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졌을 때가 더 나다운 순간

형광등

by 라이트리

나는 형광등이 꺼진 방이 좋다.

어둡지만,

그냥, 조용하다.


불빛이 없는 공간은

뭔가를 덜어낸 것 같다.

떠들썩한 걸 멈추고,

해야 할 일을 잊고,

나만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워진다.


형광등은 켜졌을 때

언제나 어깨를 긴장하게 한다.

환하게 밝혀야 할 것들,

보이지 않아도 될 것들,

보여줘야 할 것들,

드러나야 하는 표정과 말들.


눈앞에 모든 게 또렷이 보이는 대신

내 속은 더 흐릿해진다.


불이 켜지면

나는 ‘보이는 나’로 살아야 한다.

말을 조심하고,

표정을 관리하고,

어디에 시선을 둘지 계산하며 움직인다.


그런데

형광등이 꺼지면

나는 ‘보이지 않는 나’로 돌아간다.

말 없이 앉아도 괜찮고,

누워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다.

웃지 않아도 되고,

무표정이어도 미안하지 않다.


나는 켜졌을 때보다,

꺼졌을 때가 더 나다웠다.


젊었을 적엔

빛나는 게 멋진 줄 알았다.

주목받고,

인정받고,

밝게 웃고,

분명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를 조금 먹고 나니,

밝음이 늘 편안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어떤 불빛은 너무 날카롭고,

또 어떤 빛은 눈이 시리고,

어떤 조명은

그 아래 있는 나를 자꾸 작아지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요즘

형광등을 자주 끈다.


물리적인 조명만이 아니다.

내가 나를 향해 들이대는

과한 시선과 기대,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강박,

“더 보여줘야 해”라는 압박들.


그 모든 걸

하나씩 끄는 연습을 한다.


빛나지 않아도 괜찮고,

밝지 않아도 괜찮고,

심지어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의미해 보인다’고 느껴져도 괜찮다.


그건 그냥

형광등이 꺼져 있는 상태일 뿐이다.

잠시 쉬는 중,

에너지를 아끼는 중,

다시 켜지기 전

잠깐의 어둠.


나는 이제야 안다.

불빛 속의 나보다

어둠 속의 내가 더 정직했다는 걸.


꺼졌을 때

나는 오히려 나를 더 선명하게 느낀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 순간,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괜찮다’고 중얼인다.


그래,

나 지금,

살고 있는 거다.


빛나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이 꺼진 순간에

나는 오히려

조금 더 온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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