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보기로 했습니다. 연휴 첫날을 맞아 마트는 북적거릴 게 뻔합니다. 둘 다 사람 많은 곳을 꺼려해 한사람이라도 적을 때 후딱 장보기를 마치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늦은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바로 대형마트로 갔습니다. 아뿔싸,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이미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부지런합니다.
채소와 생선 몇 가지를 카트에 담더니 아내는 나에게 계산대에 가서 줄을 서라고 합니다. 줄을 서 있는 동안 자신은 두어 가지 더 골라 오겠다는 겁니다. 들어올 때 돌아 본 계산대에는 20~30미터나 되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헉, 벌써 이렇게 많아? 놀란 뒤끝이라 아무 말 없이 카트를 끌고 맨 뒤에 가서 섰습니다. 줄 선 곳은 자율계산대입니다.
생각보다 줄은 빨리 줄어들었습니다. 한 칸 두 칸 당겨지다가 서너 칸씩 한꺼번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느덧 내 앞에는 두어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목을 길게 뽑고 둘러보지만 아내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줄에서 비켜나며 뒷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길 몇 차례. 처음에는 한 사람 앞세우고 그 사람 바로 등 뒤에 섰다가 다시 다음사람을 앞세우는 식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줄에서 빠져나와 기다립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아내가 다가오는 게 보입니다. 이제 줄로 들어가야 합니다. 당연히 내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부터 쭉 ‘양보’해 왔으니 거리낄게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없이 비켜서긴 했지만 내 뒤에 서 있던 입장에서 보면 양보임에 틀림없습니다. 서 있던 곳 바로 앞, 간격이 벌어진 틈에 카트를 들이밀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내가 들고 온 물건을 받아 카트에 넣는 것으로 줄서기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이제 계산을 끝내고 집에 가서 잘라 먹은 잠을 이어자면 됩니다.
그 때였습니다. 뒤에서 들릴락 말락 한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왜 끼어들고 그래? 늦게 왔으면 뒤에 가서 서야지. 별사람 다 있네. 아침부터 뭔 일이래. 쯧쯧!” 반말인 걸로 보아 대놓고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완전 속말도 아닌 것이 내 귀에 들릴 정도로는 충분히 크고 또박또박했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는데 앞줄이 당겨지는 바람에 계산대로 밀려갔습니다. 계산을 하려고 물건을 옮겨 담으면서도 꺼림칙했습니다.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나?’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러다 ‘이까짓 게 뭐라고’ 하며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상대방도 별일 아닌 일로 더 이상 속 끓이지 않기를 바라며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잊히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릴 적 기억 하나를 불러오며 실타래를 이어갔습니다.
2. 낙락장송
어린 시절 산골에서 자랐습니다. 산골의 산은 높고 가파릅니다. 개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호위하듯 내달리는데 어느 편이든 능선을 이루어 끝 간 데 없이 이어집니다. 개울 바닥에서부터 곧장 치받아 오르는 통에 산등성이까지는 경사가 심합니다. 멀리서 쳐다보기만 할 뿐 어른들조차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어린 조무래기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래 쪽 야산이 인공으로 조림한 낙엽송과 잣나무의 땅이라면, 사람 발길 닿지 않는 꼭대기는 활엽수의 땅입니다. 멋대로 자란 활엽수는 한겨울이 되면 독특한 풍경을 연출합니다. 눈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산과 회백색 짙은 하늘이 낙엽을 모두 떨군 나무들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육중한 산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강경한 겨울 하늘이 참나무 빗살로 물샐틈없이 깍지를 낍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초록과 파랑으로 갈라져 냉정하게 내외하던 산과 하늘이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어느 해 겨울이었습니다. 뒷마당에서 놀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습니다. 멀리 흑백 능선을 훑어가던 눈에 진초록 소나무 한그루가 들어왔습니다. 활엽수의 땅에 표표히 자리 잡은 소나무는 크고 웅장했습니다. 정삼각형 모양으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수형은 신비스러웠습니다. 한쪽 가지가 부러지기 이전의 정이품송 같았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을 테지만 그날 처음 망막을 거쳐 내 머릿속에 들어와 내 나무로 자리 잡았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통학로는 3km나 돼는 신작로 길이었습니다. 국민학생이던 어린 우리는 멀고 지겨운 그 길을 지겹지 않게 다니려고 온갖 개구진 짓을 하며 걷고 뛰고 했습니다. 그 중에 깡통 차기가 있었습니다. 버려진 깡통에 잔돌 한두 개를 집어넣고 아가리를 우그러트려 막은 다음 차고 다닙니다. 한 녀석이 냅다 지르면 다른 녀석에 쫓아가 다시 걷어찹니다. 자갈이 든 탓에 발로 차인 깡통은 세상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그렇게 무료한 봄날 오후를 거슬러 집에 가곤 했습니다.
그날도 깡통을 차며 집에 가고 있었습니다. 내 차례가 되어 깡통을 차려고 길 건너편으로 뛰어가는데, 소나무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높은 산등성이에 버티고 서 있는 품이 지난 겨울 뒷마당에서 봤던 ‘내’ 소나무라는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보던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삼각형 한쪽 아래가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균형은 온데간데없고, 그래서인지 더 이상 당당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깡통 차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쳐다봤습니다. ‘내가 뭘 봤던 거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산 위를 쳐다봤습니다. 소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이제 막 새 잎을 내기 시작하는 참나무들을 호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전히 완벽했습니다. 겨우내 보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깡통 찰 때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나무가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3. 자기 돌아보기
하나의 사건이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사건이 됩니다. 한사람에게 마트 사건을 정의하는 단어는 ‘양보’ ‘호의’ 혹은 ‘권리’입니다. 호의로 양보했던 자리를 되찾아 온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새치기입니다. 느닷없이 끼어들어 주말 아침에 초를 친 무례한 입니다. 졸지에 새치기가 된 사람이나 새치기 당했다고 느끼는 사람이나 눈뜨고 코 베인 꼴입니다.
오해가 생기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잠깐사이, 같은 공간에서도 우리는 세상을 충분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한 사람이 같은 사물을 볼 때조차 각도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소나무는 언제나 제 자리에 독야청청으로 서 있을 뿐인데 여기서 볼 때는 고매한 정이품송이라고 우러르고, 저기서 볼 때는 볼품없다고 무시합니다. 소나무는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은 사람 몫입니다.
제 눈으로 보거나 제 귀로 들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사실입니다. 직접 보고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 너머까지, 그러니까 진실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내 눈에 보인 새치기가 누군가에겐 새치기가 아닐 수 있고, 내가 양보라고 생각하더라도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나무의 한쪽 면만 보고 다 본 것 마냥, 다 아는 것 마냥 행세하는 건 섣부른 짓입니다.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 즉 오해는 갈등의 원인이 되고. 그러다보면 종내는 감정이 상하고 다툼으로 번집니다.
‘절대(絶對)’라는 말을 흔히들 씁니다. 강조와 과장을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자말을 뜯어보면 실상 무서운 말입니다. 대(對)를 절하는 것(끊는 것, 絶)이 절대입니다. 나 이외의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절대의 반대말이 ‘상대’인 것을 보면 절대란 곧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 다름 아닙니다. 상대를 전면 부정한다는 뜻에서의 절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 진리’ 역시 불가능한 말입니다. 내가 본 것과 들은 것 역시 그 범위 안에서만, 상대적으로만 진실합니다. ‘절대’는 함부로 입에 올릴 말이 못 됩니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케노시스’로 향합니다(『축의시대』). 케노시스는 기독교 전통에서 ‘자기버리기’ ‘비움’을 뜻합니다.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자기 버리기입니다. 공자는 이를 두고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 했고, 노자는 소사과욕(少私寡欲)으로 표현합니다. ‘아놀드 토인비’ 역시 “종교는 ~ 개인과 단체에서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를 위한 유일한 열쇠”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돌보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자기 돌아보기’입니다(이정우, 『개념뿌리들』). 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내 생각과 내 눈 그리고 내 귀를 의심하고 다시 보는 것은 자기 돌아보기의 출발점입니다. 그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자 내 영혼을 돌보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