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도, 마음도 금방 끓으면 넘친다

가스레인지

by 라이트리

라면은 빠르다.

물이 끓는 데 4분,

면이 익는 데 3분,

스프 넣고 파 송송 썰어 넣으면

딱 10분이면 완성.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방엔 김이 서리고,

라면 냄새가 번지고,

입 안엔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빠르고 간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라면처럼 뭔가를 해치운다.


하지만 가끔은,

라면조차도 약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센 불에 끓이면

물이 너무 빨리 넘치고,

면은 익은 것 같아도

속은 덜 익어 있다.

심지어 스프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겉만 빨갛고 속은 텁텁한 그런 라면.


사람 마음도 그렇다.


예전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뭘 해도 센 불이었다.

빨리 다가가고,

빨리 웃기고,

빨리 애정 표현을 했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알아?”

그 말을 참 자주 했던 것 같다.


근데 결국,

센 불에 탄 건 마음이었다.


관계도, 감정도

급하게 익히면

어디선가 하나는 덜 익고

어디선가는 하나는 타기 마련이다.


요즘은 라면을 끓일 때

처음엔 센 불로 확 끓이다가

면을 넣고 나선

약불로 낮춘다.


스프가 고르게 퍼지고,

면도 속까지 익고,

무엇보다

라면이 넘치지 않는다.


관계도 그렇게

온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다.


누군가를 천천히 알아간다는 건

그 사람의 말투,

취향,

침묵의 온도까지

익숙해진다는 거다.


답장이 조금 늦어도

마음이 멀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말수가 적은 날엔

그저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예전엔

그 모든 걸 ‘무관심’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그게 ‘편안함’일 수 있다는 걸 안다.


사실 나도

예전엔 늘 센 불이었다.

뭐든 열정적으로 시작했다.

계획도, 일도, 사람도.

확 끓여놓고

그다음엔 지쳐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어느 날

진짜 중요한 것들은

‘끓는 속도’가 아니라

‘오래 유지되는 온도’로 결정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마음에도 약불을 켠다.

기억은 천천히 되새기고,

감정은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화났을 때

바로 반응하지 않고,

좋을 때도

당장 고백하지 않고,

조금만 더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감정이 단단해진다.


라면을 다 끓이고

뚜껑을 덮어

1분만 더 기다리면

면발이 훨씬 더 쫄깃해지는 것처럼.


그 1분의 여유,

그 약불의 인내가

사람을 만든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렇게 하면 타이밍 놓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타버린 감정보단

천천히 우러난 마음을 더 오래 기억한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작은 냄비에 라면을 넣고

스프를 풀고

불을 살짝 낮춘다.


내가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너무 빠르게 굴진 않았는지,

내 마음은

지금 끓는 중인지, 지쳐가는 중인지

조용히 확인해본다.


그리고 다시

가만히 한 모금 떠본다.

약불에서 익은,

조금 더 깊은 맛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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