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얼굴” 후기
*주의사항*
해당 글은 영화 “얼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
정영희는 괴물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녀를 괴물이라 불렀다.
괴물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집단적 합의와 반복된 언어로 만들어질 뿐이다.
괴물은 외형이 아니라, 시선 속에서 태어난다.
한 번 괴물을 만들면,
우리는 더 이상 가해자가 아니게 된다.
임영규는 보지 못한다.
반면 사람들은 보면서도 보지 않는다.
전맹은 물리적 결핍이지만,
선택적 시각은 윤리적 결핍이다.
사진은 현실을 고정한다고 믿게 만드는 장치다.
그것은 언제나 프레임 속 일부에 불과하다.
백주상은 모든 걸 기록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보고 싶은 장면만 수집한다.
사진은 하나의 프레임이다.
프레임 안의 것만 보여주고, 밖의 것은 잘라낸다.
임영규의 세계 역시 타인의 언어에 갇혀 있다.
누군가는 보지 못해 보지 않고,
누군가는 보지 않기 위해 골라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자기 서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임영규는 평생 타인의 말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해 왔다.
아내가 예쁘다,
도장이 예쁘다,
사람들이 널 무시한다.
모든 이미지는 언어 위에서 가공된다.
‘사실은 안 예쁘다’는 단 한 문장이 침입하는 순간,
그가 쌓아 올린 가상의 세계는 붕괴한다.
임영규는 선택한다.
새로 들어온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더 익숙한 감정에 맞게 서사를 재편하는 방식을.
이미 열등감과 멸시당한다는 감각이 있었기에,
‘기망당했다’는 서사가 자기감정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했던 건 아내가 아니라,
‘예쁜 아내를 둔 자신’이라는 자부심이 아니었을까.
‘안 예쁘다’는 말은 아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가 붙들고 있던 마지막 자부심에 대한 공격이었을 것이다.
그가 기망 서사를 택한 것은,
피해자가 되는 것이 못난 남편이 되는 것보다
자존심을 지키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는 눈이 없어서 피해망상에 빠진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신념을 선택했을 뿐.
정영희는 두 번이나 본 것을 말했다.
한 번은 아버지의 부정을,
한 번은 권력자의 폭력을.
두 번 모두, 그녀가 처벌받았다.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 임영규는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고 결론을 냈다.
그러나 아들 임동환은 어머니의 얼굴을 직접 확인했다.
차이는 분명하다.
구조 안에 머문 자와, 처음으로 그 바깥을 본 자.
임동환은 그동안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살아왔다.
아버지의 다큐 서사,
기자의 소비 서사.
공장 사람들의 시선.
그러나, 마지막에 본 어머니의 얼굴은
그 프레임 밖에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닫지 않았을까.
괴물은 어머니가 아니라,
그 구조 안에 있던 모두였음을.
그리고, 끝내 어머니를 버린 자신 또한
그 구조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임영규가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면,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남았을까?
영화는 답을 주지 않지만,
아버지의 젊은 날과 같은 얼굴을 한 아들의 눈물을 통해
그저 가능성만 열어둘 뿐이다.
그 눈물은 어머니를 향한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구조 속에 침묵했다는 사실의 자각이었을까.
결국 영화가 묻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보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지 않으려 했는가.
그리고 그 선택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았는가.
——————————————————————————————————————————————
• 영화 얼굴(감독 연상호, 2025)
짧은 영화였지만, 이 작품은 시선을 둘러싼 구조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다시 보아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 불편함은 영화의 결함이 아니라,
내가 벗어나지 못한 프레임과 마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