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연 Feb 04. 2024

입춘객(立春客)

겨우 동이 튼 이른 아침, 화목난로가 뿜어내는 온기와 그을음내 속으로 파고들며 게으름을 이어갑니다. 깬 듯 아니 깬 듯 이쪽저쪽을 넘나들다 까무룩 다시 잠을 청하는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립니다. 산중 아침을 깨우는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계세요? 계세요?”


헝클어진 머리에 옷매무새도 돌보지 않고 문을 엽니다. 구름 낀 잿빛 하늘 아래 세상은 아직 어둠의 허물을 벗지 못했습니다. 지붕에 두껍게 쌓인 눈이 녹는지 처마에서는 벌써 물방울이 방울져 내리고, 엄동을 지난 아침 공기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습니다. 문밖에는 등산복을 풀세트로 갖춰 입은 여성이 서 있습니다. 등산로가 아닌 곳에 있을법한 옷차림이 아닙니다.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삽을 빌릴 수 있을까요?” 산양 탐색용 카메라를 설치하려고 산에 가는 길이랍니다. 도중에 눈이 많아 차가 멈춰서는 바람에 아침 댓바람부터 낭패를 본 모양입니다. 가장 가까운 집을 찾아 1km를 걸어 와서는 문을 두드린 겁니다. 몇 번 다녀본 길이라 익숙한 듯 이집 저집 사정을 다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왔을 땐 비어 있더니, 이번엔 집 앞에 차가 세워져 있는 걸 보고 문을 두드렸답니다.


무릎을 넘도록 쌓인 눈을 뚫고 산에 오른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게다가 집 앞을 버티고 선 직벽을 가리키며, “산양은 경사가 심한 곳을 좋아해서 저런 비탈 꼭대기에 카레라를 설치해요. 아무리 눈밭이라도 저 정도 치고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니에요.” 합니다. 눈길에 차가 못 움직이는 게 문제지, 가파른 직벽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산양을 따라다니자면 사람도 산양처럼 날래야겠구나 생각이 스쳐 갑니다.


“산양도 있나 보군요? 노루는 더러 봤는데.” 하자, “지난번에 보니까 여기 밭에도 다니던데요. 저기에서 산양 똥 봤어요.”라며 밭 한쪽을 가리킵니다. 노루나 고라니 똥보다는 산양 똥이 더 굵답니다. 가을부터 아내는 고라니에 빠져 있습니다. 책을 읽고 울음소리를 구별해 내더니 급기야 밭에서 똥을 찾아내고는 좋아합니다. 그러다 최근에는 엉덩이에 하얀 솜털 뭉치를 달고 다니는 노루를 발견하고는 아침마다 창밖으로 산비탈을 살피는 게 일이 되었습니다. 이젠 산양을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게 생겼습니다. 


창고에서 삽을 꺼내 건네자 받아 들고는 말합니다. “그나저나 이런 깊은 산중에서 어떻게 사세요?” ‘이백’의 「산중문답」 첫 구절(問余何事栖碧山(문여하사서벽산)) 그대로입니다. 나 역시 두 번째 구절을 따라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입니다.(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뒤돌아서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발자국을 따라 한가한 마음을 실어 보냅니다. 복숭아꽃이 개울물을 수놓자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사람 세상에서 한 발짝 비껴 난 산중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입춘날 아침, 뜻밖의 손님이 다녀갔습니다. 손님이 남기고 간 여운을 담아 입춘방을 씁니다. 산양을 따라다니는 그의 발자국이 안전하길, 그의 발자국을 앞서 걷는 산양의 앞날이 영원토록 무탈하길 기원합니다.      





〈산중문답(山中問答)〉

                                                                                     이백(당나라)

問余何事栖碧山(문여하사서벽산) 무슨 까닭에 푸른 산에 사냐고 묻는다면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스스로 한가로울 뿐 말없이 웃어만 보이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꽃 수놓인 물줄기 아득히 흘러가는 곳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가 예 있구나

* 해석은 풍연


한 가운데 노루 엉덩이의 흰 털뭉치가 보입니다. 집안에서 창으로 찍었습니다.


#입춘 #입춘대길 #만사여의 #산양 #숲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