 나를 변화시킨다. 레비나스 철학의 혁명적인 부분은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기 위해, 자유롭게 해방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는 책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은 나를 방해하고 괴롭히고 자유에 제한을 가하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존재의 해방을 위해 함께해야만, 의존해야만 하는 세계이다.
언제나 자기 보존, 자기 안위가 우선이고, 나를 방해하는 타인을 제거하려 분투하고, 갈수록 원자적 개인주의가 심화되가는 현대 사회에 꼭 알아야 할 철학이 아닐까.
(*강영안 교수님의 타인의 얼굴과 드라마를 연결시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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