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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클공장 노동자 Sep 14. 2021

1.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피클을 팔고 싶어요.

여성회관에서 창업 상담을 받았다.

좀 더 자세한 신분을 밝히자면 식품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었다.

회사란 정해진 틀이 있었고 디자이너는 그 틀에 맞춰서 작업해주면 되는 거였다. 그 틀은 보통 마케팅팀에서 만들고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전 회사에서는 디자이너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란 쉽지 않았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렇듯 나 역시도 나만의 브랜드가 갖고 싶었는데 그 욕구가 회사를 다니며 더욱 커졌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몽땅 담아낸 내 브랜드. 그 욕구를 피클 공장에 담고 싶었다. 피클을 팔아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보다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 중 최상위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가 가장 컸다.


식품업계에 잠깐 몸을 담그면서 분위기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식품을 만들어 팔려면 어딘가에 신고를 해야 한다거나 허가를 받아야 한다던가 하는 분위기. 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고 어디다가 물어봐야 할지도 몰랐다. 국가에서 창업 지원을 해준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그것이 어떤 기관인지는 또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여자고 엄마도 여자라 무작정 전화했던 곳은 여성회관 창업지원팀. 약속 날짜를 잡고 상담을 진행했다.


여성회관에서 창업 컨설팅을 해주는 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업종과 대략적인 내용을 상담을 통해 파악한 후 관련 전문가와 연결해주는 방식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지역창업지원센터에 연결해주었고 상담 약속을 잡은 뒤 방문했다.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잔뜩 적은 메모를 들고서 말이다.


"수제 피클을 온라인으로 팔고 싶은데요."


이 한 문장을 듣자마자 창업지원센터에서는 '신사업창업사관학교'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아이템이 그 사업과 잘 맞을 거라고 해주셨다. 말 그대로 새로운 아이템으로 창업을 하려는 사람에게 정부가 재무, 마케팅, 운영, CS 등 창업에 필요한 교육을 실시하고 점포 체험 후 소정의 지원금을 주는 사업이었다. 지원금은 대출이 아니라 지원이기 때문에 내가 망한다고 해서 갚지 않아도 되는 사업이라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신사업창업사관학교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적어보겠다.) 문제는 신청 마감이 당일 오후 6시였고 상담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설상가상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향해야 했던 나는 오후 6시 비행기를 탔어야 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4시간 남짓. 그 안에 모든 서류와 사업계획서를 준비해야 했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챙기려니 사소한 것에서 계속 부딪혔다. 갑자기 사업계획서는 또 어디서 나오나? 대학 시절 몇 시간 뒤 제출해야 할 레포트를 새벽에 쓰던 그 초인적인 힘을 끄집어내어 작성하기 시작했다. 온갖 현란한 미사여구와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문구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온 힘을 쥐어 짜내 서류를 완성했다. 그리고 공항 와이파이로 제출 완료.


며칠 뒤 서류 합격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대학원 수업으로 원활한 참여가 힘든 나 대신 엄마가 신사업창업사관학교에 참여하기로 했고 엄마가 면접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최종 합격. 우리는 정말 운이 좋다고 어떻게 이런 좋은 사업을 알게 되어 마침 마감 전에 신청을 넣었고 합격까지 할 수 있었는지 서로의 운을 감탄하며 기뻐했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그렇게 갑자기 사업가의 길로 쑥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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