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었어 #5

마지막이길 바라지 않는 산티아고 순례길

by 서은

화살표가 없어 되돌아온 팍. 길을 잃은 전적이 있어 구글 지도를 켠 우리. 우리가 길을 찾고 있는 걸 눈치채셨는지 길 건너편에 있는 할아버지가 스틱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마지막 날은 화살표 대신 할아버지의 스틱 끝을 믿고 시작한다. 첫날처럼 화살표 대신 순례자가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팍은 길을 잃어도 함께 잃는 거니 괜찮다며 대수롭지 않게 우리와 걷는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길을 잃어도 조금 돌아가면 된다. 둘보다 셋이 낫겠다.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조금 길을 헤매도 괜찮은 날이다.


마지막 날인 만큼 어느 때보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길을 걷는다. 거의 다 왔는데 괜히 카페에 들어가서 치즈 케이크를 사 먹는 여유를 부린다. 여정 내내 날씨의 운이 좋아 비를 만나지 않았는데 마지막 길에서는 부슬비가 내려 판초도 꺼낸다. 준비해 온 판초까지 쓰니 완벽한 순례길이다. 오늘은 하염없이 늦게 도착하고 싶은 날이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마지막 언덕 위에서 한참을 쉬었다가 간다. 저 멀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보이고 이 길을 내려가면 우리의 순례길도 끝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들어서니 사람들에게서 향기가 난다. 화장품 냄새인지 향수 냄새인지 알 수는 없지만, 14일간 땀 냄새와 자연의 냄새만 맡던 나는 지나치는 사람마다 내뿜는 작은 향기에도 코를 벌름거린다. 아직 성당에 가려면 이십 분은 족히 더 걸어야 하는데 목표를 이뤘다는 사실보다 이 도시의 향기에 설렘이 증폭된다.


드디어 길의 끝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뒤 골목으로 들어가니 종소리가 나를 안내한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광장으로 들어간다. 벅찬 감정을 주체 못 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 서로를 얼싸안으며 토닥여 주는 사람, 조용히 자신만의 감상에 젖은 사람, 성당 앞 광장에는 도착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어디에서 왔든, 어떤 길을 걸었던, 어떤 방식으로 왔든, 얼마나 오래 걸렸던, 모두의 목적지는 이곳 하나이다. 나는 광장 끝에 앉아 몰려들어 오는 사람들의 기쁨을 함께한다.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느지막이 눈을 떴다. 게으르게 나와 근처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켰다. 엄청난 크기의 샌드위치와 에스프레소 투 샷이 나왔다. 카페에 갈 때마다 작은 크기의 커피가 아쉬웠던 나는 메뉴판에서 커피 라지사이즈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문을 했는데 에스프레소 투 샷이 나왔다. 뜨거운 물을 시켜 조금씩 부어가며 마셔도 독약같이 진한 커피가 줄어들지 않았다. 한국을 떠난 지 3주가 다 되었는데 아직도 아메리카노 하나 제대로 시킬 줄 모른다. 카페마다 메뉴가 어찌나 다양한지, 맨 위에 아메리카노가 있는 한국 메뉴판이 그립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어느 순간 이 길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랐다. 무엇 때문에 갔는지 답은 찾지 못했지만, 굳이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 무언가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여기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 그들이 나리와 나의 영원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지고 왜곡되겠지만 가능한 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나에게 남은 것은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페스텔라가 아니고 걸으며 봤던 풍경과 사람들이다. 우리는 순례길을 마무리하고 포르투갈로 여행을 갔고, 서점에서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길에 관한 책을 샀다. 언젠가 순례길을 다시 가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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