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흔히 '공룡 덕후 시기'를 거친다. 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공룡에 열광한다. 그들은 모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룡의 그 어려운 이름을 줄줄 외운다. 그들이 공룡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몰두하는 분야를 '공룡 분류학'이라고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공룡이 이런 특징, 저런 특징이 있고, 이 공룡은 저 공룡과 다르고, 이 공룡은 목이 몇 미터고, 무엇을 먹고, 어떤 기관을 가지고 있고...그러므로 이 공룡의 이름은 '트리케라톱스'다!
당신이 공룡 전공의 고생물학자가 아니라면, 아니 고생물학자일지라도 아이의 이 이상하고도 진지한 열정에는 정말로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당신은 안 그럴 줄 아는가? 당신이 열광적이지는 않을 지라도, 집착하곤 하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 바로 '야채인가, 과일인가' 문제이다. 수박은 야채인가 과일인가? 토마토는 야채인가 과일인가? 우리의 머릿속에는 과일이란 '나무에 열리는, 단독으로 먹는 식물'이다. 반대로 야채는 '풀에서 열리는, 밥반찬으로 먹는 식물'이다. 수박과 토마토는 이런 기준에 애매하게 걸친다. 이것들은 풀에서 자라지만 단독으로 먹는다. (가끔씩 토마토는 밥반찬으로 먹긴 하지만, 수박이야말로 얄짤없이 단독으로 먹는다.) 수박과 토마토가 뭔지가 왜 그렇게 집착할 거리가 되는가? 이 문제가 왜 그렇게 어른들을 괴롭히는가? 야채든 과일이든 맛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 우리가 무슨 공룡 덕후인 아이들처럼 수박과 토마토가 '반드시 어딘가로는 분류되어야 할' 것처럼 구는가?
겨우 수박이 야채인지 과일인지를 고민하는 걸 가지고 무슨 별 거 아닌 문제를 엄청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사람을 몰아간다고? 그럼 이런 건 어떤가? 우리는 모두 어떤 동식물이라도, 어떤 인공적인 품종이나 자연적인 종이건간에, 그것을 분류하고 이름붙이는 데 몰두한다. 어떤 날개달린 곤충이 나비인지 나방인지, 물에 사는 족제비 같이 생긴 동물이 해달인지 수달인지, 밤에 주로 활동하는 눈이 땡그란 새들이 부엉이인지 올빼미인지, 늑대의 후손이자 우리의 친구인 동물이 골든 리트리버인지 진돗개인지. 그 이름 붙이고 나누는 행위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길래, 우리는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이름 붙이기에 이렇게 열중하는 것일까?
움벨트: 이름붙이는 본능
2021년 번역 출판된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양과학 출판 분야에 오랜만에 대단한 화제가 되었던 책으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웬일로' 소설도 아닌 책을 읽도록 만든 훌륭한 책이다. (물론 완독한 사람은 아마 별로 없겠지만.) 거기에서 저자 룰루 밀러가 책 제목을 붙이면서까지 강조해 언급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언명의 출처가 바로 이 책,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이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과학에 대한 책이 아닌, 과학책을 읽고 나서사회적 윤리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과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나오진 않았다. 이에대해 궁금한 사람은 이 책, 『자연에 이름 붙이기』를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생물분류학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하지만 역사'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생물을 분류하는 우리의 타고난 직감, 어릴 적부터 공룡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고, 수박이나 토마토가 열매인지 야채인지를 꼭 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내재된 본능이 왜 이렇게 진하고 끈적한지, 그 본능에 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룬다. 저자는 이 본능을 '움벨트(Umwelt)'라는 단어로 칭했다. 움벨트란 독일어로 ‘지각된 세계’를 뜻하며, 어떤 동물이 우리의 머리 속에서 어떤 감각으로 인지되고 느껴지는지를 뜻한다. 이 책은 생물분류학이 우리 머리속에 착 달라붙은 움벨트라는 본능을 제거하고 진정한 과학으로 거듭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를 다룬다.
Naming Nature - Carol Kaesuk Yoon (2009)
린네와 다윈: 움벨트의 균열
그러니까 우리는, 뭐 과학 따위는 없어도 생물을 얼마든지 분류할 수 있다. 우리에겐 생물을 분류하고 싶어하는 지독한 본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 이전 시대에 '카를 폰 린네'(책에서는 '린나이우스'라고 표기)는 이 '움벨트'라는 본능을 최대한 발휘해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동식물의 체계를 세우고 분류했다. 그러니까, 당시의 아마추어 분류학자들(당시엔 다들 아마추어였으니까)이 움벨트를 이용해 최선을 다해 동식물을 분류해도 잘 되지 않는 어떤 생물이 있을 때, 린네가 나타나 아주 깔끔하게 그 생물이 어디에 위치할 것인지를 말해 준다. 그러면 주위의 분류학자들은 쉽게 납득한다. "가히 천재적인 움벨트로세!". 그렇다. 린네의 분류 체계는 너무나 '움벨트'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분류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그 분류 체계를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린네의 시대가 채 가기도 전에, 혁명적의 인물이 나타나 모든 생물학을 뒤바꿔 놓았다. 바로 찰스 다윈이다. 그가 일으킨 진화론 혁명의 여파는 당연히 분류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까, 생물은 왜 분류되는가? 우리의본능적 움벨트가 왜 이렇게 자연을 잘 설명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답은 진화다. 그렇게 해서 생물을 분류하는 '분류학'이라는 학문은 진화론을 등에 업고 과학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분류학'과 '과학'은 깊이 들어갈 수록 본질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속성이 내재되어 있었다.다윈의 진화론으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분류학’은 ‘과학’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속성 때문에 운명처럼 찢어져야 할 것이었다. 당시엔 이에 대해 아무도 몰랐겠지만, 앞으로 서서히 드러나게 될 터였다. 분류학이 진화론과 어울리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진화론이 오히려 '종'에 대한 구분을 흐릿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움벨트적 분류법의 창시자 린네의 유산인 '종속과목강문계'의 가장 처음에 박혀 있는 '종'은 다른 분류, '속과목강문계'와는 다르고 가장 중요하다, '종'이 분류의 최소 단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그는 책 제목을 『종의 기원』이라 붙이긴 했지만--종의 구분은 필연적으로 흐려진다. 아프리카 코끼리와 인도 코끼리가 과거에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분화했다면, 사실상 그때쯤엔 두 종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종이었을 테니까.
'분류학'이 과학이라고 불렸지만 분류학자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활동을 통해 '과학 활동'을 한다고 여겼다. 지리적 탐험, 표본 수집, 표본의 영구 보존, 그리고 '움벨트‘, 즉 감각과 경험적 직감을 통해 생물을 분류하기. 대체 이 활동들의 어디가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일까? 물론 당시의 과학이라도 다들 실험과 데이터 수집, 분석 같은 엄밀하고 복잡한 무엇을 하는 건 아니긴 했지만. 그들은 지리학자처럼 탐험하고, 고고학자처럼 표본을 모으고, 박물학자처럼 그것들을 보존하고, 역사학자처럼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썼다.
세 개의 혁명: 움벨트의 종말
앞으로 분류학이 진정한 과학으로서 거듭나기 위해, 혁신할 거리는 너무나 많았다.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할 만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그 고리타분한 분류학자들에겐 뼈를 깎는 고통이 될 터였다.과학자라기엔수집가나 탐험가 보이던 할아버지 분류학 학자들이, 전문적인 어려운 단어를 남발하는 반항적인 젊은 것들이컨퍼런스를 휘어잡는 행태들을 보며 극심한 세대차를 느꼈어야 했으니까.
심지어 분류학의 분골쇄신은 고통스러운 과학 혁명을 세 번이나 거쳐야 했다. 물리학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라는 겨우 두 번의 과학 혁명만을 거쳐 현대의 물리학으로 거듭났다는 사실과 비교한다면, 그 고루한 분류학자들의 세 번에 걸친 지독한 고통은 정말로 가혹한 과정이었을 터였다. 그 세 가지의 과학 혁명을 찬찬히 살펴보자.
로버트 소칼과 피터 스니스의 수리분류학 (1963~)
고전 분류학에서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일단, 분류하고자 하는 생물들의 특징들의 차이를 모은다. 예를 들어 어떤 기관의 길이, 색깔, 유무 등이다. 여러 종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한 정보를 분류학자들은 단지 찬찬히 살펴 본다. 그러면 어떤 감각적인 느낌이 번뜩! 떠오른다. 이 동물은 이 동물과 묶어야 한다!이 감각에 의존한 움벨트적 절차는 분류학이라는 과학 활동의 ‘핵심’이었다.
컴퓨터에 익숙한 우리에겐 좀 괴상하게 들린다. 그냥 데이터들 전부 쓸어넣고 통계 소프트웨어로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당시엔 컴퓨터가 없었다. 막 마침 생기려 하고 있었다. 아, 그러면 분류학자들은 자연스레 컴퓨터를 이용해 분석을 하기 시작했겠군. 하지만 그들이 그걸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훔벨트'의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본능이 이끄는 '감'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로버트 소칼과 피터 스니스가 컴퓨터를 이용해 통계적으로 데이터를 분석해 보자는 의견을 냈을 때 그들은 강력하게 묵살했다. 소칼과 스니스는 그 때문에 오히려 더 격렬하게 그들에 대해 학문적 도발을 일삼았다. 소칼과 스니스의 '통계적' 수리분류학은 정말로 성공적이었다. 결과는 움벨트적인 기존 분류법과 일맥상통했을 뿐더러, 그 와중에 감으로만 논쟁하던 몇 가지 의문점도 풀었다. 그래서 소칼과 스니스의, 고전 분류학자들을 향한 도발은 정말로 잘 먹혔다. 고전 분류학자들은 길길이 날뛰었다.
라이너스 폴링과 에밀 주커칸들, 칼 우즈의 분자분류학 (1963~)
DNA의 발견 이후 위대한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DNA와 단백질의 정보를 이용해 생물을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제자 에밀 주커칸들과 함께 고릴라의 베타헤모글로빈 단백질을 인간의 그것과 비교했다. 그 결과는 고전 분류학자들에게, 아니 인류의 인식에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하찮은 영장류 고릴라와 거의 비슷했던 것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비정상적인 고릴라'였다. 분류학자들을 화나게 한 건, 겨우 피 속에 있는 무슨 분자 같은 걸로 생물을 분류할 수 있다는 정신나간 발상이었다. 분류학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 분류학이란 눈에 보이는 형질들, 크기, 길이, 색깔, 기관의 유무를 통해서 해야 하며, 분자로 유사점과 차이점을 본다는 생각은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들을 더욱 더 미쳐버리게 만든 건, '종속과목강문계'에서 가장 넓은 종류, 그러니까 '계'에서 분류학자들이 놓친 하나의 분류 집단이 있다고 선언하는 일이었다. 이 고전 분류학의 이 악몽은 고전 분류학에 영향받지 않은 또 한 명의 분자생물학자에게서 나왔다. 칼 우즈는 DNA 분석을 통해, 박테리아와 고세균이 무척이나 다르며, 오히려 고세균에 비해 박테리아와 동물(과 식물)이 가까운 사이라는 점을 증명해 냈다. 이 말은, '미생물계'라고 뭉뚱그렸던 계 안에 사실은 두 개의 계('박테리아계, 고세균계')로 나눌 수 있는 한 분류가 숨어 있다는 얘기였다. 고전 분류학자들은 절규했다. '동물계', '식물계', '미생물계' 이외에 또 하나의 계를 우리가 놓쳤다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과학 혁명은 앞선 두 혁명보다도 더 고전 분류학자들에게 치욕스러웠다. 그것은 어떤 전문 용어도, 어떤 복잡한 분석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빌리 헤니히와 라르스 브룬딘의 분기학 (1966~)
세 번째 과학 혁명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된다. 빌리 헤니히는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어떤 생각을 했다. 생물들의 모든 특징들을 다 때려넣어 전부 살펴보는 방식은 잘못된 것 아닐까? 모든 특질들이 전부 판단하는 데 유용하지 않은 것 아닐까? 그는 1950년대에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오랜 시기 잊혀져 있다가 1966년 곤충학자 라르스 브룬딘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책으로부터 출발한 분야는 아예 분류학(systematics)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분기학(cladistics, 또는 분지학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한국어 단어는 비슷해 보이지만, 영어는 아예 다른 단어다).
그들의 논리는 모든 특질보다는 ‘진화한 공통의 새로운 특질’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이런 간단한 설명으로는 이 단순하면서도 혁명적인 발상의 가치를 제대로느끼기가 힘들다. 예시를 들어 보자. 다음과 같은 세 생물 집단이 있다. 폐어, 연어, 소. 당신은 이 세 생물 중 어떤 두 생물이 서로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폐어와 연어가 가깝다. 그들은 물고기다. 그들의 특징들--유선형의 몸, 지느러미, 물에 살고 있음, 알을 낳음 등등--은 서로 비슷하고, 소에는 그런 특징이 없다. 우리의 움벨트는 강력하게 폐어와 연어가 ‘물고기’라는 분류로 묶일 것임을 말해 준다. 물론 고전 분류학자들도 이렇게 분류했다. 하지만 새롭게 출현한 분기학자들은 ’진화한 공통의 새로운 특질‘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폐어와 소는 폐를 가지고 있고, 폐어의 심장은 소와 비슷하게 생겼다. 폐어는 소처럼 내부 콧구멍이 있고, 음식물이 식도로 넘어갈 때 폐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 주는 후두개를 가진다. 이 특징들, 연어가 가지지 못하고 폐어와 소가 공통적으로 보유한 특징들은 까마득히 예전에, 폐어와 연어와 소의 공통 조상에는 없었던 특질들이다. 연어가 진화하여 분리되고 난 후, 폐어와 소의 공통 조상 시절에 가지게 된 특질들이다. 즉 ‘진화한 공통의 새로운 특질’인 것이다. 하지만 지느러미, 유선형 몸, 물에 살고 있음, 알을 낳음 등의 특징은 폐어와 연어와 소의 공통 조상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새로운 특질'이 아니다.
폐어는 조기어류(연어 등)보다 육상 척추동물과 더 가깝다.
이 간단하고 어떻게 보면 별것도 아닌 아이디어로부터 분류학은 학문 전반에 걸쳐 거대한 충격을 맞이했다. 그것은 ‘물고기의 죽음’이다. 분기학자들은 이제 고전 분류학자들이 잘 체계화시켜 놓았던 생물의 분류법에 거침없는 칼날을 휘둘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소(와 인간까지 포함한 육상 척추동물 전체)를 넣어 그것들을 ‘물고기’라 칭하거나, 아니면 물고기라는 분류법을 없애버려야 한다. 이 급진적인 주장은 비단 물고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얼룩말과 나방이 곧 그 뒤를 따랐다. ‘새’는 심지어 ‘공룡’이 되었는데, 이건 공룡이라는, 멸종해 쓸쓸함을 자아내는 거대한 생물 분류 집단이 사실 멸종하지 않았고 짹짹거리는 귀여운 생물로 남아있음을(그래서 그 간지가 퇴색되었음을) 뜻한다. 분기학자들은 너무나 무례해서 심지어 신진 집단인 수리분류학자마저 열받을 정도였다. 수리분류학이란, 모든 특징을 데이터화해 쓸어넣어서 통계를 돌리자는 입장이었으니 분기학자의 ‘선별해 분석하자’는 취지와는 절대 어울릴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본능에 가까운 '움벨트적 지향', 어떻게든 생물을 분류하고자 하는 욕구는 과학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은 몹쓸 주관적 감상이 되었다.
움벨트의 복귀?
저자 캐럴 계숙 윤은 여기에서 어떤 의견을 표한다.우리가 물고기를 바라볼 때 느끼는 그 감상적인 향취, 움벨트의 상실이야말로 생물에 대한 인간의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반영한다. 과거 인간은 수백 가지의 생물들을 분류하며 자연의 소중함을 느꼈다. 이제 현대의 도시인들은 과학적 분류학(즉, 수리분류학과 분자분류학, 그리고 분기학) 때문에, 그 움벨트의 소중한 가치를 내다버렸다. 그 결과, 자연은 무관심 속에 황폐해졌다. 희귀종은 멸종하고 생물 종 다양성은 감소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움벨트는 여전히 지켜야 할 가치이다. 우리는 물고기라는 분류를 소중히 해야 하며, 심지어 고래마저도 '물고기'라고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과학적 엄밀함이 섞이지 않은, 우리의 주관적 감상이 온전히 들어 있는 진정한 움벨트니까.
나는 여기에 일부 반대를 표한다. 고래를 물고기라고 분류하는 '움벨트적 사고'와 상관없이, 고래는 포유류이며 물고기에 우리와 가까운 친척 관계인 '폐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아낸 과학의 업적은 위대하다. 우리는 고래라는 신비롭고 위대한 생물이 우리와 가까운 친척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육지라는 미지의 땅을 탐험한 폐어(와 우리의 공통조상)의 불굴의 노력에 대해서도 감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학의 성과를 찬탄하는 것은 움벨트의 본능을 지키는 것과는 별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물고기를 물고기라고 부르고 싶은 욕구를 가졌기 떄문이다. 과학이 발전한다 해서 우리가 물고기를 어떤 조각난 분류군의 파편들로 따로따로 부르게 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움벨트의 상실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움벨트의 상실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는 것도 아니다. 지구 환경의 상실은 분명 다른 이유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가치가 바로 움벨트에 대항해 과학의 가치를 추구한 여러 과학자들의 위대한 성과를 제대로 이야기한 곳에 있다고 본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자신의 책에 대해 나와는 다른 의견을 표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 책의 업적은 과학의위대함을 찬양하는 송가로 마무리되어야 한다.그래서 이 책이 훌륭한 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