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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Jul 07. 2023

나의 해방일지 에필로그

참회문


원래는 일기를 퇴사일기만큼 길게 쓰는 사람도, 그렇다고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쓰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마음이 답답하고 어두운 날만, 일기장에 느낀 감정을 나 편한 대로 옮겨 적고 털어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퇴사 일기는 일부러 꽤나 상세하게 썼다. 시간이 지나고 미화되는 게 무서웠고, 그래서 후회하게 될까 봐 무서워 구석구석 놓침 없이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퇴사일기를 쓰면서 실컷 울분을 토해낸 뒤라 정작 발행을 할 때 별 감정이 없었는데, 단편적으로 전해 듣던 그 이야기들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가족들이, 친구들이, 그리고 나를 모르던 분들도 감정이입을 하시고 분노를 해주었다. 이따금씩 전해지는 그 분노와 토닥거림이 많은 위안이 되었다.


퇴사일기는 일기를 썼을 당시와



그 일기에 이어지는 이후 사건이나 느낌을 구분선으로 나누어 추가했다. 



참을 수 없는 팀장도, 비즈니스 절친도 그리고 상사 K에 대한 글들은 발행하고 나서 뒷담화를 했다는 자책과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일말의 책임감으로 괴로워한 나날이 많았다.

분노의 감정을,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을, 시간이 지나도 전혀 정제되지 않는,

스스로 어떤 자정도 포기한 것 같은 퇴사 일기를 보는 게 그래서 꽤나 괴롭기도 했다.


퇴사 일기를 다 올리고 난 지금의 마음은, 그저 부끄럽다.

퇴사 일기는 불교의 참회문에서도 말하는 '내가 옳다'는 오만한 자기 생각을 기초로 쓰였다. 


화나고, 짜증 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이 모든 것은, 밖으로 살피면 상대가 잘못해서 생긴 괴로움인 것 같지만, 안으로 살피면 '내가 옳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일어난 것이므로, 모든 법에는 본래 옳고 그름이 없음을 깨달아, '내가 옳다'는 한 생각을 내려놓을 때,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고 온갖 업장은 녹아나는 것이다.(참회문)
- 책 「검사 그만뒀습니다」 中


참을 수 없는 팀장도, 상사 K도, 실장도, 그리고 미국을 간 여자애도, 다 내가 옳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온갖 이유를 다 갖다 대며 온 마음에서 밀어냈다. 나만 옳다고, 그래서 그들이 틀렸다고 본 시선으로 낱낱이 기록되었으니 그저 부끄러울 수밖에. 


마흔 살의 퇴사일기라는 게 믿기지 않게 곳곳에 유치함이 묻어나고, 수시로 어리숙하고, 때때로 여전히 이기적인 나를 마주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퇴사 일기를 쓸 때와 퇴사 일기를 발행할 때의 생각과 퇴사일기를 다 발행한 지금의 생각은 스스로도 많이 바뀌었다고 믿기에, 어쩌면 퇴사일기는 뒤늦은 사춘기의 성장일기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이 무색하게 써 놓은 글이 없었던 사람이라, 퇴사일기는 내가 쓴 첫 글이기도 하다. 어색한 표현도, 이해되지 않는 표현도 수시로 보이지만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 투박함이 글을 쓰기 시작한 첫 모습이니깐.


이제 진짜 회사와 이별을 했다. 여느 이별의 끝에 늘 고민하는 문제.

세상 누추하고 세상 초라한 모습일 때 전남친과 마주치는 꿈을 꾸듯 전 직장동료, 특히나 내가 미워한 실장, 상사 K, 참을 수 없는 팀장 그리고 미국에 간 그녀를 내가 마주치지 않고 싶을 때 마주치는 끔찍한 상상을 가끔 해 본다.

인사를 할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 아니면 숨을 것인가. 닥쳐봐야 알겠다. 그 사이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깨달음을 얻고, 그래서 그 깨달음이 자연스럽게 용융된 후에 마주치기를 소망해 본다.






퇴사 후 나는


1. 표정이 밝아졌다.  

보는 사람마다 편안해 보인다고 한다. 그 말을 오래도록 듣고 싶다.


2.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엄마가 아플 때 달려갈 수 있었고, 같이 살고 싶은 고모가 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런 딸이고, 그런 고모일 거다. 


3. 걱정이 줄었다.

신랑과 달리 걱정을 사서 하는 내가, 엄마 건강 걱정 외에 그 어떤 걱정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4. 미니멀리스트의 기로에 서게 됐다.

맥시멀리스트로 살아온 내가 돈을 아껴야 한다는 명분 하에 물건을 사는 걸 주저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카드값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일단 지르고 보는 나쁜 습관이 자연스레 고쳐지고 있다.


5. 치킨의 소중함을 알았다.

자주 사 먹을 수 있었던 치킨을 이제 특별한 날 먹는다. 배나 더 맛있다. 치킨 사준다고 하면 낯선 사람도 따라갈 기세다.


6. 줌바를 싸게 배운다.

홈트로만 하던 엉성한 줌바를 주민센터에서 어머님들 응원을 받아가며 열심히 배우고 있다.


7. 신랑과 취미활동에 좀 더 열정적으로 매진하고 있다.

우리를 만나게 해 준 취미활동에 우리는 점점 더 진심이 되어 가고 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행여 다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인지 그를 더더 사랑하는 중이다. 


8. 친구들의 관심사병이 되어 기쁘다. 

갑자기 퇴사를 하고, 갑자기 광주를 자주 가는 덕에 이혼을 추측하던 친구들의 관심이 새삼 고맙다. 그 관심이 계속되기를.


9. 연휴에 사람 치이는 곳에 갈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직장 다닐 때는 보상심리로 연휴가 짧든 길든,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달력을 보지 않는다(사실, 월화수목금요일의 개념이 없다. 가뜩이나 시간 개념 없는데 진짜 더 개념이 없어 큰일이다).


10. 소확행을 실천하고 있다.

소소한 행복의 가치를 알아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소소할 수밖에 없어져서 그 안에서 행복의 빈도를 늘리는데 진심이다.


11. 관계를 새로 정의하고 있다.

더 이상 업계 관계자가 아님에도 연락을 해오시는 분들을 통해 나쁘지 않은 직장생활이었다고 위안을 삼고 있다. 그래서 퇴사 이후에도 연락을 주시는 분들께 더 감사하다.


12. 브런치 작가 선정 

직업이 없는 나를 소개하는 게 낯부끄러운 그날,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이틀 뒤 기쁜 소식을 받았고, 내 입으로 “저 작가입니다.”라고 절대 소개는 못하겠지만 “글을 좀 쓰고 있습니다”는 해도 될 것 같았다. 글을 쓰는 게 나만의 즐거움일지 몰라도 재미는 있다(작고 소중한 나의 구독자님들. 감사합니다).


13. 퇴직금, 새로운 여정을 계획할 밑천이 생겼다. 

퇴직금이 들어오고 연금 따윈 고민도 없이 바로 인출했다. 돈은 제 쓰임을 안다고 했던가. 엄마 검진을 위해 얼마간을, 그리고 남편의 창업을 위해 얼마간을, 그리고 생활비 충당, 그리고 우리 앞에 이제 "긴 여행"이 있다. 부족한 돈이지만, 없었으면 꿈꾸지 못했을 여정을 계획하고 있다.


14. 책의 참맛을 알아가고 있다.

심심하면 15초짜리 콘텐츠에 심취했고 2-3시간 동안 생각 없이 보고 덮으면 눈은 아팠고 머리에 남는 건 없었던 그 시간들을 이제 책이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


15.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많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위대한 사람들의 가치관, 철학을 깨닫고 있다. 세상에 진짜 다양한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똑똑한 사람들을 보며, 한없이 작아지고 있다. 깨달음이 자기화되는 끝에 변화된 내가 있을 거라 믿는다.


16. 매우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데도 피부는 좋아지고 있다. 

퇴사 후 한 달은 남들 잘 때 자고 남들 일어날 때 일어났던 것 같은데 지금은 거의 반대다. 다시 원점으로 돌리려 노력이란 걸 하고 있다. 이렇게 불규칙한 생활을 할 때면 어김없이 뾰루지가 올라왔는데 지금은 괜찮다. 


17. 살이 빠졌고, 근육이 조금 붙었다.

퇴사 후 3개월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체력을 키우겠다고 했는데 사실 목표치만큼은 아니지만, 살이 조금 빠졌고, 따릉이 덕분인지 다리 근육이 조금 생겼다. 조금씩 운동이 재밌기도 하다.


18. 요리를 가끔 한다.

각자 잘하는 걸 하자고 해서 밀키트도 맛없게 만드는 용한 재주가 있는 나 대신 신랑이 주로 요리를 했었다. 아픈 엄마에게 밥 얻어먹고 오기 뭐 해 반찬이란 걸 만들어보고 있다. 물론 맛은 없다.


19. 설렌다. 가끔 잠이 안 올 정도로.

벅차오르고, 설렌다. 이런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하얀 도화지에 정해진 주제 없이 어떤 그림을 그려도 될 것 같은 기분으로 전에 안 꾸던 붕붕 나는 듯한 느낌의 꿈을 자주 꾼다.


20. 시답잖은 수다가 그립다.

소위 아무 말 대잔치 같은 수다를 떨고는 했다. 퇴사를 하고 이런 수다를 못 떠니 아쉽다. 글로 못다 한 수다를 하곤 하는데 이상하게 글은 내 성격을 싸악 숨긴 채 정제되고 만다.


21. 평일 한가한 브런치는 사치라는 걸 알았다. 

매일 아침 집 앞 카페에 가서 커피를 홀짝이고 그 옆에 있는 작은 파스타집에 가서 평일 브런치를 누리는 것도 사치라는 생각에 아직까지 해본 적이 없다. 게으름도 한몫했으리라.


22. 근본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메인에 글이 한 번 뜨고 조회수가 10000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글들의 조회수는 여전히 미미했음에 나의 글은 무엇이 문제인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다. 그냥 써지는 게 아닌 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23. 숨 쉬는데도 돈이 든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백수가 다 좋은 건 아니었다. 숨만 쉬는데도, 돈이 나간다. 마트 가기 겁나고 냉장고가 비는 게 겁나는데 속 없는 배는 유난히도 자주 고프다.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또 뭐가 있을라나???



퇴사 전 꽃길만 걸어온 것도 아니었지만, 앞으로의 삶은 더 꽃길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각오는 했다. 

꽃길이 아니어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 괜찮을 거다.



올릴까 말까 숱하게 주저하고, 지나치게 사적인 일기장을 너무 오픈하는 건 아닐까 고민되던 순간들에 눌러주신 좋아요 덕분에, 공감 덕분에, 구독까지 해주신 분들의 관심 덕분에 나의 해방일지를 끝을 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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