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 중요한 이유

모든 관계에는 답이 있다. 6편

by Simon de Cyrene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은, 공항에서 처음인지 오랜만인지 아버지를 만난 날이다. 아버지는 당시에 회사에서 중동으로 파견 나가 계시다가 귀국을 했고, 당시에 나는 아버지가 처음 본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안으려고 했던 느낌에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그 외에도 '처음' 한 수많은 경험들은 내 뇌리에 깊게 박혀있다. 태국에 살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청난 홍수가 나서 거리에 넘쳐나는 물 안에 물고기가 있는 걸 본 기억도, 외국에 살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 학교에 처음 갔던 날도, 내가 처음으로 이성으로 느꼈던 친구의 이름과 얼굴도, 처음으로 강아지를 키우기 위해 친구의 집에서 생후 2개월 된 강아지를 품에 안고 집에 온 날도, 처음 이성과 '뽀뽀'를 했던 날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30년 전후가 지난 기억들이다.


우리는 이처럼 처음의 기억들을 강렬하게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때로는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우리의 기억이 과장되어 있을 때도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처음'이라는 것은 백지에 그어진 첫 그림과 같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는 선 하나만 그려도 그 모양이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미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에는 어지간히 크고 튀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이상 그 그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처음 하는 경험들은 그만큼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오고, 그만큼 선명하고 깊게 흔적을 남긴다.


수많은 관계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관계에 대한 시리즈에서 무려 5개의 글을 썼다. 가족은 우리의 첫 관계이기 때문이다. 미우나 고우나, 좋으나 싫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가족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처음 마주하고, 대하는 사람들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가족에게 받은 영향은 우리에게 깊게 새겨진다. 그리고 그 흔적은 어렸을 때는 몰랐다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분명하게 알게 된다. 항상은 아니지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식습관은 물론이고 말투, 행동, 생각들이 순간순간 부모님의 그것과 비슷한 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과 성인이 된 후에 하는 경험과 형성하는 관계가 부모님의 모습과 다른 지점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찰나의 순간에 우리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음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게 내가 좋아했고, 존중을 넘어 존경했거나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싫어했거나 절대로 닮고 싶지 않은 부모님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한 번씩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첫' 관계가 부모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에서의 경험은 중요하다. 가족에서 입은 상처는 어렸을 때 입은 작은 것이었어도 우리 안에 깊게 남아 나비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반면에 가족에게서 받은 사소한 배려와 사랑도 우리 안에 남아 힘든 순간을 버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다만,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러한 상처, 배려나 사랑이 우리 안에 흔적을 남겼다는 것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마치 그림 위에 그어진 첫 줄 위에 여러 그림이 덧칠해지면 그 첫 줄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런 기억과 흔적들은 무의식의 영역에 숨어 지낸다. 우리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현실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상처 입은 군인이 아직 버틸 힘이 있을 때는 총상을 입어도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는 것처럼. 그러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나 사건이 터졌을 때 무의식의 영역에 있던 기억들은 우수수 터져 나온다. 그 안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무너지고, 온기가 많은 사람들은 그 덕분에 상황을 버텨낸다.


그나마 우리가 기억을 하고 있는 사건, 상처나 감정이면 다행이다. 그 상황을 기억하고, 복귀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5세 이전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데 있다. 그렇다 보니 5세 이전에 큰 일을 겪은 사람들은 자신이 왜 그런지도 알 수 없지만, 언젠가 겪었던 어떤 일이 자신에게 지금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가족이, 부모가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거나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처음'은 중요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다. 일부 남성들이 처녀성을 강조하고, 사람들이 스킨십에 있어서 누군가의 첫 경험 상대가 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그런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군가의 '처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기억하고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스킨십의 '처음'이 끔찍하면, 상대는 평생 스킨십 자체를 끔찍하게 여기게 될 수 있다. 당신이 상대의 첫 연인이라면, 상대는 당신과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연애를 결정하거나 이성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상대의 기억에 남는 게 아니라 상대의 삶의 한 영역을 바꿔버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그게 무엇이든지 간데 상대의 인생에 그만큼의 흔적을 평생 남기는 건 긴장하고, 신중해야 한다. 이는 당신이 누군가의 처음이 된단 것은 당신의 잘못된 말이나 행동은 누군가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단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스킨십, 그중에서도 섹스에 있어서 '첫 경험'은 적지 않은 여성들에게 그렇게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건 적지 않은 남자들이 잠자리는 물론이고 스킨십에서도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의 표현을 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해결하려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가 처음이라는 건 알면 상대를 존중하기보다 정복욕에 가득 차서 상대를 정복하려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얘기를 할 때면 남자 지인들은 '네가 남잔데 그걸 어떻게 알아?'라고 하는 반면 이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한 여자 지인들은 그런 면이 분명 있음을 인정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여자의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처음 하는 것에는 보통 서툴듯이 스킨십도 그럴 수밖에 없는데, 더군다나 섹스는 자칫 잘못하면 아이가 생길 수 있고 아이가 생기는 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일이다. 낙태를 하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한다면, 머리로는 그게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어쨌든 생명줄을 끊은 기억은 마음과 뇌리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스킨십과 섹스가 익숙하고, 어떻게 대처할 줄 아는 상태에서야 그게 문제가 덜 되겠지만 '처음' 섹스를 할 때와 그 뒤에 한동안은 그런 두려움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평생 연애를 쉬지 않고 환승연애를 했고, 속궁합이 엄청 중요하다는 지인은 결혼해서 딩크족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지인은 지금도 아이가 생기는 게 두려워 여전히 조금 불안하면 남편 몰래 피임약을 먹는다고 하더라. 경험도 충분하고,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 이처럼 큰 두려움이 될 수 있단 것은 스킨십과 섹스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무엇이든지 처음 한 경험이 항상 평생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안에서 엄청난 상처를 받고, 배신만 당한 사람도 그걸 다 극복하고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킨십에 있어서도 처음의 기억이 좋지 않아도 시간과 경험이 축적되면서 스킨십을 잘 누리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굉장히 많다는 데 있다. 그리고 상대가 처음의 경험을 극복할 수 있는지 여부는 시간이 나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있다. 또 그걸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은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성향에 따라서 그런 기억과 경험을 잘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잘 극복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극복하지 못한 게 그 사람의 탓은 아니다.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그 흔적을 남긴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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