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46 리마스터링” 후기
*주의사항*
해당 글은 영화 “2046”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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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하는데, 너무 정 주지 마요.
괜한 시간 낭비라고.
그 친구는 당신 심각하게 생각 안 해요.
이 충고는 단순한 연애 조언이 아닌,
주모운이라는 인간에 대한 사망 진단서에 가깝다.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이조차
주모운을 이미 ‘누구에게도 진심을 줄 수 없는 고립된 존재’로 판결 내린 것이다.
모든 여자를 그렇게 대해?
4년 전의 아픈 사랑 후 고통이 너무 심했던 것일까?
주모운은 마치 “아비정전” 속 아비처럼 군다.
백월이 그에게 던진 질문은, 언젠가 아비에게 루루가 했던 질문과 닮았다.
그녀가 주모운에게 ‘죽은 연인 아비와 닮았다’고 한 것 역시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의 결과였다.
주모운은 상처 입은 사람이 아니다.
이미 연소가 끝난 잔해다.
회복은 부상을 전제로 하지만, 잔해는 이미 그 단계를 지나쳤다.
그에게는 회복도, 구원도, 새 출발도 없다.
남은 건 오직 하나,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남는 상태뿐.
아비가 시간을 박제했듯, 그는 관계를 박제한다.
살아 있는 감정이 아니라, 사건번호를 붙일 수 있는 형태로.
아비의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는 사랑을 붙잡으려는 문장이 아니다.
그건 시간을 시체로 만드는 방식이다.
흐르지도, 변하지도, 아프지도 않게.
주모운도 그 행위를 똑같이 답습한다.
그는 사랑을 산 것이 아니라, 사랑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을 남긴다.
그래서 그의 관계들은 서사가 아니라 기록이 된다.
살아 움직이는 현재가 아니라, 박제된 과거 말이다.
주모운에게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물이다.
백월은 관계를 현재로 만들려 하고, 사랑을 요구하며, 미래를 전제한다.
하지만, 주모운에게 이 모든 태도는 낯설지 않다.
그는 이미 과거에 갇혔기에, 현재와 미래는 그의 세계에서 의미를 잃었다.
그래서 그녀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백월은 ‘소려진이 아닌 모든 여자’의 총합으로 남는다.
그럼, 왜 그에게 양정문만이 예외가 될 수 있을까?
그건 그녀가 기록이 되기 이전, 자신을 다시 살게 만들 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다른 걸 써봐요. 무협 소설 어때요? 인기 끌 텐데.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인간으로 작동하던 시절의 조건을 반복한다.
그래서 양정문은 예외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가장 오래된 패턴의 반복일 뿐임에도.
내게도 한때 해피엔딩이 있을 뻔했다.
오래전 그때…
사랑은 타이밍이다.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인연은 엇갈릴 수 있다.
주모운은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리워할 현재가 없기 때문이다.
2046은 기억의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감정의 사후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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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영화 2046(감독 왕가위, 2004)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원체 난해하지만, 이 영화는 그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모든 감정의 무덤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영화를 본 이후 화양연화의 잔향이 더욱 짙어졌다면, 그게 감독의 의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