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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기술 연속체, 그 한복판에서 진화해 가는 우리

케빈 켈리의 『기술의 충격』을 읽고

내 주위에는 기술 트렌드 탐지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 “4차 산업혁명” 같은 단어들을 자주 언급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4차 산업혁명이 곧 들이닥칠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예측하고 대비를 잘 하고, 심지어 기회를 이용하여 국가(혹은 기업)을 선도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예측될 만한 성질의 것이었던가? 그들이 말하는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이 밀려 들어오기 직전에, 어떤 이도 사회가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 ‘예측’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선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산업혁명은 단지 밀어닥쳤을 뿐이었다. 마치 예측불가한 재앙과도 같은 성질이었다. 이런 파괴적인 물결을, 대비하는 것을 넘어 예측하고 대비한다, 심지어 선도한다? 말들은 얼마나 그 예측력이 얄팍한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트렌드를 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현상의 기술에만 급급할 뿐, 저변의 ‘본질’에 대해 무척이나 무지하다. 예를 들어, 2016년에는 ‘있어빌리티’라는 병신 같은 단어가 트렌드라고 떠들던 자들이 있었다. 이 단어는 (별로 없는 사실을) 있어보이도록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능력 정도를 뜻한다고 하면서, 이제 사람들은 이 ‘있어빌리티’를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6년, 갑자기 무언가 변한 것이 있었던가? 언제 어떤 사회에서, 남에게 과시하는 사람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 그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내 말은, 심지어 신석기 시대에도 그랬단 말이다. 부자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도 열심히 돌도끼 자루를 꾸미고, 옷을 지어 입고, 도자기에 빗살무늬를 장식했다. ‘있어빌리티’라는 단어를 두 자로 줄이면 ‘과시’이고, 과시는 호모 사피엔스의 돌도끼 자루에 발견된다는 사실을 되새기면, 이것이 2016년 트렌드라는 주장은 무척이나 괴상한 주장이었다.


물론 2016년에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SNS 문화의 심화로 과시 사진을 꾸며서 올리거나, 실용성이나 내구성보다는 디자인 가치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구매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이 추세는 2016년 이전에도 계속하여 ‘연속함수적으로’ 증가하여 왔으며, 2016년에 뭔가 ‘특이점이 오’듯, 빅뱅이 터지듯 폭발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있어빌리티’라는 용어의 개념이 (그 특유의 쌈마이 나는 느낌은 무시하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2016년에 급작스럽게 새로 생긴 것이라기 보단, 인간성에 내재되어 있는 ‘과시’라는 성향이, 2016년 이전부터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던 여러 복합적인 기술 요인과 결합하여, 2016년에 들어서야 드디어 그 자그마한 변화가 ‘사회적으로 적절히 인식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도 마찬가지이다. 기술의 발전에는 너무나 일반적인 속성이 있고, 그 속성은 유구하고 불변적이다. (얼마나 유구한지는 이따가 논해보자.) 1차, 2차, 3차 산업혁명도 그 ‘혁명적’ 인식 변화에 비해 기술 속성 자체의 변화는 사실 미미하였고, 그러한 ‘미미한 변화’를 통해 변화된 인간의 본성도 사실상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미미한 변화는 인간 사회에서 어느 정도 충격적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을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결국 우리는 빙산의 일각만 보고 변화를 논하는 것이며, 변하지 않는 본질적 속성은 실제로 변화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커다란 빙산의 묻혀진 부분을 신경쓰지 않는다.


What Technology Wants - Kevin Kelly

이 책의 저자인 케빈 켈리는 우리가 ‘기술’이라는 용어를 쓸 때의 편향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좀 더 넓은 개념의 ‘기술’에 대해서 쓰고 싶었는데, 그 개념에 들어가는 것은 ‘생명공학’, ‘디지털 기술’, ‘석기시대 기술’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사회 제도, 모든 유형의 지적 산물들, 소프트웨어, 법, 철학 등도 포함한다. 이것을 저자는 ‘테크늄’이라 칭했는데, 물론 이에 맞춰 제목도 『What Technium Wants』로 붙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독자가 제목을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정의된 ‘테크늄’은 리처드 도킨스의 ‘meme’ 개념과 비슷해지므로, 저자가 이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일견 이상한 일이다. ‘리처드 도킨스’라는 인물 자체가 책 내에서 몇 번 언급되기는 하므로 ‘밈’에 대해 몰랐을 리는 없다. 아마 의도적인 거리두기일 것이다. 실제로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지향하는 바가 좀 다르다. 물론 비슷하다. 매우 비슷하다. 밈도 테크늄도 진화하고, 엔트로피에 역행하고, 인간의 뇌 안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둘의 (개념적) 큰 차이는, Meme은 Gene의 진화에 뒤이은 새로운 형태의 진화라면, 테크늄은 생명의 진화에 새로 돋아난 7번째 가지(고세균, 진정세균, 원생생물, 균계, 식물계, 동물계에 이은 제 7의 계)라는 것이다.


물론 미미한 차이에 불과하다고 얘기할 수 있고, 본질적으로 ‘밈이랑 같다’고 얘기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려는 이야기 때문에 이렇게 의도적으로 밈 개념과 거리두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테크늄은 사실상 생명의 진화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는 설명 때문이다. 크게 보면 생명의 진화 메커니즘이 테크늄의 메커니즘에 포함된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이나 ‘기술적 특이점’ 등의 트렌드 용어가 초라해지는, 기술 발전의 유구함이다.


생명의 진화는 기본적으로 엔트로피, 즉 우주적 방향에 역행해서 ‘스스로 복잡해지는’ 자기구조적 과정이다. 이 과정은 세 가지의 ‘힘’에 의해 추동되는데, 그것은 적응적 (‘적응(Adaptation)’은 진화의 기본 원리이지만 뒤에 말할 우연에 의한 진화와는 어느 정도 반대되는 개념으로 특별히 강조된다), 우연적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단속평형론’에서 설명하는 우연에 의한 진화), 그리고 불가피함에 의한 구조적 진화이다.


세 번째의 추동력인 불가피함에 의한 구조적 진화란 저자인 케빈 켈리 외에는 아무도 얘기해 본 적이 없고 설명하기조차 좀 까다로운데, 일단 내가 이해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구조적 진화란, 이론적으로 가능한 진화의 수학적 다차원 공간 중에 실제로 가능한 한계에 의해 일어나는 추동력이다. 이 추동력은 같은 기능의 반복적 발생을 일으키는데, 예를 들어 독침의 진화는 거미, 노랑가오리, 쐐기풀, 지네, 쑥치, 꿀벌 등의 동물에게서 독자적으로 재발명되었다. 이 현상은 설명을 요하고 실제로 이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설명을 이루어 낸 과학자들의 과학적 이론도 많다 (예를 들어, 수렴 진화). 그리고 이 독자적인 케빈 켈리식의 설명이 딱히 ‘과학적’이라는 느낌도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두 추동력의 빈 곳을 설명하는 그 독창적인 설명력 때문에 확실히 이 세 번째 추동력인 구조적 진화라는 개념은 인정할 가치가 있다.


이제 테크늄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산물인 테크늄도 이 세 가지의 추동력에 의해 진화한다. 생명의 진화 세 힘 중 ‘적응적’이라고 이름붙은 힘은 테크늄에선 ‘의도적’이라는 이름의 힘으로 대체된다. 이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기술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니 당연하다.

그러나 나머지 두 힘을 얘기해 보면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는 일이 일어난다. 나머지 두 가지의 추동력 (우연적, 구조적)은 사실상 인간의 의지나 의식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테크늄의 발전(=진화)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테크늄은 그 안에 방향을 내재하고 있고, 그 때문에 인간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만들어진다. 테크늄은 초생물이다. 그것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상한 성질을 내재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인간과 테크늄과의 관계는 공생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그것을 수용하기로 ‘선택’할 수도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우리가 우리 대장 안의 대장균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테크늄은 우리의 주위에 널려 있고, 우리는 그것을 쓴다. ‘의도적’ 힘에 의해 우리는 기술을 어느 정도 개발하거나 발전시킬 수 있지만, 나머지 두 힘인 ‘구조적’, ‘우연적’ 힘에 의해 기술이 스스로 예측못한 성질을 부여하고 변화를 일으킨다 해도 인간은 어찌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철학에 의해 그것을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해도, 완전히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없다. 기술거부론자인 테러리스트 유나바머도 결국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테크늄의 일부인 폭탄을 만들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간은 가끔씩 기술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이다. 유나바머는 기술을 완강히 거부하고 기술 없는 사회를 꿈꿨다. ‘아미시’ 라는 사람들은 기술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만의 전통적 사회를 살아간다. 우리 가까운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것 같은가? 굳이 스마트폰이 필요없다고 피처폰을 고집하면서 최신식 TV를 구매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내 주위에도 구글의 위치인식 기능을 꺼놓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인간은 기술을 만들지만,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두 가지의 추동력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불안해 한다. 좋은 영향을 끼친 어떤 기술의 반대편은 그에 비슷한 정도의 파괴적 영향도 같이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이득과 손해는 합쳐서 0이 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기술은 언제나 사회의 변화를 불러온다. 적당히 유용한 기술은 작은 정도로, 매우 유용한 기술은 파괴적일 정도로 큰 변화를. 우리는 언제나 그 통제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직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그러나, 우리 중 일부는 변화를 싫어하며 이를 금지함으로서 안정을 찾고자 한다. 자기추동력이 있는 테크늄에게 금지조치란 단지 유예일 뿐이다. 언젠가는 고삐를 풀고 날뛸 것이다.


우리가 테크늄에 맞서 해야 할 일은 억제가 아니라 공진화이다. 피아노가 없는 모차르트, 카메라가 없는 히치콕 처럼 기술없는 인간은 창의성이 말살된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다음 시에서 잘 표현된다.


하느님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그 차이를 구분할 지혜를 주시옵소서.
— 라인홀드 니부어


장대한 생명-테크늄 연속체의 대서사시에서 우리는 한낱 4차 산업혁명과 특이점, 인공지능의 찰나에 맞닥뜨린다. 그 찰나는 불행히도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거대한 해일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대비하는 것도,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이 파도를 타고 또다른 초인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석기시대, 문명시대, 산업혁명 시대의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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