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에 대해서는 매년, 아니 어쩌면 매일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 패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세금을 내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에서 덜 내는 정책이 왜 정당한 지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상황이 다른 사람들이 왜 더 내야 하는 지를 주장한다. 그리고 국가는 기본적으로 세금을 가능하면 더 거두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확장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세금은 왜 정당화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구체적인 세금의 징수 수준과 방법을 결정하는데 엄청난 큰 영향을 미친다.
세금이 정당화되는 것은 근대사회에서 국가가 그 소속 구성원들 모두를 위해서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국가가 우리를 위해서 해준 게 무엇이 있다고?!'라면서 흥분하는 것은 사람들이 세금을 일종의 대가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그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국가가 우리를 위해 해주는 것이 없을까?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국가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 우리가 국가가 사회 구성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지를 인지하지 못할 뿐, 국가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기본적으로 세금을 징수할 수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하자면 국가가 만약 운송수단에 대한 통제와 규제를 하지 않으면 교통비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오를까? 만약 최저임금을 국가가 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놓는다면? 여기까지가 약하다면, 조금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가 독립하지 못해서 한반도가 일본 영토라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 그 답은 역사가 보여주고, 국가는 그 존재만으로도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자. 소위 말하는 '부자세'에 대한 점과 관련해서, 과연 누진세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누진세는 왜 징수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평등'을 말하지만 사실 여기에서 평등은 사회주의적인 사고를 해야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애초에 세금을 징수할 정도로 개인의 수입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사회의 안정과 균형'이라는 얘기를 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 나이브하게 자본주의를 기초로 하는 시장경제체제의 특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누진세 또는 부자세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것은 국가의 보호와 국가가 유지시켜주고 있는 사회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노력과 실력도 있지만 그 사람이 노력하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국가의 보호를 받는 사회와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고, 수입이 늘어날수록 증가분에서 본인의 노력보다 국가와 사회의 기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누진세를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 개인이 완전히 개인으로 열심히 노동을 해서 벌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에겐 모두 평등하게 24시간이 주어졌고 우리는 최소한 4시간 이상은 자야 하니까. 여기에서 수입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시스템을 만든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내 돈을 벌어다 주는 구조'를 의미하며, 그 구조는 국가가 결정한 틀 안에서 만들어지고 보호된다. 심지어 그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한 사람이 실수를 해도 그 사람의 100% 책임을 묻지도 않는다. 그러 보호망이 없었다면 그런 리스크를 하는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이마저도 조금 추성적인 느낌이 있으니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생각해 보자. 만약 국가와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대기업 CEO들이 그렇게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이는 일단 국가와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야생상태에서는 게임의 원칙이 세워져 있지 않고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약탈하는 패턴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계속 강하게 있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나이가 들면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가 가진 것을 정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의 틀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시장'이 형성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한 기업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기업 CEO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대기업 CEO들이 은퇴 후에 어떤 일을 하는 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매우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기업 CEO들은 은퇴 후 별다른 경제활동을 못하고 그저 나이가 들어가더라. 그들은 대부분이 시스템 밖 '자연 상태'에서는 혼자 경제활동을 할 줄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번다. 다만, 그 시스템의 영향을 더 받는 사람이 있고 덜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시스템의 영향을 더 받고, 더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 수입이 많단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노력과 실력에 '시스템의 존재'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누진세는 그 시스템을 더 많이 사용했기에 그 대가를 더 지불하는 시스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들의 노력과 실력의 가치는?'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들의 노력과 실력은 '교육'이라는 틀이 없으면 가능했을까? 그리고 그들의 노력이 정말 다른 사람들의 노력의 양보다 항상 많다고 생각하나?
이처럼 세금은 모든 것을 '개인'과 '시스템'의 관계에서 '대가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부동산세나 임대료 수입에 대한 세금 역시 마찬가지다. 임대료 수입은 그야말로 시스템과 사회구조에 의존해서 생기는 수입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는 당연히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할 수 있지 않을까?
이뿐 아니라 징수한 세금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우리는 '대가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이를 기르는데 돈이 많이 들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아서 아이를 잘 낳지 않으려고 하는데, 정말 냉정하게 국가적으로 봤을 때 인구가 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정책들을 입안하고 그들에게 혜택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아이를 양육할만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건 그들에 대한 '혜택'이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의한 '투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 않다.
복지비용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퍼주기'라고 비판하지만, 사실 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경제 수준이 올라오는 것은 그 사회의 안정과 경제 전반에 선순환을 가져올 수도 있는 요소다. 이는 엄청나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질서가 망가질 확률이 높고, 곳곳이 슬럼화가 되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제도는 개인의 관점에서는 '국가가 주는 것'이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사회안정을 위한 투자'일 수도 있단 것이다.
세금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어느 부분에 '선'을 그어야 하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도 항상 개인, 사회, 국가, 시스템 간의 대가관계를 염두에 둬야 한다. 숫자놀음과 목소리가 큰 사람의 의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