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뒤엉킨 취향

추리소설, 교과서, 건축, 자기계발서, 인문서, 에세이 그리고?

by 서은

중학생 때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나는 도서관도 서점도 없던 시골 마을에 자랐고 학교 도서실이 유일한 나의 서재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하게 지내던 조용하고 얼굴이 하얗던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우리의 우정을 과시하듯 본인의 손가락에서 엄마가 준 은가락지 두 개 중 하나를 빼서 나에게 선물했다.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에 하나뿐인 중학교로 함께 진학했다.


그 친구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 둘은 학교 도서실 청소를 담당했고, 청소 시간이 되면 수돗가를 지나 도서실로 달려가 간단하게 청소를 하고 서가를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추리소설에 빠져 어떤 책이 재미있는지 이야기를 하고 다음에 대출할 도서를 미리 점찍어 놓았었다.


여느 날처럼 청소를 하고 우리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친구가 서가를 오가다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나는 이 책 냄새가 너무 좋아. 오래된 종이냄새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대고 "나는 도서실만 오면 배가 아파. 이 차가운 공기가 자꾸 나를 화장실로 가게 만들어." 우리 둘은 큰 소리로 깔깔 거리며 웃어댔다.


나는 아직도 그 도서실의 차가운 공기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처럼 차가운 도서관 서가에 가게 되면, 여전히 배가 아프고 화장실로 향한다. 그리고 높은 창에서 들어오는 주황빛 햇볕에 먼지가 뿌옇게 보이던 그때 그 도서실이 생각난다.




중학교를 졸업 후 그 친구와 나는 주변 큰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연합고사를 보고 친구는 고향으로 가기 제일 편한 위치에 있는 학교를 1지망으로 선택했고, 나는 언니의 교복을 물려받아야 해 언니가 다니던 학교를 1지망으로 선택했다.


우리는 각자 1지망의 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관계에 소원해졌던 우리 둘은 고등학교 때부터는 자연스레 더 이상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이해찬 1세대 교육정책의 실패로 우리 지역은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이 부활했다. 3년 동안 0교시 시작인 아침 7시 20분부터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보냈고, 주말이나 방학엔 보충학습을 위해 학교에 등교했다.


남들이 보기에 별 재미없어 보이겠지만, 그 안에서 눈곱만큼 작은 일탈을 섞어가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스스로 이만하면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고등학교 시절은 수학과 물리에 빠져 다른 과목은 놓아버리는 훌륭한 학교 생활을 했다.


자연스레 추리소설 대신 교과서와 문제집과 친해졌고, 고등학교 도서실 방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학교 도서관은 서가에 햇볕이 많이 들어와 정말 따뜻했다. 더 이상 서가에 가도 배가 아프지 않았다. 대학생 때는 자연스레 전공 관련 건축을 좋아했다.


집에서 통학하던 내 친한 친구들은 도서관 잡지 코너에 가면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서가보다 한 단 더 높고 유리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다. 친구들을 찾으러 도서관에 가면 유리 큐브 안쪽 둥그런 테이블에 엎드려 통학으로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그곳에서 만나 건축 잡지를 보면서 시시덕거렸다. 그리고 여행책을 꽤나 읽었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쓴 책, 그리고 여행 가는 방법에 대해 쓴 책 등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갈 수 없어서 더 갈증 났던 걸까? 언젠가 나도 유명한 건축물을 보러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여행책을 좋아한 것 치고 남들 다 하는 해외여행 한번 가보지 못했고, 나도 언젠가 내가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리라는 꿈을 꾸면서 대학교 생활을 마무리했다.




사회에 나와 한동안 내가 나온 대학교가 콤플렉스였다. 사회 초년생 시절. 인지도 낮은 대학교를 나온 죄로 면접관이 하는 질문에 내가 나온 대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설명해야 했고, 입사 후엔 신입인 나에게 출신 학교를 물어보는 회사 사람들 때문에 한동안 괴로웠다.


차라리 국립 대학교를 갈 걸 그랬어. 원하던 대학교가 아니었더라도 인서울을 할걸. 사회 초년생 시절, 내가 했던 선택은 한동안 후회에 잠식돼 있었다. 대학교 동기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한 친구는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자 학벌을 세탁을 하러 간 거냐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스스로 증명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었을까? 나는 학벌 따위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고 싶어 온갖 자기계발서를 읽었다.


그리고 관심 있던 철학이나 미술사 관련한 인문 서적과 천체나 물리에 관한 과학 서적도 읽었다. 그런 책을 완독 하면 내가 한층 더 성숙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어느 순간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았다.




이직한 회사에서 대학교 친구의 전 직장동료를 만났고 우리는 점심을 같이 먹고 산책 겸 서점에 갔다. 그 친구가 어떤 책을 좋아하냐며 나에게 물었다. 책과 멀어진 내가 선 듯 대답을 하지 못하자 본인은 에세이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에세이? 한 번도 관심 가진 적 없던 분야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화가 종료되었다. 우리는 서점을 조금 더 둘러보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그 후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 독립서점을 알게 됐다.


그리고 독립서점에 주로 있는 에세이를 접하고, 자연스레 읽게 되었다. 몇 년 동안 끊겨 있던 책 읽기가 아주 조금씩 다시 시작되었다. 어렵고 읽기 힘든 책만 책이라고 여겼던 나는 술술 읽히는 에세이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하고 동경했던 직업에 대한 에세이가 내 마음을 끌었다.


이런 내 뒤엉킨 취향을 반영한 내 서재에는 어떤 책들이 있을까? 이제 추리소설과 자기계발서는 빠졌지만, 아직도 여러 종류의 뒤엉킨 취향을 반영한 책들이 내 집 군데군데 있다.


다시 책에 관심이 가게 된 나는 그때그때 관심 가는 종류의 책을 사서 집으로 옮겨놓고 있다. 페소아의 말처럼 책을 읽지 않기 위해 책을 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책이 좋아서 내가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샀지만 아직도 읽지 않은 책이 산을 이루고 있다. 이제 그 산을, 다 읽은 산으로 옮기며 여기에 기록해 보려 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