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C. 데닛의 『박테리아에서부터 바흐까지...』를 읽고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목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즉 ‘흠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이다. 이 긴 영문 제목을 이해해 그 숨은 의미를 쉽사리 알아챌 수 있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으므로, 당연히 조금 축약한 제목으로 개봉했을 것이다. 이 문구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 한 구절에서 따온 말로, 그 숨은 의미는 ‘잊어버리면 행복해진다’라고 한다. 기억이라는 소재를 잘 살린 영화의 주제와 적절히 어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대니얼 C. 데닛이 올해 4월 작고하실 때, 마침 나는 그의 한국어 번역된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라는 책을 읽는 중이었다. 물론 이 책은 2017년도에 쓰여진, 5년도 넘은 책이고 그 후로도 데닛이 한 권을 더 냈다고 했지만, 데닛은 이 책을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을 떠나보내는 데 내가 바칠 수 있는 최소한의 헌사로서 이 책을 읽고 한 마디 보태볼까 한다. 이 글의 제목은 『이터널 선샤인』의 원 제목 중 하나인 ‘Spotless Mind’에서 힌트를 얻어,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Mind without Understanding’(이해력 없는 마음)을 이용해 붙였다. 영어로는 ‘Eternal Evolution of the Mind without Understanding’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는 운율도 제대로 맞지 않지만, 한국어로서는 '이해력 없는 마음’으로부터 ‘흠 없는 마음’이라는 구절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맘에 든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정확히 인용하자면, ‘competence without comprehension(이해력 없는 능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책의 제목인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는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아마 ‘Bacteria’와 ‘Bach’의 운율을 살린 시적 제목이면서, 동시에 의미적으로도 ‘이해력 없는 능력’의 대표주자로서 박테리아를, 그 반대편으로서 ‘밈의 숙주이자 창조주’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뜻하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명확하지 않은 제목을 통해 책의 전체적인 주제를 간단히 밝히자면, ‘마음의 기원’이다. 대니얼 데닛은 ‘마음의 기원’이라는 주제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썼으므로, 당연히 드는 궁금증이겠지만 이 책이 그 다른 책에 비해 무엇이 다른지가 의문일 것이다.
내용을 요약해 보자.
데닛이 말하는 데카르트의 중력이란, 이원론이다. 물질과 운동과 에너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물리학은 생명의 기작, 호흡과 소화와 심지어 박테리아의 활동까지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쪽엔 ‘마음’이라는, 사밀하고 내적인 현상, 신비롭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의식의 신비가 있다. 이 데카르트의 중력이라고 이름붙여진 우리의 ‘편견’을 깨는 도구로써, 데닛은 ‘다윈의 기묘한 추론 뒤집기’라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생물의 설계, 즉 자연선택이란 어쩌면 무목적적이며 맹목적이고 ‘이해력 없는 능력’competence without comprehension이다. 마음은 다른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다.
의식적 마음이 지시하는 상의하달(Top-down)식이 아닌, 마음이 없을 지라도 설계되는 하의상달(Bottom-up)식 능력. 다시 말해 ‘합리적 근거’는 있으나 그 근거는 누구도 만들어낸 적 없고 진화의 원리에 의해 저절로 생긴다. 여기에서 데닛은 또 한 명의 ‘기묘한 추론 뒤집기’를 언급하는데, 바로 앨런 튜링이다. 튜링의 기묘한 추론 뒤집기란, 이해력 없는 컴퓨터가 스스로 이해력 없는 마음을 소유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수수께끼에 도달한다. 이해력 없는 능력이 가능하다면, 대체 ‘이해력’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왜 우리의 마음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가? 바흐의 마음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는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DNA가 디지털적 정보가 되어서 진화한 ‘이해력 없는 하의상달식 진화’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러한 진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상의하달식의, 방향성 있는, 이해력 있는 진화조차 가능하다. 진화론이 진화하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밈이란, 문화 전달자이자 또 하나의 다윈주의적 진화론이다. 하지만 여전히 밈의 진화조차 ‘이해력 있는 능력’이 아니다. 우리가 밈학(學)에 대해 잘못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 밈의 진화에 대해 우리 스스로 잘 이해하고, 때로는 그 진화의 방향성도 설정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밈의 진화는 거의 유전자의 진화만큼이나 이해력 없고, 하의상달식이다.
유전자의 진화도, 밈의 진화도 아니라면 여전히 우리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이해력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데닛은 바로 ‘말’로 인해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말 (또는 단어)는 밈의 일종이지만, 그 자체로 문화이며 호모 사피엔스만 가진 유일한 능력이다. 침팬지 등의 몇몇 동물들도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문화 밈은 언어 밈의 진화로 인해 증폭되어 진화되었으며 그렇게 하여 이해력 있는 능력의 초입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는 방향성 없거나 무작위적인 탐색에서 벗어나, 선견지명 있고 의도에 의한, 지성적인 설계자의 이해헤 의존하는 과정으로 진화해 나갔다. 이로서 우리는 어떤 ‘환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 스스로의 이미지에 대한 하나의 밈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의식’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연구해 나가며 의식을 하나의 특권 있고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올려 놓는다.
즉, 의식이란 설명할 것도 없고, 신비로울 것도 없다. 이것은 또 하나의 기묘한 추론 뒤집기로써, 이번엔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이름이 붙인 ‘흄의 기묘한 추론 뒤집기’를 언급한다. 흄에 따르면, 벽돌에 유리창이 깨질 때 우리는 명확한 인과관계를 느끼지만, 실제로는 단지 두 사건 (벽돌이 날아옴, 유리가 깨짐)의 연쇄일 뿐 ‘벽돌이 유리가 깨지는 사건을 야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도한 인과관계를 추론하도록 뇌 구조가 배선되어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지각 반응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외부 원인에 오귀속(misattribute)시킨다. ‘흄의 기묘한 추론 뒤집기’의 또 하나의 사례로서, 우리가 설탕을 좋아하는 ‘원인으로써’ ‘달콤함’이라는 속성을 설탕의 내재적인 속성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우리는 설탕의 분자구조를 연구한다고 해서 그 본유적 달콤함을 전혀 찾을 수는 없다. 그것은 뇌 속에 있다. 즉, 달콤함은 화학적 특성의 모형이나 재창조도 아니고, 아예 어떠한 속성도 아니다. 그것은 환각이다. 의식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의식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이 책은 그 두께만큼이나 지금까지 데닛이 바쳐 왔던 마음의 기원 문제에 대한 집대성이며, 실질적으로 그가 연구했던 마음에 대한 거의 모든 주제가 집약되어 있다. 즉, 『마음의 진화』에서 설명했던 지향적 태도, 『의식이라는 꿈』,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등에서 설명해 왔던 의식의 설명할 바 없는 특성 등 말이다. 그리하여 심리철학 사상가인 대니얼 데닛의 마음 연구는 이 책 한권으로 모두 정리되고 마무리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데닛의 책들을 읽어 왔던 독자라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또 그렇지 않고 데닛을 처음 접한 독자라도 이 책만으로도 그의 사상을 제대로 접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대니얼 데닛의 책들은 뜻깊다. 우선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이다. 한때 내가 학문적으로 천착했(었)던 의식에 신비에 대해 철학자의 관점으로 명쾌한 결론을 내리는 책이다(그 난이도는 전혀 명쾌하지 않지만). 『마음의 진화』도 훌륭한 책이다.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 ‘다윈 생물’, ‘스키너 생물’, ‘포퍼 생물’, ‘그레고리 생물’과 지향적 태도에 대한 설명은 무척이나 독특하면서도 또 그럴 듯하게 납득이 된다. 『자유는 진화한다』도 빼놓을 수는 없다.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난제에 대한 흥미로운 해설서이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뜻깊은 책은 바로 『이런, 이게 바로 나야』이다. 이 책이 바로 나의 졸작 「책이 된 남자」의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책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나는 앞으로 이 책들을 또 한번 읽어보고 리뷰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