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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Jul 06. 2023

드디어 마지막 출근일

해방의 날


2023. 03.31


오늘 이후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안 할 생각이라,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마지막 출근길에 잠시 청승을 떨어보고자,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길 마지막이야, 무슨 생각해?’


마지막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눈물부터 차오르던 내 발걸음이 힘차게 대답했다. 눈물 따윈 원래부터 내 사전에 없던 단어처럼, 오늘 아침 산뜻한 원피스를 골라 입고 나올 때부터 내내 발걸음이 경쾌했다.


가뿐하고도 한껏 달뜬 마음이 들썩이던 찰나에 꽃바구니 배달 전화가 왔다. 로비에 내려가니 베푸들이 거대한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문구를 보니 로또라도 맞았거나, 로또청약이라도 당첨되었어야 가능한 문구 아닌가 싶다.


“부럽다 친구야”


책상의 남은 짐까지 치우고 나니 유독 꽃바구니가 더 커 보였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잠시 쉬어 간다고 별일 없을 거라고 응원하다가도, 한 없이 쪼그라든 내가 “돈 없어도 친구 할 거야?”라고 물으면 “돈 없이 우정이 가당키나 하냐?”하면서도 애써 낸 용기가 돈 몇 푼에 쪼그라들까 봐 부러 큰 꽃바구니를 보낸 친구들.


상사 K가 뭔 날이냐고, 곧 시들 꽃을 많이 받아서 좋기도 하겠다고 비꼬는 와중에도, 앞으로 걷는 그 길은 내내 꽃길이기를 응원하며, 세상 다채로운 응원들로 요 며칠 내 생에 가장 많은 꽃을 받았다.


누군가 부러워하는 혹은 부러워할 길을 가는 거라 생각하니 잠시 걱정도 덜어졌다. 한껏 밝아진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위해 상사 K와 실장 방에 들어갔다.


실장: 근데 진짜 왜 퇴사하시는 거예요?
상사 K: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해줘서 저도 서운합니다.


돌려가며 말한 조각들에서 어떤 답도 찾지 못한 상사 K는 여전히 내 퇴사의 이유를 몰랐으며, 그게 왜 서운한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 제가 퇴사를 생각한 건 좀 되었구요. 답을 찾으려고 작년부터 심리학 공부를 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실장: 역시 일을 좀 더 빡세게 시켰어야 했습니다. 심리학 공부할 여유가 있었다니요.
상사 K: 그러게요. 제 불찰입니다. 제가 좀 더 시켰어야 했는데...


하...


상사 K: 안 그래도 재입사하려면 1층에서부터 무릎 꿇고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실장: 재입사하고 싶으시면, 그냥 저한테 전화 주시면 됩니다. 무릎 안 꿇으셔도...


속으로 나지막이 ‘두 분 계시는 한, 제가 이 회사에 올 일은 없을 겁니다.’ 되뇌며, 미소를 보였다.

끝까지 재밌는 곳. 퇴사하면 이런 재미는 없겠구나 생각하니 아주 잠깐 아쉽기도 했다.


마지막 출근일은 어떨까 막연히 머릿속에 다양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회사에서의 짐이 담긴 작은 박스를 두 손으로 나눠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아니면 사무실에서 인사를 돌며 쓸데없이 감상적으로 울컥하는 건 아닐지 퇴사 일기를 쓰는 내내 불안하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했었다. 괜한 기우였다.

그저 마지막 날이 재밌고, 행복했고, 화창했고, 어느 때보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이미 백수가 된 신랑이 짐과 꽃다발을 실으러 와서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묻는다. 당연히 2년 전 그 삼청동이다. 2년 전 그날 이후 무서워서라도 다시 찾지 않은 그곳이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물론 그때처럼 ‘임대’ 딱지가 크게 걸려 있어도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하고 제 발로 나온 후라는 게 흠이지만.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정독도서관을 들렀다. 유독 일찍 핀 벚꽃이 만개한 정독 도서관 앞에 빛나는 청춘들이 제각각 다양한 포즈로 봄날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그 사이에서 청춘의 웃음을 띠며 연신 웃었다. 다시 오는 이 삼청동이 그때처럼 쓸쓸하면 내 퇴사가 일렀다고 자책할 것만 같았는데,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쳤고, 한동안 뜸했던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고, 가는 곳보다 웨이팅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여지없이 봄은 온다. 그리고 꽃이 필만큼 따뜻해졌다고 모든 꽃이 한날한시에 피지 않는다. 일찍 핀 꽃은 일찍 지기 마련이고, 늦게 핀 꽃은 좀 더 늦게까지 활짝 웃다 가기 마련이다.

내 인생을 꽃에 비유하면 나는 아직 피지 않았다고 믿는다. 모든 생동하는 것들이 한껏 뜨겁게 불사르고 가는 그 가을 끝자락 겨울이 아니라, 하얀 눈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다 가려내주는 그 한 겨울, 그 눈 안에서, 그 꽃봉오리 안에서 곧 올 봄날을 기다리는 나는, 필명을 ‘피어나’로 지었다. 어느 봄날 피어나겠다는 의지를 담아.


인생 2막.

누군가는 늦었다고 말할 수 있는, 꿈을 향한 여정을 이제 시작한다.




퇴사 후 만난 J가 퇴사 인사 메일을 정독했다고 하면서, 부사가 중요하구나 새삼 느꼈다면서, 내 퇴사 메일의 핵심 키워드가 뭐였는지를 물었다. 뭐라고 썼는지도 가물가물한데, 핵심 키워드라고 하니 내 딴에 진심이었던 “감사함 아니야?”라고 물었더니 J가 웃으며 아니라고 한다.


메일 첫 시작에 들어간 "드디어"였다고. 퇴사할 때 찍어 놓은 마지막 메일을 들춰보니 알겠다. 내가 얼마나 퇴사만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인지.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오늘이 드디어 마지막 출근일입니다.


부사의 쓰임새를 알았고, 부사의 소중함을 알았고, 그 부사 때문에 내 마음을 들켜 낯부끄러웠다.

그랬다. 나의 마지막 날은 퇴사결심을 하고 163일을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맞은 해방의 날이다.

나는 드디어,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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