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휴민트”의 연관성
*주의사항*
해당 글은 영화 “휴민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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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메인 주인공으로 설정된 ‘조 과장’보다 ‘박건’의 존재감이 더 두드러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박건과 채선화의 서사에 깊이 침잠해 있다. 지금도.
시간이 될 때마다 두 인물의 서사를 붙들고 곱씹었다.
단지 비극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봐 온 구조였기 때문일까.
그러다 갑자기 떠올랐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지막 장면이.
로버트 조던은 다리 폭파에 성공하지만, 말에 깔리는 사고로 인해 넓적다리가 부러진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이동할 수 없다. 그에게 찾아온 건 죽음뿐.
이때 로버트 조던은 모두에게 자신을 두고 떠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리아에게는 끝내 이런 말을 남긴다.
자신이 여기 남더라도,
그녀가 발 딛는 곳에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라고.
모두를 떠나보낸 뒤 홀로 남은 로버트 조던은,
우습게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또다시 산비탈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난 이 세상을 떠나기 싫을 뿐이야.
이 세상을 떠나기가 정말로 싫어.
초인적인 희생정신을 발휘한 남자의 뒷말치고는 어딘가 어색하다.
우리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존엄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물러서지 않았을 뿐이다.
받아들이는 것과 물러서지 않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멈추는 일이지만,
후자는 끝까지 남아 있으려는 몸부림이다.
박건 역시 그랬다.
그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좌표계가 선화를 향해 설정된 것처럼 질주한다.
이미 한 번 시작된 질주는, 그의 단단한 원칙조차 돌려세울 수 없었다.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겠소.
그 질주는 후회로부터 비롯된 결심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
선화를 향해 망설임 없이 제 자신을 던지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니. 살 방법이 없겠냐고 그러더라.
살고 싶다고.
선화를 향한 질주가 ‘죽어도 좋은’ 결연함이었다면, 마지막 유언은 비로소 그 끝에서 마주한 ‘살고 싶은’ 진심이었다.
죽음을 각오하는 일은 결연할 수 있지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더 이상 영웅적이지 않다.
그 순간 그는 영웅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 된다.
로버트 조던은 마리아와 마드리드에서 살 수 있을 평범한 삶을 원했다.
매 순간 꿈꾸었고, 죽는 순간마저 떠올렸다.
아가씨, 우리는 마드리드에 가지 않아…
이 말만 봐도 로버트 조던과 마리아에게 마드리드에서의 삶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있다.
마드리드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그것은 총성과 이념이 닿지 않는 일상의 상징이다.
전쟁 속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은,
평범한 삶이다.
로버트 조던에게 마리아가 전쟁 너머의 삶이었다면,
박건에게 선화는 체제와 임무 너머의 삶이었다.
박건도 마찬가지다.
선화를 오래 찾았다. 만나서 처음 한 말은,
잘 지냈소? 어머니 병환은.
나와 그녀가 하는 대화가 일상의 평범한 대화가 되길,
긴 이별이 아니라 잠깐의 이별이었길 바라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채선화가 박건을 위해 부르는 생일 선물.
예전에 선화가 녹음해 주었던 음악 선물.
그것은 그가 끝내 가져보지 못한 미래의 축소판이었다.
함께 웃고, 평범한 안부를 묻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삶의 약속.
선화는 박건이 완성해야 할 과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스스로 선택하고 움직이던 인물이었다.
다만 그 선택이 누군가의 계산 속에서 도구로 소비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눈앞에 그녀가 있는 이 순간,
자신이 지워져야 한다는 결말을
그는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헤밍웨이는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그 말은 인간이 초연해서가 아니다.
끝까지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존엄이라면,
살고 싶다고 외치는 순간은 비겁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외침에서 비겁함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본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들은 끝내 내려놓지 않는다.
육신은 파괴되었을지언정,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지는 않았다.
박건에게 마지막 순간은 선택의 시간이 아니었다.
도망칠 길도, 계산할 여지도 없었다.
다만, 하나의 생각이 남았을 뿐.
살고 싶다.
그 단순하고도 집요한 충동이,
그를 영웅이 아니라 인간으로 만든다.
내가 이 서사를 끝내 놓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는 영웅의 초연함이 아니라,
끝까지 사라지지 않으려는 인간의 고집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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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어니스트 헤밍웨이 저, 김욱동 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 김욱동 번)
영화 휴민트(감독 류승완, 2026)
찰나에 스친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갑작스럽게 이 책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나의 취향은 이미 하나의 궤를 그리고 있다.
나는 언제나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인간들과,
그들이 서로를 붙들며 엮어 가는 연대를 좇아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