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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노력해서 마침내 직장인

07. 슬기로운 직장 생활

딱 작년 이맘때 나는 무직자였다. 그야말로 직장이 없는 사람. 직업이 없는 건 아니고, 직장이 없는 건 맞았다. 2주를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서 보내고 나니 이 추운 날 침대에서 보내는 내가 위너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출근하는 중이겠지.


세 번째 퇴사이자 두 번째 이직 실패 이후에 회사에 대한 기대는 모두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내려놓으려고 내려놓은 게 아니라, 하도 입사지원 - 불합격을 반복하다 보니 그냥 다 진절머리가 났다. 두 개의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숱하게 받아야 했던 불합격 메일과 그 메일을 받기까지 숨죽여 보냈던 시간을 생각하면 다시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는 못하겠다며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법 침착하게, 현실의 불안함을 잠재우고 언제 다시 맞을 수 있을지 모를 자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그 시간은 인생에서 처음 겪어 본, 낯설고 어색한 경험이었다. 처음 겪어 봤기 때문에 당연히 어떻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구직 사이트를 살펴보고 업계 동향을 파악하는 한편, 나머지는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을 하며 보냈다. 그래 봐야 돈 드는 일은 할 수 없으니 에세이를 읽는다거나, 영어 공부를 하는 것 같은 비생산적(?)인 일이었다.


다시 회사에 돌아가지 못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가 위태롭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었고 실제로 구인란에는 쓸만한 공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어째야 하나 고민할 때쯤, 전 직장에서 프리랜서로 일해 줄 수 있냐며 연락이 왔다. 안 할 이유가 없어 시작한 프리랜서 일로 1년을 보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일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프리랜서로서의 삶도 제법 신기하고 재밌었다.


프리랜서로서 일하던 두 번째 회사에서 고맙게도 채용 계획이 있다고 귀띔을 해 줬다. 그럼에도 나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두 번의 이직 실패가 내게 남긴 건 그런 거였다. 기대하지 말 것. 내 앞에 계약서가 와야, 계약하는 것이지 그전에는 모두 허무맹랑한 말일뿐이다. (실제로 계약직이나 파견직 노동자에게 '정규직' 채용으로 기대감을 심어 노동력을 빼먹고 소위 '버리는' 일은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일을 하는 내내 이 회사에 입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하고 일 잘하는 동료들과 배울 점이 많은 상사, 적당히 개인적이고 적당히 챙겨주는 분위기. 적지 않은 보수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기대를 억누르며 프로젝트를 마쳤다.


결과적으로 회사는 나를 채용하기는커녕 기존 직원들까지 해고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감행했다. 그럼 그렇지. 내게 그런 행운이 있을 리가 있나.


그 회사에 입사하는 게 행운이었을지, 아니면 원하진 않았지만 제법 나쁘지 않은 또 다른 기회가 행운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우연히도 프리랜서 계약이 종료될 때즈음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게 맞는 자리가 있는데 이력서를 한번 넣어 보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다시 8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는 삶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간절히 바랄 땐 안 되던 것이 다 포기했을 때야 내게로 왔다. 이곳이 대단히 좋은 회사라거나, 대단히 높은 연봉을 받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기대나 환상이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 회사란 원래 그런 거지,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허무하기도 하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실로 놀라운 일이라 나는 입사 몇 주 만에 마치 이전 직장으로 돌아온 것처럼 폴더를 만들고 익숙한 정렬 방식으로 모니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작 다시 직장인이 되려고 그렇게 마음고생을 한 건가. 이게 뭐라고.'


그래 봐야 직장인이 된 것이지만 이제 '무직자'로서 겪는 공포는 없어졌으니 다행일까.


그때의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전 직장 동료가 연락을 해 왔다. 그녀의 공포와 불안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처럼 어딘가에 자리가 있을 거니까 힘내.‘ 라던지 ‘다시 직장에 들어와 보니 그 시간이 그리워. 그러니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지내.' 라던지 ‘이 추운 날 출근 하지 않는다니 너무 부럽다.'와 같은 와닿지도 않고 도움도 안 되는 말이라면 차라리 안 꺼내느니만 못하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을 믿어줘야 해요. 너무 몰아세우거나 자책하지 말고 지금은 자신을 믿고, 불합격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요.'라고 말해 줬다.


'계속해서 구직활동을 할 거라면 최대한 생각을 줄이고 마치 기계처럼, 이력서 내는 기계처럼 구는 게 좋아요. 내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요. 특히 면접 불합격 후에 말도 못 하게 엉망진창인 기분일 텐데 그럴 때 생각을 많이 하면 정말 안 좋으니까, 빨리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걸 찾아요. 내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라고 생각해야 해요. 이거야 말로 존버 정신, 중꺾마 정신이 필요한 일이에요.'


과연 이런 말들이 와닿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얘기를 듣는 내내 나는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나라면 뭐라고 말해 줄까 고민했다. 마찬가지로 이런 말을 해 줄 것 같다.


면접에서 불합격하는 건, 네가 최선을 다 했다면, 어찌 보면 하늘의 뜻인 것 같기도 해. 운이라고 말해서 미안하지만 정말 운과 타이밍인 것 같기도 하고. 네가 아무리 좋은 프로필과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채용하려는 회사에서 원하는 업무 핏과 맞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는 게 면접이거든. 그러니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회사 상황과 맞지 않는 것뿐이지. 개선점을 찾는 정도로만 복기하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려.

쉬는 동안에는 조금이라도 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아. 그게 뭐든. 기분을 좋게 하고 즐거운 일을 찾아서 해.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구직과 상관없이 오롯이 너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정도는 꼭 하길 바라. 그게 바보 같은 일이어도, 비생산적이어도 괜찮으니 즐거운 일을 꼭 하나는 하면서 보내. 그 시간이 곧 엄청나게 아쉬워질 테니까.

마지막으로 너를 믿어야 해. 누가 뭐라든, 그깟 1시간짜리 면접으로는 다 알 수 없는 네 삶의 궤적은 너만이 아는 거니까. 네가 성실했고 최선을 다 했고, 네 삶에 늘 언제나 진심이었다면 너는 앞으로도 그렇게 잘 살아갈 거야. 그러니 너를 믿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

결국, 네게 좋은 걸 얻게 될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게 아니더라도 결국엔 그게 너에게 필요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지금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니? 그걸 하면서 보내. 그게 너를 풍요롭게 할 테니까.


밥맛이 뚝 떨어지고 자려고 누우면 한숨부터 나올 정도로 압박이 심했는데 막상 입사하고 나니 다시 지루하고 지겨운 직장인으로서의 삶이라니. 그때의 나는 ‘고작 직장인’이 되려고 그렇게 조바심을 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현재 조바심으로 불안한 사람에게 ‘막상 입사하면 별 거 없는 쳇바퀴의 삶이 시작되는 거예요.‘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다.


우린 무얼 위해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는 걸까. 이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은 그럴 가치가 있는 것 같다가도 이따금씩 허무하게 느껴지는데 말이다.


직장인이어도 문제 직장인이 아니어도 문제다.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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