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의 부재를 상상해 봐

by 피아노래

예술은 상상에서 비롯된다. 이상향을 다룬 유토피아는 언제나 우리의 단골 공상 소재이지만, 요즘은 디스토피아도 꽤나 자주 다뤄진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의 작품들은 전체주의의 통제 아래 점점 상실되는 인간성을 보여주며, 이는 언젠가 올 수 있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엄중한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 끔찍한 미래에 대해 최근에 경험한 전 지구적 전염병을 통해 이미 큰 값을 치르고 예습한 셈이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현장이었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당연했던 것들’의 부재를 실감했다. 자유로운 만남과 모임이 제한되고 일상이 통제되는 것들을 경험하며, 한동안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간절히 꿈꿨다. 아마도 ‘대체제가 없을‘수록, 또 ‘오랜 기간 동안 누린 것’일수록, 그 타격은 훨씬 컸을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속상했던 장면은, 원치 않는 감염으로 인해 ’함께’ 준비했던 일들에 누를 끼쳐야 했던 순간들이다. 코로나의 한복판을 지나던 시기에는 감염자 혹은 밀접접촉자가 되는 순간, 그는 모든 일에서 배제되고 격리됐다.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나 조건이 없다면, 그 일은 중단되거나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프로젝트는 멈추고, 원망과 불안이 반복되던 쓰라린 경험이다.


이런 거대한 전 사회적 결핍은, 오래전 서울의 한 귀퉁이에서 내가 느꼈던 작은 부재의 기억을 소환했다.




서울에서 첫 자취를 시작한 곳은 석관동의 한 옥탑방이었다. 룸메이트와 함께 3년, 나 홀로 3년을 살았던 그곳은 무척이나 낭만이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얇은 벽체로 지어진 가건물이라 여름엔 참을 수 없이 덥고, 겨울엔 엄동설한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한 겨울에 일을 마치고 한기가 그득한 집안에 들어서며, ‘그동안 내가 집에 들어갈 때 따뜻함을 느꼈던 것은 가족들 중 누군가가 미리 와서 집을 데워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았다. 독립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며 지내다 가족들의 부재를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나의 부모는 실로 대단하다.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시간이 지나며 그 위대함이 배가되어 느껴지곤 한다. 며칠 전에는 엄마가 지어준 아침 식탁의 두부 반찬이 쉬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직 손을 대기 전, 아빠가 먼저 드시다가 뱉으시고는 입을 닦으며 했던 첫마디는 “내가 먼저 먹길 잘했다.”였다. 그리고 장성한 아들이 끼니를 제 때 챙겨 먹지 못할까 늘 걱정인 엄마는 내가 집에 가는 날이면 퇴근과 동시에 숨 돌릴 틈도 없이 요리를 준비하신다. 항상 가족이 우선인 두 분의 삶은, 부모의 케어가 필요했던 미성년의 시절을 지나 병장이 돼서도 다음 휴가가 언제냐 묻고 기대하던 눈빛에서, 매 밥상마다 아들의 어제의 삶과 오늘의 일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대화에서 짙게 묻어난다. 이렇게 부모의 위대함을 체감하는 수위가 더욱 짙어질수록, 내가 부모가 되면 저 모습의 발끝은 쫓아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H.O.T. 3집에 실렸던 강타의 자작곡 <빛>의 첫 가사는 이런 노랫말이다.

“늘 함께 있어 소중한 걸 몰랐던 거죠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준 소중한 사람들을”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들의 부재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대가 없이 주어진 것들을 당연시 여기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소중하다 ‘는 감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실로 필요한 것은 일상 속의 ‘특별한’ 선물이 아니라, 늘 곁에 있어 무뎌져 버린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선물을 받았을 때 느끼는 기분 좋음보다는, 당연한 것들의 부재에서 느끼는 상실감이 훨씬 크지 않을까?


오늘 마시는 물과, 공기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보자.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소중한 그대여. 나와 함께 해서 고맙다”는 낯간지러운 말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