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대한 현업의 연구 과제들이 참담한 실패로 점철되어 유야무야 마무리된 채 10여 년이 흘렀다.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바로잡거나 수정하려 하지 않으려 한 건, 현업 업무의 특성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들에 대해 궁금했다.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 그리고 감정이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난 감정의 본질에 그 열쇠가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리사 펠드먼 배럿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이 나오기 전, 그러니까 2017년까지는 어떤 이도, 심지어 웬만한 감정심리학 연구자조차 나의 궁금증과 우리의 실패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2024년 현재에 겨우 이 책을 접하고 모든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전 글에서도 언급했던, 감정에 대한 당연했던 질문들을 새롭게 재검토해야 했다.
1. 감정은 분류할 수 있는가? - 감정엔 프로토타입(또는 플라톤적 이데아, 또는 진화적 적응, 뭐든.)이 있는가?
2. 분류된 감정은 탐지가 가능한가?
3. 감정의 표현(표정)은 실제 감정과 연관되어 있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에 따르면, 충격적이게도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은 전부 “아니오”이다.
How Emotions are Made? - Lisa Feldman Barrett (2017)
리사 펠드먼 배럿의 감정 이론은 완전히 새로운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기존 감정 모델과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 그녀의 이론은 '구성된 감정 이론(theory of constructed emotion)'이다. 이에 대비해 기존의 모든 잡다한 감정 모델을 통틀어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 줄여서 '고전적 견해'라고 부르기로 하자.
'구성된 감정 이론'에 따른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우리의 실패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감정은 분류가 없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감정은 분류되지 않는다. '행복'이라고 부르는 감정의 모든 집합은 사실은 엄청나게 다양한 감정들이며, '슬픔', '괴로움', '분노' 등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각자의 맥락에 따라 매우 다른 내적 느낌과 신체적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르는 '행복'이라는 감정은 '아이가 뛰노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는 느낌', '웃긴 영화를 보면서 느낀 순간적인 감정',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의 폭발적인 흥분' 등으로 전부 다르다. 어떤 경우의 '행복'이라도 내적 감각이나 신체적 상태가 같은 경우는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감정은 분류되지 않는다. 우리가 감정을 분류하고 모형을 만드는 데 이토록 애먹었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2. 감정은 탐지되지 않는다.
우리가 감정을 탐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거대한 착각이다. 우리는 언젠가 신체적 반응을 통해 감정을 분류할 수 있다는 희망 속에 살아 왔지만,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다. 내가 예전에 사용자 조사에서 써먹었던 여러 신체적 반응들, 땀의 발생, 심장 박동, 눈깜박임, 뇌파 등등의 도구들은 모두 감정을 분류하는 데 계속적으로 실패해 왔다. 감정은 맥락에 따라 엄청나게 다양한 신체적 반응을 유발한다. '분노'라는 감정은 어쩌면 식은땀을 내고 심장박동을 빠르게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분노, 예를 들어 인터넷 글을 읽고 빡치는 정도로는 식은땀은커녕 심장 박동을 조금도 올리지 못한다. 우리가 이른바 '뉴로마케팅' 방법론으로 아무 감정도 탐지해 내지 못한 이유가 이제야 밝혀졌다.
3. 표정은 실제 상황에서는 감정과 거의 연관이 없다.
그렇다면 표정은? 표정이야말로 감정을 탐지할 수 있는 아주 명백하고 유의미한 신체적 상태 아닌가? 아니다. 감정의 내부에 다양하고 비일관적인 내적 감각과 신체적 상태가 있기 때문에, 고전적 견해에 따라 (억지로) 분류된 감정에도 엄청나게 다양한 표정이 있다. 그것은 하나로 묶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괴로움'에 대한 표정은 정말로 얼굴을 있는 힘껏 찡그린 표정도 있지만, 실제로 진짜로 괴로운 사람이 얼굴을 찡그리는 순간은 아주 일시적이다. 그들은 어쩌면 대부분 무표정을 짓고 있고,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따라 오히려 살짝 웃을 수도 있다. 또한, 찡그린 얼굴은 '괴로움'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격한 즐거움'이나 '슬픔' 같은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용자 조사에서 카메라 녹화를 통한 표정 탐지에 실패한 이유가 이제 설명되었다.
이로서 내가 10년 전 사용자 조사에서 사용자의 감정을 탐지하는 데 그렇게 어려운 이유를 겪었던 이유가 전부 잘 설명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탐지 도구가 시원찮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감정이란 게 원래 그랬기 때문이다. 감정은 분류되지 않고, 탐지되지 않는다.
위의 '~지 않는다', '~가 없다'라는 부정적인 명제로 감정을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대체 무엇인가? '구성된 감정 이론'에 따라 감정이 무엇인지,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보자.
내수용 감각
내수용(ineroception)이라는 어려운 용어는 우리 내장과 면역체계, 호르몬 등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느낌을 설명하는 용어다. 이것은 시각, 청각 등의 감각과 비슷한 종류의 감각이지만, 훨씬 더 원초적이다. 속이 불편하다(불쾌감), 피곤하다(이완), 흥분된다(arousal) 등이 바로 내수용 감각으로 유발되는 단순한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내수용 감각을 완전히 정밀하게 느끼지는 않고, 대략적으로만 지각할 수 있다.
정동(affect)
이전 글에서 두 개의 축으로 만들어진 감정 평면을 기억하는가, Russell's circumplex circle이라 이름붙은 그 도표에 따르면 arousal과 valence로 인간의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리사 펠드먼 베럿은 이 두 축으로 이루어진 좌표평면을 정동이라는 이름으로 달리 부른다.정동은 감정보다 단순하며, 단지 흥분도와 긍부정이라는 느낌으로만 느끼는 아주 단순한 느낌이다. (높은 arousal과 부정적인 valence는 '공포'가 아니라 단지 '흥분한 부정적 느낌'이다.) 정동은 당연히 내수용 감각으로부터 유래하지만, 우리의 정동은 사실 아래에 설명할 능력이 더 큰 지분을 차지한다.
Russell's Circumplex model. 이 도표에서 감정에 관한 단어들(붉은색)만 지운다면, 정동 평면이 된다.
예측 능력
뇌는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당신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생성한다. 비언어적이기 때문에 거의 무의식적이고 미시적이다. 즉, "나는 좀 이따가 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것 같다"는 식으로 예측하지 않는다. 단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것 같은 왼쪽 발을 재빨리 옆으로 빼기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예측이란 겨우 몇 ms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며, 엄청나게 빠르고 계속 업데이트되며, 무의식적이다. 예측은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토대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경험이 풍부한 성인이 아기보다 더 예측을 잘한다. 위에서 설명한 정동은 기본적으로은 내수용 감각이 아닌, '예측된' 내수용 감각이다.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느낌, 허파에 공기가 차는 느낌 같은 낯익은 감각과 전반적인 쾌감, 불쾌감, 동요, 평온 같은 정동은 실제로 당신의 신체 안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당신의 내수용 신경망에서 이루어지는 (예측) 시뮬레이션의 결과다.
신체 예산 관리 부위(body-budgeting region)
리사 펠드먼 배럿이 칭한 이 '신체 예산 관리 부위'는 미래의 예측을 토대로 신체 내부 환경을 통제한다. 심장을 빨리 뛰게 한다거나, 호흡 속도를 늦춘다거나, 코티솔 호르몬을 더 방출하거나 하는 명령을 내린다. 이 부위는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본질적으로 이 부위는 에너지를 때에 맞춰 효율적으로, 정확하게 사용하는 기능을 한다. 뱀을 보면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고 다리를 재빨리 움직여 도망을 가게 만든다. 이러한 움직임은 예측 능력을 토대로 하는데, 왜냐하면 뱀 같은 물체를 보았을 때엔 그것이 실제로는 뱀이 아니라 노끈일지라도 어쨌든 그것이 '뱀이라는 물체를 맞닥뜨릴 것'이라는 예측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뱀이 위험한 것이라는 과거의 경험이 쌓여서 이루어진다.
신체 예산 관리 부위는 적극적으로 예측을 내놓고 다음 행동을 조절하며, 우리는 사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보다 더 강한 형태로 이 예측에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우리는 내수용의 정동에 따라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바꾼다. 그러므로 내수용은 보고 듣는 감각보다 더 거대하게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 보자. 감정이란,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져도 아무도 없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와 같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나무가 쓰러질 때 소리가 나는가?”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현상학적으로 수도 없이 물어졌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명확한 정답이 있다. 정답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이다. 물론 이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실제로 과학적으로 소리가 나지 않는걸 어찌하는가? 만약 질문이 “공기의 파동이 발생하는가?”였다면, 그것의 정답은 ‘Yes’였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이 ‘소리’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아니오’가 된다. 소리란 공기의 파동을 인간이 뇌로 ‘인지’하고 ‘해석’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단어이다. 즉, 그것은 물리적 실체가 아닌 심리적 실체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나무가 쓰러질 때 발생하는 ‘공기의 파동’을 아무도 해석해 줄 뇌가 없다면, ‘소리’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성질을 가진 단어가 바로 ‘색채’이다. 색채란 물리적 성질을 가지지 않고, 심리적 성질을 가진다. 왜냐하면, 빛이란 본래 색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빛은 단지 ‘파장의 길이, 파장의 분산, 밝기’만을 지닌다. 그것을 우리의 뇌에서 해석한 것이 바로 색채의 세 요소인 ’색상, 채도, 명도‘다. ‘소리’와 ‘색채’란 바로 뇌가 상호작용하며 ‘구성된 실재’이다.
감정 또한 ‘구성된 실재‘다. 감정은 뇌가 외부와 상호작용하며 나타난 ‘구성된 실재’이다. 만약에 당신이 상대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다 해도, 그 감정은 상대방에 전적으로 소유된 종류의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표정에 대한 지각을 당신의 뇌가 받아들이고 지각함으로써 만들어진 ‘구성된 실재’다.
이렇게 리사 펠드먼 배럿의 ‘구성된 감정 이론’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수용, 정동, 예측 능력, 신체 예산 관리 부위 등등 우리의 신체가 어떻게 어렵고 복잡하게 외부의 상황과 상호작용하는지 설명한 내용이 감정과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정동’으로 느끼지만, 그 정동은 또다시 외부의 세계와 상호작용해 ‘감정’이 된다. 그러므로 감정은 외부에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된다. 아주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다. 흔들리는 다리에서 외모가 뛰어난 여성 안내자가 남성들에게 설문지를 나눠준다. 그러면 남성들은 흔들다리에서 설문지를 받지 않는 남성들보다 더 많은 빈도로 그 여성 안내자에게 따로 만나자는 연락을 해 온다. 우리는 ‘내수용 감각’을 ‘정동’으로 느끼지만, 그것을 ‘감정’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외부 세계와의 해석이 필요하다. 분명 흔들다리는 남성들에게 심장의 두근거림(arousal)을 유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신체의 정동을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감정’으로 해석했다. 즉, 그들이 ‘사랑에 빠졌다’고 해석했다. 그건 틀린 것도 아니고, 잘못된 감정도 아니다. 원래 감정은 ‘구성된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격적인 이론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불만을 느끼고 반박하려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리사 펠드먼 배럿은 예상 답변을 준비해 놓았다.
감정이 ‘실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아니다. ‘구성된 실재’ 또한 실재다. 우리는 양성자와 전자, 지구, 금 주괴 등의 ’물리적 실재‘에 대해서만 실재라도 칭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미국 대통령’ 또한 실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은 물리적 실재는 아니다. 어떤 물리적 입자가 어떤 사람을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은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즉 인간의 뇌를 통해 해석한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미국 대통령이라는 개념을 실재한다고 여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문화적으로 공통된 감정이 있다는 건, 예를 들어 전 세계 어디에도 ‘행복’이나 ‘공포’라는 감정이 발견된다는 건, 감정은 ‘구성’되지 않고 바깥에 ‘실재’하는 것 아닐까?
공통된 감정이 발견된다는 것보다, 이 세계에 그토록 다양하고 특이한, 문화적으로 독특한 감정이 발견된다는 것이 더 주목할 만하다. 독일 문화엔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이 있는데, 이 감정은 ‘남의 불행을 보았을 때 기쁨을 느끼는 심리’라고 한다. 독일과 가까운 문화권인 영미권에는 이를 칭하는 단어가 없다. 우리나라에는 '화병'이 있다. 각 문화권에서 독특하고 특이한 감정 표현이 너무나 많다는 것, 그 문제는 예전부터 감정을 벡터 평면에 매핑할 때 너무나 골때리는 문제였었다. 감정이 ‘구성된 실재’라면 모두 해결되는 문제이다. 감정은 문화권 내에서 독특하며, 인간에게 보편적인 감정이란 없다. 왜냐하면 감정은 문화권 내에서 구성되기 떄문이다.
동물도 감정을 느끼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뇌에 의해 ‘구성’된 게 아닌 거 아닐까? 바깥에 실재하는 것 아닐까?
감정이 인간 사회 내에서 구성되는 것이라면, 개나 고양이, 기타 동물들에 의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지 우리가 ‘인간의 뇌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즉 우리가 동물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은 동물과 인간 개체 사이에만 성립한다. 그런데, 개와 개 사이에서 그런 게 통할까? 개의 뇌도 감정을 ‘구성’할까? 리사 펠드먼 배럿은 조심스럽게, 개와 개의 사이에서 오고가는 감정은 감정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리사 펠드먼 배럿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심리학의 해결되지 않던 난제를 혁명적 관점을 통해 해결했다는 점에서,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 가설』과 동등한 위치에 오를 만한 위대한 책이다.
이미 리사 펠드먼 배럿은 2018년부터 상위 1%의 인용 횟수를 자랑하고 있으니, 이미 그녀의 이론은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학계에 혁신적이고 진보된 이론이 혜성처럼 나타난다 해도, 여전히 '삼중뇌 이론'과 MBTI, MZ세대,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 등을 신봉하는 나의 소중한 직장에서 이 이론을 전면적으로 적용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한다. 감정이 분류되지 않는다니, 값비싼 감정 분석 솔루션이 전부 무용지물이라니...그것을 인정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내 직장에선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난 괜찮다. 인류 지식의 총량은 학문을 통해 진보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