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었어 #4

산티아고 순례길 화살표 위에서 찾은 내 인생의 화살표

by 서은

오래전 친구와 한 달간 유럽 여행을 한 적 있다. 절친한 사이라 자부했지만 여행하면서 받은 작은 상처를 방치했고 여행 후 그 친구와 이별했다. 그 친구가 하는 모든 말에 날을 세워 반응했다. 나와 같지 않은 마음인 것 같아 서운함이 가득했지만 그게 진실일까, 마음 터놓고 대화도 못 했다. 여행이 끝날 때쯤엔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해져 이해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십 년이 지났지만, 그 성향이 어디 갈까? 하지만 이런 성향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면 반쯤 성공한 거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여행은 다른 의미로 잘 해내고 싶었다.


어느 순간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고 노란 화살표도 나타나지 않는다. 구글 지도를 켜보고 나서야 우리가 제법 다른 길로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원래 걸어야 하는 것보다 한 시간이나 더 걸어야 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에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우리 둘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구름 아래, 하늘 아래 서 있게 됐다.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면 이 풍경도 우리 것이 아니었겠지? 아름다운 것들이 짜증 났던 정신을 맑게 해준다. 우리는 잠시나마 풍경이 주는 안위를 품고 화살표를 찾아 다시 걷는다.


포도주를 만드는 포도밭이 가득하다. 낭만적이다. 바닥에 밤송이가 가득하다. 등산화가 내 발을 지켜준다. 소똥 밭이다. 소똥을 피하느라 발이 바쁘다. 그런데 물기 가득한 그늘에서 만난 소똥 냄새는 피할 수가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미줄이 떠다닌다. 거미줄을 치우느라 두 손이 바쁘다.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몸에 걸린 거미줄과 함께 한참을 간다. 순례길은 짧은 인생 같다. 낭만적이었다가 가시에 찔리지만 이겨낼 수 있고,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피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또 애써 외면하지만,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어떤 선택을 할 때 지나치게 신중하지만, 선택 후에는 무모할 정도로 밀고 나간다. 그것이 신념이든 마음이든,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쏟는다. 그래서 선택의 실패 시 크게 좌절한다. 내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되돌릴 수 없는 바닥까지 가야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꽤 미련하다. 어떻게 이런 인간으로 설정된 것일까? 순례길에서 잘못된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 지나간 것을 웃으면 보낼 수 있는 마음을 배운다. 이것을 덜 주고 덜 받는다고 치부하기엔 아쉽다. 조금 더 유연한 사람이 돼가고 있다.


이른 시간에 눈을 떠 오랜만에 해가 뜨기 전에 길을 나선다. 밖으로 나가니 도시가 안개로 가득 차 있다. Portomarin. 물기 뿜는 이름을 가진 도시이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얼굴과 머리에 물이 송골송골 맺힌다. 안개를 담고 싶어 카메라를 꺼냈는데 렌즈에도 물방울이 맺힌다. 열 걸음 앞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한 걸음 가니 조금 더 멀리 보인다. 열 걸음 앞으로 가면 열 걸음 더 먼 곳이 보인다. 답 없는 내 미래에도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두려움을 이겨내고 한 걸음 가면 한 걸음만큼 더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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