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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병민 Nov 10. 2023

五耳 | 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어라


내 귀가 나를 가르쳤다.

―칭기즈칸 

    

지금 여러분 앞에는 다음의 네 가지 능력들이 놓여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선택권이 하나밖에 없다고 칩시다. 어떤 걸 선택하시겠어요? 단, 한 번 선택하고 나면 다른 것으로 교환할 수 없을뿐더러 물릴 수도 없으니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한 1분 정도의 여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① 말하기   ② 듣기   ③ 쓰기   ④ 읽기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 ①-③-④-② 혹은 ③-①-④-② 식으로 선택한 분들, 꽤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물론 ④와 ②의 순서를 바꾼 분들도 있겠지요. 다소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①과 ③이 나머지 항목들에 비해 좀 더 높은 점수를 받았을 거라는 것. 혹시 “웃기는 소리! 이 양반아, 읽어야 쓰고 들어야 말하지. 거꾸로 선택하는 건 어느 나라 공식이여?”처럼 기본에 충실한 분들이 있다면, 이번 편은 반 정도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어이 작가 양반, 다른 건 모르겠고 듣기가 넷 중 가장 중요한 것만은 알고 말고. 귀가 열려 있어야지, 귀가.” 이렇게 말하는 분들에겐 제가 큰 절을 올리겠습니다. 이번 편은 넘어가라는 당부를 곁들이면서 말이지요.   

  

[요리 가이드라인 #1] 인간은 깨어 있는 시간의 70%를 의사소통에 사용하고 있다. 그 중 48%가 듣기이며 35%가 말하기다. 1%가 읽기, 7%가 쓰기이며 기타가 9%로, 듣기는 실로 의사소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박노환, 『경청으로 시작하라』에서      


저는 듣기 능력, 다시 말해 경청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성공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습니다. 말하기와 쓰기는 굳이 상대방이 없어도, 즉 남의 의견과 생각과 주장과 입장을 고려하지 않아도 실력을 올리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습니다. 자기만 의지를 갖고 열심히 잘하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듣기는 완전히 그 반대이지요. 상대방의 의견과 생각과 주장과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면 실력 자체를 올릴 수 없습니다. 말하기와 쓰기가 자신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면, 듣기는 그 권한이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넘어가 있습니다. 

    

수십 아니 수백 명 앞에서의 PT? 한 번 망친다고 회사에서 쫓겨나진 않습니다. 회사의 명운이 걸린 신사업 추진을 위한 기획안? 못 써도 됩니다. 타박은 받을지언정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쫓겨나진 않습니다. 토론과 논의를 잘 못했다고, 보고서나 제안서 하나 제대로 못 써냈다고, 프레젠테이션 한 번 죽 쒔다고, 회사 밖에서 에이전시와 협상 한번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했다고 쫓겨나진 않습니다. 동료들의 말을 잘 안 듣는 경우, 심지어는 무시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쫓겨날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쫓겨납니다. 회사에 뼈를 묻겠다느니 CEO가 되겠다느니 하는 등의 염원은 안드로메다 밖으로 날아가 버리지요.    

 

노파심에 환기시켜 드리자면, 회사는 ‘인간적’인 곳입니다. 섬세하고 자기중심적이면서도 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이 꾸려가고 있는, 무척 까다롭고 까칠하고 다루기가 만만치 않은 곳이지요. 이런 곳의 입맛을 맞추려면 말 그대로 ‘인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고 싶어 하고, 다 존중받고 대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심플한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말이지요.   

   

인지상정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다 상대방이 자기의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새로운지, 자기의 주장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지, 자기의 아이디어와 제안이 얼마나 독특하고 뛰어난지 등 자신의 목소리에 다들 귀를 기울여줬으면 하지요. 그래서인지 다들 참 열심히도 말하기와 쓰기 능력을 갈고 닦습니다. 물론 이걸 위해 읽기도 정말 많이 읽어댑니다. 분명 다 피와 되고 살이 되는 노력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이렇게 “나! 나! 나!”를 반복적으로 외쳐대고 있기 때문에 성공하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하나같이 다 자기의 말 좀 들어달라고 하는데, 남의 말에 경청할 겨를과 여력이 남아있겠어요?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진지하고 비중 있게 다뤄주길 바라면서도 남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이것만큼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저지르는 실수도 없을 듯합니다.   

  

머리도 식힐 겸 간단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컴퓨터 혹은 인터넷 하면 어떤 기업이 떠오르나요? 대부분 애플이나 구글, 네이버,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곳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만약 이 기업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앞선 시대에 더 앞선 기술과 실력을 갖춘 기업이 있었다고 하면 믿어지세요?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디지털 이큅먼트(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DEC)가 바로 그곳입니다.     


MIT 출신의 켄 올슨(Ken Olsen)과 할란 앤더슨(Harlan Anderson)이 1957년에 설립한 DEC는 1980년에 약 10만 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최첨단기술을 갖고 있던 세계 제2의 컴퓨터 회사였습니다. 그들은 1995년 말에 최초의 검색엔진인 알타비스타(Altavista)를 만들었고(구글은 유도 아니란 걸 알겠지요), 사람들이 그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이메일(다음이나 네이버 저리 가라입니다)을 이미 내부적으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MP3 형태의 개인용 음악기기에 대한 연구도 이곳의 연구센터(애플은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에서 시작됐습니다. 지금 각 분야에서 최고라고 불리고 있는 애플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도 울고 갈 회사였던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승승장구하기만 하던 회사가 폭삭 망했습니다. 대체 왜? 한번 맞춰보세요.     


[요리 가이드라인 #2] 나한테는 문제 이외에는 갖고 오지 마시오. 좋은 뉴스는 나를 약하게 만들거든. ―찰스 케터링(Charles Kettering, GM의 전성기를 만든 공학 천재)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심하게 앞서나가고 있었기에, 옆이든 뒤든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던 거지요. 물론 모든 경쟁사를 압도하는 실력을 갖고 있었으니, 돌아볼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내 방식만이 옳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DEC 중심의 문화를 지향하던 이곳은 사회와 환경,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우수한 비전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던 똑똑한 천재 켄 올슨 회장이 1977년에 했던 오만한 말을 잠시 들어볼까요? “아무도 자기 집에 컴퓨터를 두려하지 않을 것이다(There is no reason anyone would want a computer in their home).” 안타깝게도 이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요. 1960년대(80년대도 70년대도 아닌 ‘60년대’입니다)에 미니컴퓨터를 만들어냈던 DEC가 대략 어떤 길을 걸어왔을지 짐작하게 만드는 이 발언 이후 DEC는 개인용 컴퓨터 사업의 기회를 IBM과 애플에 내주게 됩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DEC는 네 번이나 PC시장에 뛰어들지만 연이어 참패를 하고 결국 1998년에 컴팩(Compaq)에 합병됩니다. 말 그대로, 공룡이 멸종된 거지요.  

   

자만심에서 우러나오는 거만함이든 오만방자함이든 유연성 부족이든, 결론은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겁니다. 절대로 무너질 리 없다고 모두가 확신했을 이 잘나가는 회사가 무너진 걸 보면 개인의 입장에서 우리도 분명 본받을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회사에서 잘나가고 있는지요? 소위 ‘자뻑’이 아닌 한 대부분 “글쎄요. 하지만 잘나가고 싶은 마음만큼은 가득이죠.”라고 나름 겸손하게 말하겠지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남의 말에 귀를 여세요. 기왕이면,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음의 귀까지 열어젖히세요. 입은 잠시 닫아둬도 됩니다. 열 기회는 쌔고 쌨으니까요.     


여기에서 중요한 건, 자신의 말만 줄이면 만사 오케이가 아니라는 것.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면 자신의 생각과 입장과 주장은 물론,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와 위상까지 깔끔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설사 옳다 해도 들어야 할 말은 듣겠다는, 그래서 바꾸거나 개선해야 할 게 있다면 과감하게 뜯어고치겠다는 겸허함과 유연함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은데, 그래서 알아내야 하고 깨우쳐나가야 할 게 수두룩한데 누가 위고 아래고 따위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나 이런 사람인데, 어떻게 네 앞에서 무릎 꿇냐?” 식의 말은 집에 가서 애한테나 하거나 절친한 지인 혹은 응석부릴 수 있는 애인한테나 하세요. 정말로 아쉬워해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리 가이드라인 #3] 모르는 것을 인정할 때를 아는 것도 영리함에 포함된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가장 많이 질문한다. 그러니 모르면 물어보라. ―세스 고딘

      

회사란 살벌한 정글에서 아무나 성공할 수 없는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입 때야 전혀 상관이 없을지 모르지만, 직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직급이 제공하는 그놈의 근엄함이란 권리(이자 의무) 때문에 다들 목이 조금씩 뻣뻣해지면서 일종의 병목현상을 겪게 되지요. 생기 넘치던 눈은 풀리면서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혈기왕성하던 입은 굳게 닫히면서 반벙어리가 되는 등 슬슬 ’연약한’ 몸짓들을 보이게 됩니다. 문제는, 그 좋던 귀는 또 어디로 갔는지 보청기로도 회복시킬 수 없을 정도의 난청, 아니 불청(不聽) 증세를 보이게 되지요. 다 ‘자리’ 때문입니다.     


“내가 말이야, 왕년에는…” “지금 나를 자네 수준으로 보는 건가? 맞먹자는 거야 뭐야?” “나 O년 차야. 그거? 이미 다 해본 고만고만한 레퍼토리지. 집어치우고 다 잊어버리라고.” 왕년에 한 따까리를 했고 솜씨가 날라 다니는 수준이고 회사에 뼈를 묻었다고 할 정도의 연차라면 더더욱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정도로 회사에서의 입지를 다진 분이라면, 책임과 의무 또한 높아져있을 게 틀림없는데 매사에 신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귀에는 직급이 없습니다. 모르면 이유 불문하고 들어야 하고, 알아도 혹시나 하는 마음 혹은 좀 더 캐내야겠다는 마음으로 한 번 더 들어야 하지요. 들어서 손해 봤다고 말하는 사람을 실제로 본 적 있나요? 제가 경험의 폭이 작아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긴, 제가 본 적이 없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제 자신을 중심에 둔 채, 주변 사람들이 제 말을 들어 100% 이익을 봤다고 굳게 믿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듣지 않는 걸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불청(不聽)이었던 제가 과거에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재직하면서 겪었던 좌충우돌이 떠오르는군요. 이미 여러 편에서 소개했듯이 저는 이곳에서도 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일에 관한 한 이미 모든 계획과 아이디어와 방향성이 제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윗사람이든 동료든 다른 사람들의 의견 자체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요. 머리가 자신 있었으니, 모든 걸 다 입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성공학의 대가인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말한 성공의 금과옥조인 ‘첫째도 경청, 둘째도 경청, 마지막까지 경청’을 저는 정반대로 활용했습니다. 즉 첫째도 내 생각, 둘째도 내 입장, 마지막까지 내 주장만 가득한 원맨쇼, 결국 첫째도 내 말, 둘째도 내 말, 마지막까지 내 말을 고수했다는 겁니다. ‘니들은 들어라, 형님은 달리련다’ 식이었다고나 할까요.    

 

눈치? 시달렸다고 할 정도로 주변으로부터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일관되고 끈질기게 안 들었다면, 다른 구성원들은 그에 비례해 일관되고 끈질기게 주의를 줬지요. 동시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제 방식에 대해 나름대로의 배려심을 갖고 조언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배려심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배려심이기는 커녕 오히려 다들 듣고는 있지만 실은 듣는 척, 공감해주는 척만 하고 있고, 그것도 부족해 제 뒷다리까지 걸고넘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렇게 꿋꿋하게 최선을 다해 듣지 않은 결과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나왔습니다. 한 2개월쯤 지났나요? 저는 팀 내에서든 팀 밖에서든 사내 대부분의 사람들과 각을 세우게 됐습니다. 제 편이었던 분들마저 점점 떨어져나가기 시작하더군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처음에 맥주를 마실 때에는 톡 쏘는 쾌감을 음미하며 맛있다고 하지만 너무 많이 들이부으면 점점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그 상태에서 더 달리면 결국 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지요. 딱 제 사례와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스톱을 외칠 때까지 저는 죽자 사자 ‘고’를 외쳐댔던 겁니다.   

  

경청에는 총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맥락적 경청, 그 다음으로 적극적 경청, 다음 수동적 경청, 그리고 누구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은 배우자(spouse) 경청 이렇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직원들은 처음에는 제 말의 맥락(의도나 감정 등의 배경)을 살피면서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주의 깊게 들으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상황이 예상보다 만만치 않다는 걸 느낀 후부터는 저에게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정도로 그 수위를 낮췄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상황이 진전되는 기미가 안 보이자 이젠 안 되겠다 싶어 저로 하여금 그냥 주저리주저리 말하도록 내버려뒀을 겁니다. 말만 가로막지 않을 뿐, 주의를 거의 기울이지 않게 된 거지요.      


그렇게 줄기차게 눈치를 줬는데도 제가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젠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영구적인 성격의 ‘귀 파업’을 벌이기로 결심했겠지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건성건성 듣게 되는, 사실상 듣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는 겁니다. 물론 파업 때 간혹 볼 수 있는 비극적인 장면도 연출됐습니다. 말을 때때로 가로막기까지 하는 일 말이지요.     


저는 제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상대방은 저의 말을 들을 거라고, 아니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더 뛰어난 설득력과 논리력을 갖고 있고, 더 많은 재능과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제 말을 들어야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일도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물론 그들로서도 결과적으로 이득을 보면 봤지 결코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던 거지요. 요컨대 제 말이 회사를 쥐락펴락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겁니다.     

이러한 마인드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저는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대표적인 밉상인 입 크고 목소리 큰 사람이 회사 안에서는 승승장구하게 되어 있지요(물론 오래 가진 않는다는 게 한계이지만). 그것도 다름 아닌 회사의 대표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어느 누구도 제 업무 스타일이나 업무방식, 나아가 업무 결과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오만방자함은 점점 더 극에 달해갔지요. 할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니, 답답함을 참다못한 동료들이 결국 선택한 것? 귀에다 자물통 채우기.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었던 셈입니다.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난다 긴다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업무 진행 및 처리가 점점 마비되었음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고립되어 갔습니다. 저를 좋게 봐주던 분들마저 다 제 곁에서 떨어져나갔을 때쯤,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가 우연찮게 찾아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기회를 마련해준 건 다름 아닌 저를 인정하고 칭찬함으로써 잘나가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파워를 마음껏 누리도록 부추긴 분, 바로 대표님입니다. 

    

제가 귀를 막고 있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들어 이미 익히 알고 있었던 그가 어느 날 저를 부르더군요. “허병민씨, 요즘 어때요? 일은 재미있나요? 업무와 관련된 새로운 소식도 들을 겸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소식도 들을 겸, 이래저래 궁금해서 불렀습니다.” 워낙 솔직한 저는 쌓인 문제도, 감정도 깔끔히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때다 싶어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렸습니다. “네. 일은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협조도 잘 안 하고 도움도 잘 안 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를 위한 것도 아니고 다 회사를 위한 건데도, 참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듣질 않습니다. 대표님도 그동안 제가 진행해온 일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적어도 일에 관한 한 실망시켜드린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자신감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생각만큼 잘 안 따라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그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얘기가 끝나고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서서히 눈을 뜨면서 딱 한마디 건네더군요. “허병민씨. 그건 말이지요, 남의 말을 들으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죽을 만큼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된다? 그럼 저에게 다시 오세요. 그때는 제가 직접 도와드리죠.” 충격을 받은 전 입이 완전히 닫혔습니다. ‘죽을 만큼’을 떠나 귀 자체를 열어본 적이 없는 제가 대표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입을 귀라고 생각해온 마당에 말입니다.   

  

사실 너무나 상식적으로 들리는 이 조언이 저에게 와 닿은 이유는, 그가 경청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왔기 때문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말단에서부터 경영층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두루두루 불러 그들의 말을 열심히 듣고 또 듣고 해왔던 건 사내 구성원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요. 단지 업무 때문에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예고도 없이 무작정 불러서 다양한 주제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걸 즐겼지요.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상대방의 독백을 들어주는 수준에 가까웠달까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묻고 듣고 추임새 넣고 다시 듣고, 또 묻고 듣고 고개 끄덕이고 다시 듣고를 반복하다시피 했습니다. 그것도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말입니다. 과연 그가 단지, 그리고 정말 뭘 몰라서 그랬을까요? 혹은 듣는 것 자체를 너무나 즐겼기 때문에? 웃긴 질문처럼 들리겠지만, 실은 전혀 웃기지 않은 질문이 여기서 나오지요. 그는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죽자 사자 들었던 걸까요?    

  

[요리 가이드라인 #4] 타인의 언어는 나의 침묵을 필요로 한다. 침묵하면서 타인의 언어를 경청할 때에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 ―김경욱(소설가)     


여러분도 이런 경청형 CEO들을 매체를 통해 종종 접하셨을 겁니다. 신입부터 관계사 CEO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간에 막지 않고 일일이 다 듣고 생각을 정리하는 심사숙고형 CEO 최태원 SK그룹 회장, 회의를 할 때 결론이 빤히 보이지만 모두가 정답을 찾도록 끝까지 다 들어본 뒤에 결론을 내리는 제프리 이멜트 前 GE 회장, 언제나 스스로에게 잘 듣고 있는지를 자문하면서 회의를 할 때 경영층이 주제와 완전히 동떨어진 얘기를 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끝까지 들어보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이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CEO들이지요. 이들은 회사 안팎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오면서 경청을 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절실히 느꼈을 겁니다.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것을 고스란히 증명해주고 있지요.    

 

자신의 현재 상황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분들 얘기라, 별로 관심 없다고요? 좋습니다. 회사를 굴리고 먹여 살린다는 거창한 논리 따위는 잊어버리고 우리들의 얘기로 돌아가 보지요.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경청을 (해야) 하는 걸까요? “내가 지금 이런 당연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어야 하나?” 당연하게 들린다면, 더더욱 잘 생각해보세요. 의외로 당연하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될 테니까요.     


경청은 남을 위해 베푸는 ‘선물’이 아닙니다. 남을 기분 좋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아부’도 아닙니다. 그건 기회가 되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기회가 나든 말든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지요.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스스로를 위해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의 얘기 또한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왜 죽도록 남의 말을 듣는지,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그러는 건지 등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나름대로 정의하고 또 정리해놓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다면 무조건 경청해야 한다’는 조언, 참 질리도록 여기저기서 많이 접하셨을 겁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지당한 얘기지요.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으니, 그건 바로 성공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입니다. 아무리 경청이라는 덕목이 다다익선이라고 해도, 그것이 설득력이 있고 공감이 가려면 성공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성공이란 게 뭔가요? 여러분이 매일매일, 아니 지금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가 뭐냐 이겁니다. 결국 승진과 인정 때문 아닌가요? 그럼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회사 안에서의 자신의 생활,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세요. 자신이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던 상황들을 하나 둘 찬찬히 떠올려보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경청하지 않았던 건가요, 아니면 경황이 없어 그럴 수 없었던 건가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나요? 아니면 상대방에게 화가 나서였나요? 이것저것 다 아니라면, 혹시 그냥 귀찮아서였던 건 아닌가요? 대체 왜 그랬던 건가요? 일에 치여 죽겠는데 혼자 따로 생각할 시간을 갖겠습니까? 지금 이 기회에 다른 거 다 제쳐두고 한번 냉정하고 정확하고 철저하게 따져보세요.  

   

성격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애당초 자신은 경청할 그릇이 못된다? 그럼 그 그릇을 조금씩 넓히면 됩니다. “그릇이란 게 어떻게 넓혀지나? 그건 태어날 때부터 그냥 정해져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하지 마세요. 까짓 거 안 하면 그만입니다. 대신, 자신이 생각해왔던 성공에 대한 정의 또한 덩달아 바꿔야 하는 수고도 감수해야겠지요. 

     

자신은 경청을 너무나 하고 싶은데 남들이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거나 이런저런 말도 안 되고 불합리한 이유로 경청을 막는다? 그럼 그 이유를 경청해보면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건 황당한 난센스이고 억지라면 귀를 막아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폐를 끼친 그 사람들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겠지요.     

 

하지만 그 이유가 충분히 말도 되고 일리도 있다면, 더더군다나 그게 일정 부분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거라면 문제되는 그 부분을 스스로 조금씩 개선해나가면 됩니다. 역시 하고 싶지 않다? 말리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 하지 마세요. 모든 일이 그렇듯 안 하면 그만입니다. 대신 유치하게 “사실 이렇게 된 건 다 삭막한 회사 때문이야. 나도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다고.”라고 둘러대지도 말 것이며, 남들이 그 이유를 경청하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지도 말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회사의 인정이 모조리 날아간다 해도 불평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회사도 나름대로의 이유를 발견한 것일 테니까요. 

    

어쩌면 제가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표가 해준 별로 놀랍지도 않은 조언에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것이 제 대학시절의 뼈아프면서도 뼈저린 경험을 리마인드시켜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시절 오랜 역사를 간직한 한 전국영어연합서클의 회장을 맡았던 저는 서클이 결성된 근본 취지에 맞게 전국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영어 서클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입 기준도 까다롭다고 할 정도로 강화했고, 다들 들어오고 나서 실력이 나아지는지 일일이 점검(사실상 검열)했으며, 상호간의 관계 자체를 영어라는 분명한 목표와 목적에 맞추도록 유도했지요.    

  

결론만 말씀드리면 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의도와 방향 자체는 너무나 좋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회원들이 단순히 영어 때문에 가입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깜빡했던(까마득히 몰랐던 건지도) 거지요. 영어는 그저 명목상의 목적일 뿐, 사실은 99% 이상이 친목 때문에 가입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놓쳤던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대다수의 바람을 정확히 인식하고 나서도 제가 제 뜻을 굽히지 않았고, 대다수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제 자신이 만들어놓은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취지에만 매달려 그들의 생각을 가볍게 밟아버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서클을 ‘말아먹은’ 저는 그 대가로 서클 역사상 최초로 공청회의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서클의 모든 회원들, 심지어는 활동한지 몇 십 년도 지난 나이 지긋한 시니어 회원들까지 ‘세기의 재판’에 관심이 있었는지 대부분 공청회장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제 입장과 생각, 그로부터 비롯된 행동들에 대한 해명 요구가 이어졌지요. 전체적인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너 이 놈, 딱 걸렸어. 이젠 네가 한 번 실컷 당해보라고.’ ‘이 서클이 자네 건가? 서클을 자네 멋대로 굴려?’ 식의 분노가 여기저기서 전달되어 오더군요.      


그제야 실감이 되더군요. 제가 그동안 무슨 일을 저질러왔는가를. 무슨 일을 해야 했고, 무슨 일을 하지 말아야 했는가를. 거기에 쐐기를 박아준 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제 머릿속에 생생히 박혀있는 다음 질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왜 듣지 않았습니까  

   

알고 보면 성공은 매우 심플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더도 덜도 말고 딱 그 정도로 혹은 그 이상으로 남의 의견을 존중하면 성공합니다. 자신이 말하는 만큼 남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면 성공합니다. 남의 말이 자신의 성공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공합니다.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전히 당장 크게 와 닿지 않는다 하더라도 들을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들어서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성공에 관한 한 ‘싹수가 노랗다’는 것.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남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 고액의 연봉을 벌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말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단물만 쪽쪽 빨아먹겠다는 도둑놈 심보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 사람들은 바보가 아닐뿐더러,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게 돌아가지도 않지요.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남의 얘기를 듣지 않으면 남도 나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남이 나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어떤 과정을 거쳐서든 일에 지장이 생깁니다. 일적인 면에서만 지원군을 잃으면 다행이련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적인 면에서마저 지원군을 잃게 되지요. 회사에서 짬밥을 좀 먹어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일만 잘한다고 해서 인정받을 수도 없고 반대로 인간적으로 괜찮다는 평만 듣는다고 해서 인정받을 수도 없습니다. 일도 잘하고 평판도 좋아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바로 경청이라는 덕목입니다.     


[요리 가이드라인 #5] 대중에게 다가서는 지름길은 그들에게 혀를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귀를 내미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달콤한 말을 한다 해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자기가 말하고 싶어 하는 얘기의 절반만큼도 흥미롭지가 않은 법이다. ―도로시 딕스 

    

사람은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자기의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남이, 남의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청이 쉬워 보이면서도 진정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를 떠나 사람들은 100% 다 자기중심적(이기적이란 말과는 엄연히 다릅니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말이 항상 최우선에 놓여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한 것처럼 “의사소통이 가지는 문제는 그것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착각이다.”란 생각을 잠재적으로 다 갖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성공을 가로막는 가장 일반적이고도 대표적인 증상이지요.    

  

의사소통을 완성해주는 건 우리의 입이 아닙니다. 의사소통을 완성해주는 건, 다름 아닌 우리의 귀입니다. 귀는 의사소통만 완성해주는 게 아니라 우리의 관계를 완성해주고 우리의 일을 완성해줍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성공을 완성해줍니다. 시나리오 플래닝(Scenario Planning)의 대가인 네이피어 콜린스(Napier Collyns)가 한 워크숍에서 한 말이 이 모든 걸 수렴하고 또한 정리하는 힌트를 제공한다고 생각하기에 여러분께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그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걸 그는 3L이라고 부릅니다.      


Listen  Learn  Love  

   

이 단어들을 여러분 자신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해보세요. 성공을 간절히 원한다면, 남을 사랑하고 남으로부터 배우고 남의 말을 경청하라는 말로 풀이되지 않나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남이 자기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이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건 뭐 생각만 해도 아주 괴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지 않은지요?  

    

[요리 가이드라인 #6]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서 1:19    

 

사실 곰곰이 따져보면 여기에 나와 있는 단어들이 결국 다 같은 뜻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으로부터 들으려면 배우고자 하는 자세와 더불어 남에 대한, 일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배운다는 건 또 듣는다는 말이며, 배우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열의를 내포하고 있지요.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사랑이 없이는 들을 수도, 배울 수도 없습니다.   

  

성공을 하고 싶으세요? 그럼 사랑하듯이, 배운다는 자세로, 열심히 들으세요. 경청(傾聽)이란 단어에서 청(聽)이란 글자를 따로 떼어내 풀이해보면 ‘왕(王)의 말씀을 듣는데(耳) 열(十)의 눈(目)과 한마음(一心)이어야 한다’는 뜻이 나오는데, 이런 마음으로 듣는다면 성공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경청의 세계에서는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따위의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 부디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명셰프의 30초 요리팁 | 토마스 쯔바이펠 前 스위스컨설팅그룹 CEO     

“듣기만 잘해도 성공한 CEO가 될 수 있습니다. 가슴이나 어깨 근육처럼 듣는 근육도 훈련을 하면 할수록 발달하지요. 그러니 주의해서 잘 들으세요. 그러면 성공을 위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무수히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명셰프의 습관 | 제프 킨들러 前 화이자(Pfizer) 회장

“저는 틈만 나면 듣습니다. 매일 10개의 1센트 동전을 왼쪽 바지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서지요. 한 명의 직원과 대화하고 그의 고민이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었다는 생각이 들면, 왼쪽 주머니에 있던 동전 하나를 오른쪽 주머니로 옮깁니다. 매일 하루를 보낸 후 왼쪽에 있는 10개의 동전이 모두 오른쪽 주머니로 옮겨가면, 제 자신에게 '100점'이라는 점수를 줍니다.” 


『닥터쿡, 직장을 요리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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