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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이 밥 먹여 주진 않거든

06. 슬기로운 직장 생활

시원시원한 성격이 나와는 달라(...) 좋아하는 후배가 연락을 해 왔다. 한창 취업 준비 중인데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져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우울하다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 바깥세상이라면 누구보다 혹독하게 겪어 본 터라 괴로워하는 후배가 안쓰러웠다.


자고로 면접이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바들바들 떨며 어떻게 하면 나를 좀 잘 봐줄까 어필해야 하는 자리 아니던가. 이미 답은 정해져 있지만 정해 놓은 답을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는 안 된다.


"저는 누구보다 상사들의 말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동료들과도 무난하게 잘 어울려 지낼 것입니다.
저는 한번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저세상 똑똑이입니다.
아마 한 달이면 업무에 투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뽑아 주십시오!!!!"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패기 있게 말했다가, 아닌가 싶어서 납작 엎드려도 봤다가, 살짝 부풀려도 봤다가, 한없이 겸손하게도 해 봤다가 온갖 방법을 다 써 봐도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나중에는 서류전형 불합격쯤이야 신경도 안 쓰게 되었다. 그러나 면접은 확실히 달랐다. 상처가 남았다. 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대체 왜 내가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넌 아니라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들의 마음에 들 수 있는 건지 이유도 방법도 모른 체 매번 '죄송하게도, 귀하를 모시기 어렵게 되었습니다.'를 받게 되면 자존감이 남아나기 어렵다. 암, 그렇고 말고.


세어 보니 30개에 가깝게 지원하고 20개 가깝게 면접을 본 것 같다. 마지막까지 진을 빼고 빼고 또 빼다가 그래, 차라리 장기적으로 직업을 다시 생각해 보자, 하고 포기할 때 즈음 만난 게 지금 회사니,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을지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을 버틴 내가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후배에게 어떤 말을 해 주면 좋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뭐라고 말해 줄까.


"그 시간을 즐겨. 회사에 다시 들어오면 다시 이전과 같은 삶이란다.
너무도 빠르게 직장인 1로 돌아간 내가 징그러울 지경이야. 벌써 지겹다고.
그러니 부디 그 시간을 마음껏 즐겨!"


그러나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말이라는 걸 잘 안다. 차라리 친분 있는 회사에 소개해 주마하는 말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퇴사하고 나서 한동안은 어느 누구와도 만나거나 연락하지 않았으니까.


퇴사 후 '무소속'인 상태가 괴로운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지원할 곳도 마땅찮게 되었다는 사실은 공포에 가까웠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그것 만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프리랜서로 들어간 회사는 나를 마치 계약직처럼 대했다. 알고 보니 그 회사는 사람을 그렇게 '쓰기로' 유명한 회사였다. 같은 팀에는 나처럼 프리랜서와 계약직을 번갈아가며 15년째 일하는 직원도 있었다. 아, 나도 같은 포지션으로 들어온 거구나 하고 나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계약직보다도 낮은, 무소속 위치에서 일하자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나도 엄연히 중견기업에서 PM으로까지 일한 이력이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이 회사는 나를 이런 취급하는 거지? 어쩐지, 내 이력서를 보고 팀장이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겠다. 그런 사람이 일은 정직원처럼 하고 처우는 프리랜서로 받겠다는 거잖아!


심지어 회사 네임텍에도 나는 이름이 아닌 326이라는 번호로 적혀 있었다. 이름도 사진도 없는 무소속.


후배는 그때의 내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자기라면 그렇게 일하지 못했을 거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했을 거라며 새삼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내가 대단하다고 했다.


'너는 자존심도 없냐'는 소리로 들렸다. 만약 그 질문이 맞다면, '그렇다'라고 답하겠다. 내가 그 프로젝트를 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이력. 2. 돈. 나는 내 자존심 따위를 채우기 위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프로젝트에 내 이름을 올리는 게 필요했고, 돈이 필요했다. 그 두 가지를 얻었다면 나머지는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라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중요한 두 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나머지는 포기해야 한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내려놓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도 '내가 왜 이런 일'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소위 '현타'가 올 때가 있지만 그럴 땐 다시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다닐만한 회사는 어떤 회사인가? 1. 경험. 2. 돈. 3. 사람(괴롭히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이 회사는 내가 늘 좀 더 배우고 싶었던 분야에서 여러 번 1위를 한 회사이다. 매출도 좋다. 이전 회사에서 지금 회사 프로젝트를 분석한 적도 있다. 이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우연히도 여기에 와 앉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1. 경험을 얻을 것이다.


참으로 영리하게도 입사하기 전 연봉 협상에서 만족할 만한 합의를 받아냈다. 2. 돈. 만족스럽다. (물론 다다익선이지만)


사람들은 선하고 순수하다. 가끔 짜치는 일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완벽하진 않아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나를 대놓고 괴롭히는 인성 파탄자는 없다(없는 걸로 보인다). 그럼 3. 사람. 훌륭하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역시, 중요한 게 아니다.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이전보다 네임벨류가 낮아졌기 때문에 입을 함부로 놀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작은 회사로 갔어?'라고 묻는다. 짜증이 난다. '그럼 네가 대기업 가.(그게 그렇게 쉬우면 너는 왜 대기업 안 가고 그러고 있니)'라고 생각하며 가뿐히 무시해 버린다.


입을 함부로 놀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런 경험이 없다. 막상 자기는 하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만큼 멍청한 소리도 없다. 그냥 '지능이 낮은데 말도 가려서 할 줄 모르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 = 나'라고 증명하기 좋은 세상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뭔지는 잘 안다. 큰 회사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일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누구보다 잘 안다. 다녀봤으니까. 중견기업 이상의 회사는 어떤 거래처와도 비교적 수월하게 일할 수 있다. 소위 '갑'이기 때문이다. 'OO 회사의 누구입니다.'만 해도 대부분 매우 호의적이고 친절하다. 그들은 '을'이니까. 회사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다. 시스템도 제법 잘 갖춰져 있어서 누릴 수 있는 것도 많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게 아무 의미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큰 회사에서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들을 내보내는지, 정글 같은 눈치 싸움이 일어나는지, 매일 같이 성과 평가, 성과 관리에 시달리는지를 알고 나면 그런 환상 따위는 사라져 버린다. 물론 복지도 좋고 이름도 좋은 회사도 있겠지만, 누구나 다 그런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할 수 없는 일로 자괴감을 갖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다.


자아를 왜 꺾어야 하느냐, 회사에서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느냐를 묻는다면 나는 '내가 좀 더 편안하게'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 답하겠다. 더 큰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면 가면 될 일이고,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자아를 꺾어서 내 현실에 만족해야 한다. 소위 대기업이라는 회사에 들어가 보니 신입들이 '울면서' 일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일주일 만에 '성과'를 내라며 닦달했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큰 회사 타이틀'을 얻었으니 됐다며 정신승리할 테고 누군가는 못 버티고 나와 '속이라도 편하자'며 작은 회사로 갈 것이다.


그게 뭐든 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다. 개인적으로 '윤여정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그분의 지혜가 이런 것이다. 먹고 살려니 일했다는 그녀의 말은 내게 매우 큰 영감을 주었다. 먹고살려고 일하는 것이니 자존심이 상할 것도 창피할 것도 없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 일해서 번 돈으로 우아하게 살 거니까 말이다.


우아한 취향은 그래서 내게 필요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자아만 비대하게 키우기 전에, 내면을 가꾸는 게 내게는 훨씬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년의 이직 실패가 내게 준 지혜란 그런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비대한 자아를 꺾고 쓸데없이 높아진 자존심을 내다 버린 것.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지만 나는 그럼에도 가치 있고 우아한 삶을 살 거라는 것. 그 믿음 하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회사에서 자아실현 타령하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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