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것을 좇는 삶,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
요즘은 할 일이 없으면 무심코 인터넷 방송이나 아이돌 춤 영상을 본다. 보고 싶지 않아도 알고리즘에 끝없이 뜬다. 수많은 콘텐츠와 화려한 케이팝 문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화면 속 ‘예쁨’은 더 정교하고 완벽해진다.
그럴 때마다 문득 생각한다. ‘예쁨’이 곧 정체성인 사람은 어떤 기분으로 살아갈까?
나는 여자고, 예쁜 여자에 대한 동경도 있지만 동시에 압박도 있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예쁜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끝없는 관리와 설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걸까? 우리가 좋아하는 연예인들은 외모와 성향까지도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그런 완벽함과 내 삶을 비교하는 건, 사실 참 비참한 일이다.
소비자로서 우리는 누군가의 ‘예쁨’을 잠시 동경하다가도 금세 다른 대상을 찾아 떠난다. 예쁨을 직업이자 정체성으로 가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기에, 그 순간의 동경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싸우며, 집착하고 더한 것을 쫓아가지만 예쁨은 유한하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무한 경쟁 구조와 닮아 있다.
그리고 이 무대는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도 ‘예쁨’과 같은 유한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돈, 지위, 권력, 사회적 영향력 같은 것들이다. 한국 사회는 남성에게 ‘성공한 가장’이라는 표상을 강요한다. 높은 연봉, 안정된 직업, 넓은 집, 고급차.. 이런 외형적 성취가 곧 남성의 매력과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 역시 유한하다. 돈은 언제든 잃을 수 있고, 지위는 세월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남성들은 끝없는 비교와 순위 매기기를 견뎌야 한다.
여성은 외모로, 남성은 경제력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 다 똑같은 구조에 갇혀 있다.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른 전장에 서 있을 뿐, 같은 게임의 참가자다. 서로를 경쟁자로 삼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압박과 불안을 공유한다.
여기서 내 얕은 지식으로 떠오르는 건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이다. 스토아학자들은 외부 환경, 즉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기대지 말고, 오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삶의 중심을 두라고 했다.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과 비교를 부추기지만, 진짜 주권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시작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지옥은 타인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규정짓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무한 경쟁은 그 시선을 끝없이 재생산하며, 우리를 외부가 정한 가치의 족쇄에 묶는다.
그러나 동양철학, 특히 노자와 장자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노자는 “강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라고 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서로를 밀어내며 서열을 만들지만,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는 그 틀에 매이지 않는다. 장자는 또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이야기에서, 도(道)를 따른다면 칼날이 닿을 때조차 힘들이지 않고, 얽힌 뼈마디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든다고 했다. 이는 외부의 경쟁과 억지로 부딪히기보다, 흐름 속에서 나의 길을 찾으라는 뜻이다.
결국 중요한 건, 내 삶의 주권을 외부로부터 만들지 않는 것이다.
예쁨이든 돈이든, 타인의 시선과 비교에서 벗어나면, 경쟁은 더 이상 절대적인 규칙이 되지 못한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서로 다른 전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남성과 여성이, 사실은 같은 싸움에서 함께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싸움 밖에는, 바람과 강물처럼 흘러가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