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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Mar 25. 2021

운수 좋은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립니다. 

애당초 일은 틀렸습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느긋하게 산책길에 나섭니다. 


작은 폭포에 이르러 개울로 내려서는데 무언가 급하게 물로 뛰어듭니다. 

물 속과 바깥을 자유로이 오가는 포유동물, 수달입니다. 


폭포 아래 사방댐에 물이 막혀 제법 큰 웅덩이가 되었는데,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듯 합니다. 

그동안 텃밭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배설물이 누구 소행일까 궁금했습니다. 

범인이 확인되었습니다. 

까만 배설물에는 물고기 가시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수달은 갑작스런 나의 출현에 놀라고, 나는 갑작스런 녀석의 다이빙에 놀랐습니다. 

애써 진정하고 사진을 찍으려고 한참 기다립니다. 

더 이상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촬영에 실패했습니다.


TV로만 보던 수달을 만난 건 큰 행운입니다. 

운이 좋습니다.

<폭포> 폭포 아래 사방댐이 있습니다. 물길이 막혀 웅덩이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수달이 삽니다.



몇 걸음 옮기니 두 번째 운이 나타납니다. 

동그란 전구알 같은 꽃봉오리가 눈앞에 매달려있습니다. 


함박꽃입니다. 어렸을 때는 흔하게 봤지만 그 뒤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봄이 되기 전 아내가 꽃차를 배운 뒤로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습니다. 

꽃차 재료로 목련을 높이 치는데 함박꽃이 그보다 윗질이라 했습니다. 

함박꽃을 구하기 어려워 목련꽃으로 대체한다고 하니 짐작할 만 합니다.


차를 떠나 우선 곱습니다. 

예닐곱 장으로 된 흰 꽃잎이 붉은 수술과 흰 암술을 소담스럽게 감싸고 있습니다. 

정갈합니다. 


은근하면서도 짙은 향이 나기 때문에 근처를 지나다보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함박웃음” “함박눈”이 모두 함박꽃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려서는 산목련이라고 불렀습니다.


<함박꽃> 함박웃음, 함박눈이 이 꽃에서 따온 말입니다. 산속에서 만나면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입니다.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는 전구를 닮았습니다.


꽃송이 몇 개 따서 돌아왔습니다. 

마침 이웃 어르신이 오셔서 함께 차를 마십니다. 


뜨거운 물을 부으니 금새 누렇게 변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한 켠에 맛이 궁금해 얼른 잔을 비웠습니다. 

아뿔싸, 강하고 진한 첫맛은 쓴 편에 속합니다. 


아쉬움을 누르고 두 번 세 번 물을 따릅니다.

잔을 비울수록 은은하고 편안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깊은 맛이 부드럽고 단맛이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요란을 떠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함박꽃 차> 차를 내리기 위해 물을 붓기 전입니다. 꽃모양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함박꽃차> 남은 한 송이를 마저 내립니다. 창밖에 층층나무 꽃이 보입니다. 이즈음 꽃들은 대부분 향기로 말을 건넵니다. 층층나무꽃도 어질할 정도로 달착지근한 향기를 자랑합니다.




비 내리는 5월 어느 날, 

골짜기는 일없이 안개를 피웠다가 날려 보내기를 반복하는데, 

향기로운 함박꽃차를 마십니다. 


이웃 어머니는 지긋한 눈으로 흐르는 안개를 뒤쫒고, 

나는 오늘 하루 운수를 생각합니다.


<안개> 산골은 무시로 안개를 피워올립니다. 골짜기 끝에서 만들어진 안개는 오른쪽 골을 타고 흩어집니다. 함박꽃차를 마시며 안개놀음에 빠집니다.


#산책 #함박꽃 #산목련 #수달


(2018년 5월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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