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슬기로운 직장 생활
아침 출근길에 비보호 좌회전 신호를 받고 속도를 냈다. 속도를 내는 나를 반대편 직진 차량이 보고는 하이빔을 쏘며 경고했지만 신호가 바뀔까 봐 그대로 좌회전해 버렸다.
"아, 정말 미안해요!"
브레이크가 아닌 액셀을 밟다니. 돌았구나, 너.
정지선에 서서 다음 신호를 기다리면서 어찌나 자책이 되던지 상대방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좀 더 안전하게 운전해야지, 어째서 그런 걸까 상심한 채 있는데 길게 늘어섰던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2차선에서 쏜살같이 달려온 차가 내 앞으로 쏙 들어왔다.
"하.. 저런 얌체를 봤나. 야! 여기 줄 선 차들은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줄 서서 기다리냐! 이 &@$%!@$"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도로에서는 정말 신박한 도라이를 하나둘 보는 게 아니다. 보통은 저런 미친놈. 하고는 제갈길을 간다. 사실 오래 기억하지도 않는다. (아주 정말 완전히 돌아버린 차가 아닌 이상) 그런데도 비보호 좌회전에서 속도를 낸 나의 자책은 끝을 모르고 길어졌다.
저렇게 룰루랄라 남에게 민폐 끼치고 다니는 차들은 지들이 민폐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되려 자기는 이렇게 밀려있는 차들 사이로 쏙쏙 잘 다니는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생각하겠지.
가끔은 그런 뻔뻔함이 부럽다.
(*절대로 절대로 오전의 내가 한 실수가 별문제가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심한’ 자책에 대한 얘기예요. 다시는 보호 좌회전에서 직진 차량보다 먼저 가지 않을 것입니다!(반성좌))
회사에서 만난 A가 그랬다. 재택근무가 이어지던 코로나 시절, 메신저에 줄줄이 올라오는 업무 계획 뒤로 "기프티콘 증정"을 적어낸 그. 나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메시지를 후배가 알려주었다. 다시 올라가 보니 정말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선배님, 정말 저 사람 너무하지 않아요? 어떻게 하루 주요 일과가 거래처에 기프티콘 사서 보내는 것(당연히 핸드폰으로) 일 수가 있어요? 어제는 '거래처와 통화'를 적어냈더라고요. 팀장님은 저걸 왜 그냥 두고 보시는 거래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기프티콘을 손수 만들어서 주는 걸까. 아니면 뭐, 기프티콘을 기차 타고 가서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걸까? 도대체 뭘까. 그걸 좀 그럴듯한 말로 풀어쓰지도 못하나? 어쩜 저렇게 멍청할 수가 있을까.
입빠른 후배는 이 사실을 회사 곳곳에 알렸다. 이내 그가 하루 주요 일과로 '기프티콘 증정'을 적어낸 일은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년 뒤, 파트장으로 승진했다.
회사가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곳인지를 얘기하자면 아마도 밤을 새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일을 잘하는 직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는 면도 있다. 그 보상보다 다른 쪽의 보상이 더 커서 문제지.
이렇게 뻔뻔하고도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뒤에서 부지런히 열일하는 직원들은 대개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착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개 마음이 여리고 착해서 부당한 업무 지시에도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곪아서 퇴사해 버리거나 포기해 버리게 된다.
한 번은 타 팀에서 우리 팀으로 전배를 오게 된 B차장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일이 있다. 유명한 무능력자라는 것이다. 사람은 나빠 보이지 않는데, 무슨 사정일까 싶었다. 나는 이내 그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말로 보통 무능력한 것이 아니었다. 팀장 역시 그의 무능력이 걱정됐는지 그의 업무를 보조할 사람으로 하필이면, 쓸데없이 높은 도덕성과 책임감을 가진 나를 택했다.
한 차례의 미팅에서 바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하길 원했다. 아무런 자료도, 대책도 없이 입으로만 떠벌리는 그를 보며 나는 조용히 수첩을 덮었다.
"팀장님, 잠시 면담 요청 드립니다."
그와 내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내 말에 팀장은 황당해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건조한 말투로 회의를 해 보니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팀장은 참으로 무책임(!)하게도 그럼 네가 자료를 준비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울화가 치밀어서, "제가 왜요?"라고 물었다. 울그락불그락 얼굴이 붉어지는 팀장에게 "팀장님,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차장님 업무를 '대신'하라고 지시하시는 거 정말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저는 지금 집에 가서도 편히 쉬지 못할 정도로 거래처 전화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런데 고작, 이런 일을 '차장급'이 감당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말이 되나요? 제가 업무 리스트 봤는데, 업무 난이도가 높지 않습니다. '차장급'이면 당연히 하실 수 있어야 하는 일이에요."(끝에 약간 소리를 지른 것도 같음)
자르려면 잘라라 에라 모르겠다 내질러 버렸더니 팀장은 자리로 돌아가 나에게 현재 진행 중인 업무 리스트를 달라고 했다. 모자란 놈. 지금 업무를 리스트로 받아서 나를 쪼겠다는 거냐?
옳다구나, 그간하고 있었던 일을 적어서 냈더니 차장과 공유하고는 더 이상 그 일을 시키지 않았다. 지들이 봐도 많긴 많아 보였나 보다.
회사란 본래 불합리한 곳이지만, 알면 알수록 뻔뻔한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구조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일이 넘치다 못해 주말이며 퇴근이며 가릴 것 없이 일하다 지쳐, '도저히 못합니다.'하고 나서도 찝찝하고 죄책감이 드는 건 내 쪽이지, 뻔뻔하게 자기 일을 맡긴 사람이 아니었다.
대단한 일인 양 여기저기 입으로만 떠들어 놓고는 팀원들을 몽땅 데리고 가 고생시킨 차장은 무겁게 짐 나르는 팀원들을 보며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했다. 이 난리통에 노트북으로 할 일이 무언가 하고 슬쩍 봤더니 괜한 PPT 화면만 켰다, 껐다 하는 거였다. 짐 나르기 싫으니 그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욕할 기운도 없고, 회사란 책임감 강하고 착한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인 물 꼰대가 생기는 것인가. 좋은 사람들은 버티질 못한다.
내가 배울 점이란, 물론 책임감과 도덕성이 결여된 태도와 마음가짐까진 아니겠지만, 적당히 덜어낼 필요는 있겠다. 나의 책임감과 죄책감은 늘 지나치다.
저렇게 뻔뻔한 사람들은 잘도 즐겁게 다니는데 착하고 선한 사람들만 들볶일게 뭐람. 오늘은 나도 조금 뻔뻔해져 보련다. 쓰다 보니 결론이 내가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것처럼 들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