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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알 Mar 18. 2024

서울의 마지막 날

죽음을 직감했던 어느 날의 회고록

삐이---- 삐이----

 

아 시끄러워. 몇 시야? 눈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침대 위로 손을 더듬어 시끄럽게 경보음이 울리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 분명 재난 문자는 꺼둔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 꿈속인가?

 

위급재난문자

[서울특별시]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몽사몽. 눈을 비비며 재난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코로나 때 꺼 놨는데. 무슨 상황인지 아직 분간되지 않은 상태에서 확인해서 그런지 문자 내용은 더 현실감이 없었다. 그제서야 밖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민방위 방송 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실제 상황입니다. 주민 여러분들께서는 가까운 대피소로 신속히 대피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주민 여러분들께서는 가까운 대피소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소리야? 대피하라고? 어디로? 근처에 대피소가 있던가?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의 질문들이 떠올랐다. 아직 잠결임에도 본능적으로 사실 확인을 위해 네이버에 접속했다.

 

네이버홈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임시적인 네트워크 오류로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해주세요.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던 모든 질문이 멈췄다. 대신 내가 생각 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한국은 이미 북한의 공습을 받아 네이버 데이터센터가 폭격을 당해 서비스가 불가한 상황. 6.25 사변 때도 일요일 새벽에 갑자기 쳐들어오더니. 부지런도 하셔라.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핵폭발 장면이 생각났다. 폭발과 함께 밝은 빛이 서울을 뒤덮고 나는 순식간에 소멸하겠구나. 그 순간 소란스럽던 마음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참 좋은 삶이었다. 후회는 없다. 한강을 내려다보며 서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가겠구나. 썩 나쁘지 않은 엔딩이야.

 

사실 다양한 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장르의 콘텐츠를 보며 하던 상상이 있다. 갑작스럽게 좀비가 창궐한 뒤 상상 속의 나는 여타 주인공들처럼 식량을 찾아다니고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며 무너진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좋은 동료들을 만나 함께 적을 물리치고, 운 좋게 지하 벙커를 찾아 그 안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다 구조된다. 혹은 우리 건물에 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들과 함께 방제실에서 cctv로 좀비의 움직임을 모니터링을 하며 구조될 때까지 버틴다.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최선을 다해 좀비들로부터 도망치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실질적인 위기 앞의 나는 생존 대신 빠른 포기와 납득 그리고 초연하게 죽음의 순간을 기다렸다.

 

갑자기 엄마와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힘은 이미 내 핏속에 흐르고 있었나 보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3개월 만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외할머니를 너무 사랑한 외할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아사하셨다고 한다. 식사하는 척하고 가족들 몰래 개밥으로 주길 반복, 그렇게 조금씩 야위어 가는 할아버지를 이상하게 여긴 가족들이 알아차렸을 땐 이미 위가 쪼그라들어 회복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빨리 할머니 곁으로 가고 싶다고 완강하게 버티다 그렇게 가셨다고.

 

이런 고집은 유전인가 보다. 엄마 또한 마지막 순간 연명치료를 거부하셨다. 오랜 항암치료를 이겨내 림프종 완치 판정을 받았던 엄마는 어느날부터 자꾸 걷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병원에서는 항암 후유증이라고 가볍게 여겼지만 정밀검사 결과 암세포가 척수로 전이되어 하반신부터 천천히 마비되고 있었던 것.

 

“우리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병원입니다. 환자분의 경우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우니 다른 병원으로 옮겨 통증 치료를 받도록 하세요.”

 

일종의 사망 선고였다. 대학병원의 치료 거부에 엄마는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통증 치료를 받으면서 본인이 스스로 씹어서 음식을 삼키지 못하게 되면 더 이상 연명치료는 받지 않겠다 하셨다. 그리고 잘게 썬 과일을 먹다 사레가 들어 기침하던 그날이 기점이 되어 그 후로 진통제를 제외한 모든 수액을 거부했다. 울구 불고 빌고 화도 내고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설득의 방법을 총 동원했지만 삶의 끝을 결정한 엄마는 그 어떤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외할아버지도 그러셨을까.

 

“선생님, 저 오늘은 죽나요?

“환자분,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요.”

 

의사 선생님과 인사 대신 죽음에 대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던 엄마는 그로부터 1주일 후 돌아가셨다. 점점 마비가 진행되어 말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충분한 작별 인사를 나눠서일까. 마지막 순간의 엄마는 누구보다 평온해 보였다.

 

위급재난문자

[행정안전부] 06:41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 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

 

재난경보는 오발령이었고 네이버 홈페이지는 신속히 다시 복구되었다. 동시접속자가 많아 잠시 먹통이 된 거였다고.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지만, 이날 나는 엄마와 외할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보여준 결단력이 내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희망이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살지만 남은 옵션이 죽음밖에 없다면? 초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린다. 당장이라도 북에서 쏘아 올린 미사일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질까 창문 너머 한강을 바라보던 나의 마음이 그랬다. 서울의 마지막 날인 줄 알았던 그날은 그렇게 여느 날처럼 지나갔고, 언젠가 죽음이 찾아 온다면 내 안의 기질을 발휘해 누구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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