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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Dec 02. 2022

# '겸'에 대하여 생각하다.


당신 겸이 뭐냐고요. 여기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겸 하나씩 있거든요. 웨이터-겸-예술가, 웨이터-겸-배우. 바텐터 패디는 자칭 모델이죠. 글쎄요 싶지만. (데이비드 니콜스, '원데이' 중)



음,


지금 내가 가진 겸은 그리 많지 않다. 남편 겸 아버지 겸 아들? 어쩌다 사위 겸의 겸 하나는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나도 한창땐 밖에서 많은 겸 가진 적 있었으나, 이제는 다 놓아 버렸다. 세상에 나와 아무리 높고 빛나는 겸을 성취했어도 결국 그것은 술 한잔만도 못한 일이었다. 남보다 높은 자리에 있어 본들, 미운 놈 혼내줘 본들, 기를 쓰고 경쟁하여 인정받아 본들 그딴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다 꿈같은 일이고 구름처럼 흘러간 일일 뿐이다. 지금은 지나간 일보다 지나갈 일을 아까워해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많았지만 지나갈 시간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술 한잔보다 못한 '겸'에 매달려 소중한 것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겸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살다가,


누구를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한다. 그러면 스승 겸 제자가 되어 '겸' 하나를 획득하게 된다. 또 성장하여 사랑할 사람과 결혼을 하면 새로운 겸들을 만나게 된다. 


- 딸 겸 며느리 겸 아내 겸 어머니 겸 아줌마.
- 아들 겸 사위 겸 남편 겸 아버지 겸 웬수.


겸이란 우리가 날 때부터 가진 것도 있고,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기도 하며, 투쟁을 통해 쟁취하기도 한다. 또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덮어쓰는 겸도 있고, 원하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겸도 있다. 이렇게 우리는 수많은 겸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소망하던 겸, 아직도 소망하고 있는 겸은 무엇일까. 어려서 곧잘 만화를 그려 어른들은 자라서 분명 만화가가 될 거라고 했었다. 만화가 겸 작가 겸 농부 겸 바리스타 겸 차밭의 머슴? 아직 모르겠다. 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겸들이 실제로는 대단하지 않았다. 그 겸들을 내려놓고서도 너무 편안하게 살고 있으니. 지금껏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여전히 중요한지,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이 아직도 소중한지 검증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 겸들은 여전히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겠지만, 과연 지금의 나에게도 그럴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이 주는 금전적 보상과 명예는 가정의 존립을 위해 필요하고, 가족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의 원천이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나는 그 가치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사람은 그 나이대에 맞는 가치 척도를 갖게 된다고 한다. 지금 그 척도에 따른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디에 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일을 위한 나인지, 가정을 위한 나인지, 나를 위한 가정인지, 나를 위한 일인지를.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명예만 챙기려는 사람들을 본다. 노블레스(noblesse)는 '닭의 벼슬'이란 말이고, 오블리제(oblige)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이라 한다. 즉 닭의 사명은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 데 있다는 말이다. 양초의 사명은 어둠을 밝히는 것에 있듯이, 양초의 가치는 그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가진 겸의 가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가 가진 '겸'이 얼마나 고급스럽고 훌륭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의 겸들이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었으면 좋겠고, 그의 겸들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빛나게 했으면 좋겠고,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했으면 좋겠다. 무엇으로든 그가 잘하는 방식으로.





책 나오던 날, 시청 옆으로 오봉산 올라가는 길목에서 PPL 찍다. 아내 겸 친구 겸 모델이 수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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