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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번의 『젠더라는 환상』을 읽고

혐오하지 않는다. 단지 무슨 뜻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사실 나는 '젠더'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만약에 트위터 등의 커뮤니티에서 "젠더가 대체 무슨 뜻이에요?"라고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는 내가 LGBT나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 운동에 대해 굉장히 '무지하다'고 생각해 교화하거나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해 '젠더'라는 단어의 개념을 열심히 설명하려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어쩌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무지함'이야말로 최악의 차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심지어 '모른다는 선언' 자체에 음흉한 의도가 있다고 해석할 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나를 인터넷 세상에서 몰아내려고 나를 캔슬, 즉 나락에 보내려고 시도할 지도 모른다.


내가 "젠더가 무슨 뜻이냐"고 물을 때는 정말로 몰라서도, 음흉한 의도가 있어서도 아니다. 나는 '젠더'라는 단어가 실제로 제대로 정의되어 있지 않은 채 (물론 '생물학적 분류가 아닌, 사회적으로 분류된 성'이라는 얄팍한 정의가 있긴 하다) 함부로 여기저기에서 쓰였기 때문에 실제로 젠더에 관련된 모든 논의가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측면에서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과격해지는 페미니즘, LGBT, PC 운동의 분위기들 때문에 여러모로 오해를 받을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나는 굳이 저런 질문을 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글쎄, 단어에 대해 그냥 학문적으로 정확한 정의가 있는지 물어보는 것 뿐인데, 이런 오해를 받을 걸 예상하기까지 해야 한다면, 내가 너무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정의' 같은 문제는 철학자들이 정말로 잘 하는 분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젠더'라는 단어를 잘 사용했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 등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단어의 적확한 정의' 같은 걸 신경쓰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단어의 정확한 정의는 없다"는 따위의 혼란스러운 선언을 설파하는 데 악명이 높다.


'젠더'의 적절한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버틀러 작업의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불필요하고 모호한 단어 사용으로 그녀의 글은 난해하고 독해가 힘들다는 불평이 잦지만(...) 하지만 버틀러의 주장들은, 이해되는 내용만 놓고 보면, 어떤 진지한 논증이나 증거로도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 미래의 연구를 위한 유망한 추측이나 가설도, 심지어 진부한 진실들을 보거나 범주화하는 새로운 방법도 제시하지 않는다. - 『젠더라는 환상』 p. 83


정확한 정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척점에 서 있는 '분석철학' 분야의 철학자 알렉스 번이 쓴 책이 바로 『젠더라는 환상』이다. 제목에 대해, 난 별로 개의치 않지만, 어떤 이들에게 알렉스 번과 그의 책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아 걱정은 된다. 알렉스 번이 잘못 취급당할 부류로 두 집단이 떠오른다. 첫 번째로 트랜스젠더라는 존재 자체를 여성혐오로 간주하는 'TERF' 페미니스트, 두 번째로 페미니즘이든 LGBT든 모든 것을 반대하는 반PC집단이다. '~라는 환상'이라는 (혐오 표현으로 오해할 만한) 제목의 이 책은 TERF나 반PC처럼 젠더를 혐오하는 사상을 퍼뜨리는 불온서적일까? 알렉스 번은 철학이라는 거창한 가면을 쓰고 혐오 표현을 일삼는 차별주의자일까? 전혀 아니다. 이 책에서 보이는 혐오의 대상은 트랜스젠더들도, 논바이너리들도 아닌 '제대로 정의내려지지 않은 단어를 멍청하게 쓰는 사람들'일 뿐이다. 애초에 원제는 『Trouble with Gender』였고 '~라는 환상'이라는 제목은 번역된 제목이다.


알렉스 번 - 젠더라는 환상, 필로소픽 (2024)


영어 제목도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하다고? 대체 어디까지 조심해야 하는 건데? (참고 삼아 말씀드리면, 주디스 버틀러의 대표작 제목이 『Gender Trouble』이라는 점에 비춰 볼 때, 원제는 꽤 의도된 작명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도 아니고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알고 싶고 세상 어떤 에 대해 좀 정확히 정의내리고 싶은 건데, 왜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불필요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 중 어떤 것도 그 누구의 존엄하고 충만한 삶의 추구를 방해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든, 여자든, 동성애자든, 다른 관련된 집단의 구성원이든. - p. 10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다음 인용은 그 일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양보하지 못할 태도를 말해준다.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은 자주 일종의 감정적 협박으로 사용되어, 친절한 반대자들의 입을 다물게 만든다. 나는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겠지만, 표현의 명료함과 관련 사실의 진술을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 p. 23


 



알렉스 번에 따르면, 실제로 통용되는 '젠더'라는 단어의 네 가지 뜻이 있다.


1. 여성성/남성성으로서의 젠더

이 뜻은 한 사람에게 발견되는 남성적인(masculine) 또는 여성적인(feminine) 정도, 즉 행동, 옷차림, 말투, 태도 등을 나타내는 정의다. 어떤 남자가 축구보다는 뜨개질을 좋아한다든지, 제육볶음보다는 파스타를 좋아한다든지, 컵을 들 때 새끼손가락을 펼친다는지 하는 태도를 보이면, 그는 분명 남자이며 어떠한 성적 특별함이나 퀴어함도 없지만 몇 가지 여성 젠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사회적 역할로서의 젠더

'젠더'의 두 번째 의미는 '성 정형화된 사회적 역할'이다. 성 정형화된 직업, 임무, 지위, 여가 활동, 임금 격차 등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의미한다. 의미는 1번 정의와는 다른데,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뜨개질을 좋아하는 여성성을 나타낸다 해도 특성이 사회적 역할로서 기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정체성으로서의 젠더

흔히 '젠더 정체성'으로 말해지는 이 뜻은, 스스로 어느 성별(sex)에 속하는 지 아는 감각, 즉 '나는 남성이다' 혹은 '나는 여성이다'라는 인식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젠더 정체성은 훨씬 더 확장되어, '나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젠더이다', '나는 스스로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규정짓지 않는 젠더이다', '나는 아직 스스로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규정짓기 전인 젠더이다', '나는 때로는 남성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성이기도 한 젠더이다' 등의 경계적인 정체성도 늘어났다. (내 생각에, 이런 정체성 배리에이션은 약간 프로그래밍 이론이나 집합론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프로그래밍에서 '0', 'null', 'NaN'이나 집합론에서 A and B, A or B, ~A and ~B처럼, 정체성을 그런 식으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정체성으로서의 젠더는 '트랜스젠더주의'에서 지칭하는 개념까지 확장된다. '트랜스젠더'의 정의는 "출생 시 지정된 성별과 불일치하는 '젠더'를 가진 사람이 가지는 정체성"이다. ('젠더'의 정의에 '젠더'라는 단어가 포함된 상태를 보라. 알렉스 번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이런 순환적 정의로 인해 발생하는 개념적 혼란이다)


4. 여자/남자로서의 젠더

마지막 개념이 최고로 혼란스럽다. 알렉스 번은 여자(성인이면서 인간이면서 여성인 사람)/남자(성인이면서 인간이면서 남성인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도 흔히 '젠더'라는 용어가 쓰인다고 하며 여러 문헌을 제시한다. 유명한 저술가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쓴 구절을 보자.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 범주가 아니라 사회적 범주를 말한다. (...) 사회적 용어는 많은 것을 담고 있으며 생물학적 용어와의 관련이 극히 희박하다. - 『사피엔스』, 『젠더라는 환상』에서 인용


위의 세 개념과 달리, 네 번째 개념은 성(sex)와 젠더(gender)의 개념을 굉장히 모호하게 만든다. '젠더'의 정의를 '성'의 정의와 분리하고 싶다면, '성'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성(sex)'이 '젠더(gender)'과 구분되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성은 생물학적이고(여기까진 어떤 과격 PC주의자도 동의할 것이다. 애초에 젠더라는 단어를 정의하기 위해 반대편 뜻으로 인용했으니), 이분법적이다(뭐라고!).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없다. 성이 생물학적이라면, 두 가지 뿐이다. 생식 세포의 크기에 따른 구분 말이다. ‘수컷’은 작은 생식 세포를 만드는 개체를 의미하고, ‘암컷’은 큰 생식 세포를 만드는 개체를 의미한다.


이에 반대되는, 즉 성은 다층적이라던가, 스펙트럼이라던가 하는 주장들이 많다. 그리고 이 주장은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들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다. 예를 들어, 존 머니, 조앤 햄프슨, 존 햄프슨은 염색체적 성, 생식기 형태적 성, 호르몬적 성을 정의했다. 만약 어떤 이의 염색체적 성과 생식기 형태적 성이 여성일지라도, 호르몬적 성은 남성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여성도 남성도 아닐 수가 있다. 다른 정의로, 포스토-스털링은 '고환과 난소를 가진' 성, '고환과 여성 생식기의 일부 양상을 가진' 성, '난소와 남성 생식기의 일부 양상을 가진' 성을 관찰하고 정의했다. 안드로겐불감성증후군, 5-알파환원효소결핍증 등의 생리적 이상반응을 가진 사람이 이런 부류에 든다. 이른바 '간성'이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알렉스 번은 성이 '거의' 이분법적이라고 말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고 말한다. 현대적인 연구에 의하면 간성 상태의 인구 비율은 0.015% 정도로 추정되는데,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각각 49.9925%라는 사실, 그리고 남성이나 여성 카테고리가 간성 인구에 비해 3333배 많다는 사실은 성이 '다층적'이라거나 '스펙트럼적'이라고 말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걸 나타낸다. 즉, 성은 '완전히' 이분법적이진 않더라도 '거의' 이분법적이다.


또 다른 반대 주장으로 '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분법적이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어떤 이들은 '트랜스젠더'나 '논바이너리'를 '간성'의 집합에 넣으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트랜스'젠더'의 정의에 비춰 볼 때, 이 집단은 '성'이 아닌' 젠더'에 의해 정의되는 집단이다. 바로 '젠더'와 '성'에 대한 명확한 정의 없이 모든 것을 뒤섞어버리는 데에서 오는 오해다.




이로써 나는 '젠더'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예전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구조적으로 불가피한 '분석철학'적 논리구조 때문에 내가 100% 이해하기엔 힘들었을 수도 있으나, 적어도 페미니즘, LGBT, PC운동의 맥락 하에서 접한 혼란스러운 개념보다는 훨씬 나았다는 것을 보장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정은 사회적 구성물이다'라고 주장하는 리사 펠드먼 배럿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을 떠올렸다. 아니, 사실 리사 펠드먼 배럿의 책을 읽을 당시, 이분법적이지 않고 다층적인 젠더 정체성에 대해서 이런 식의 구성주의적 설명을 시도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책에 따르면, 감정은 본질적이고 고정된, 프로토타입적 구분법이 없다. 복잡한 문화적 감정(사촌이 땅을 사서 배아픔, 샤덴프로이데 등)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본적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기쁨, 슬픔, 공포마저 사회적 발명품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수많은 젠더 배리에이션이 정의되었다. 나무위키를 찾아보면, 이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정신이 혼미할 지도 모른다. 젠더퀴어, 안드로진, 바이젠더, 에이젠더, 젠더리스, 팬젠더, 뉴트로이스, 젠더플루이드, 트라이젠더, 제노젠더... 대체 21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이것들은 정말 예전부터 있었던 분류법인가? 이런 분류법은 정말로 '발견'된 것일까? 젠더를 '정의상'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보았을 때, 내 생각에(이건 정말로 알렉스 번의 생각조차 아닌 나만의 견해임을 밝힌다) 젠더란 (구성주의적 감정이 그렇듯이) 21세기의 사회적 발명품일 것이다. 왜 20세기 이전엔 젠더 분류법이 이보다 심플했었고, 이제 와서 이렇게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젠더가 발견되었는가? 왜냐하면 그건 발견된 게 아니라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알렉스 번이 '성은 젠더와 다른 개념이며 이분법적이다'고 주장하거나, 내가 '젠더란 사회적 구성물이다' 혹은 더 나아가 '젠더는 발명품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들의 존엄성과 행복을 방해하기 위해, 혐오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젠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특정 젠더를 혐오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구성주의적 감정이 그렇듯이, 인류에게 유용한 수많은 발명품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나는 단지 알고 싶을 뿐이다. 명료하게 알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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