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음악을 ‘듣는다’기보다 ‘틀어놓는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언제부터였을까. 나에게 음악이 이렇게 쉽게 소비되는 존재가 된 건.
인류가 음악을 향유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기술의 진보와 궤를 함께 한다.
에디슨이 유성기를 만들기 이전까지 음악은 ‘지금, 여기’에만 존재하는 예술이었다. 음악은 철저한 Live의 예술이었고, 연주자와 청자는 한 공간 안에서만 존재했다. 어떤 음악은 음악가를 후원하던 귀한 신분들만 누리던 고오급 취미생활이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민중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노동요와 같은 형태들도 있었다. 물론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연극의 기원처럼 제의에서 출발한 종교적 음악 혹은 공동체의 축제에서 비롯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엇이 됐든 이 시기에는 음악을 ‘저장’한다는 생각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19세기말, 비로소 소리를 ‘박제’할 수 있는 시절이 도래했다. 앞서 언급한 토마스 에디슨의 유성기의 개발이 그 시발점이다. 이후에 음악을 저장하고 재생할 수 있는 디바이스가 다양한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에디슨만큼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에밀 베를리너라는 발명가에 의해 축음기가 개발되고 여기에 재생시킬 원형 디스크가 처음 만들어졌다. 여기서 만들어진 축음기의 이름이 그 유명한 ‘그라모폰’이다. (우리가 아는 DG, 도이치 그라모폰의 그 그라모폰이 맞다.)
이보다 한 단계 진보한 형태인 디스크 LP(Long Play Record)가 나오면서 우리가 아는 ‘앨범’의 형태가 가능해졌고, 필립스에서 개발한 카세트테이프와 소니가 개발한 워크맨을 통해 ‘들고 다니는 음악’이 실현됐다. 이후 음악도 디지털의 영향을 받으며 음질의 손실이 거의 없는 CD가 등장했다. 내가 학창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디바이스는 바로 이 CD와 CD플레이어였다.
디지털과 인터넷이 등장하고, 파일을 공유하는 것이 원활해지면서 등장한 MP3와 공유서비스로 인해 음반시장은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포터블 기계들이 등장하며 수백, 수천 장의 CD를 손바닥만 한 기계에 넣고 보다 더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제 사람들이 요즘 가장 많이 이용하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전환되고, 한 발 더 나아가 AI가 적용되면서 내가 골라서 듣는 음악을 넘어서 ‘큐레이션’해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나 역시 있다.
살펴본 것처럼 음악이 변천하는 것 이상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법 역시 다양한 변화를 이뤘다. 그 변화를 경험하며 내가 느끼는 음악감상의 아쉬움은 어느 순간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현대인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눌 때뿐 아니라 운동할 때도 음악을 듣는다. 물론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때 듣는 음악들은 대부분 순간의 정서나 무드를 반영하거나, 공백의 심심함을 채우려는 시도들이다. (물론 요즘은 영상 콘텐츠의 범람으로 음악이 잠시 그 자리를 내준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각적 자료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은 다시금 음악이라는 온화한 자극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어릴 적 용돈을 모아 갖고 싶은 음반을 사면 소중하게 비닐을 뜯어 뚜껑을 열고 처음 맡았던 그 냄새가 참 좋았다. 그리고 케이스에서 처음 CD를 꺼낼 때 그 뻑뻑한 느낌과, ‘자켓’ 혹은 ‘부클릿’이라고 부르던 앨범 커버와 내지를 꺼내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던 순간이 어쩌면 이 음악을 감상하는 첫 단추였다. 앨범단위로 음악이 나오던 시기의 가장 커다란 장점은 바로 이 아트웍이 아닐까 싶다. 이 앨범이 어떤 컨셉과 이야기로 만들어졌는지 아티스트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 해설지 같은 느낌이었다. 앨범의 제목과 자켓사진, 그리고 가사들을 하나씩 곱씹으면서 음악을 여러 번씩 들었다. 작곡, 작사는 누가 했는지 뿐 아니라 연주자, 포토그래퍼, 스튜디오 작업은 누가 했는지까지 꼼꼼하게 보면서 대부분의 앨범 끄트머리에 있던 ‘Thanks to'를 읽으며 내가 나중에 앨범을 내면 누구 이름을 적어야 할까 상상도 해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모았던 CD들을 지금은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우선 CD를 재생시킬 CDP를 찾기 힘든 탓이고,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손쉽게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함께 음악을 열성껏 들었던 이들도 언젠가부터 SNS에 소장한 음반을 나눌 테니 가져갈 사람을 찾는다는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내겐 참 씁쓸한 풍경이다.
사전에 보니 ‘감상’이라는 말이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감상(鑑賞): 주로 예술 작품을 이해하여 즐기고 평가함.
작품을 즐기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평가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야 말로 비로소 ‘감상’의 차원에 올라간다는 의미로 읽힌다.
셰프 안성재가 요리에서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듯, 음악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의 쏟아낸 수많은 시간과 선택, 고민이 담긴 결과물을 단순한 배경음으로 흘려보내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음악을 ‘감상’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이 글의 요지는 음악을 만들거나 듣는 것이 우리에게 ‘심각한’ 수위로 다가와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술의 문턱이 낮아지고, 일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 많은 것은 두 팔 벌려 환영할 이야기다. 다만, 음악이 단순히 소비되는 형태를 넘어서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좋겠다. 창작자의 의도와 지향이 감상자에게 오롯이 전달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