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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Oct 27. 2024

차별금지법 '반대' 보다 '회개'가 먼저다

10월 27일에 개신교 교회들이 시청, 광화문 등에 모여 연합예배를를 드렸다고 한다. 그냥 연합예배가 아니라 '차별금지법' 반대를 목적으로 드린 예배, 혹은 집회에 가까운 모임이다.


우선 내 글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나는 개신교 신자고, 나는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아서 항상 이 말을 쓸 때는 이렇게 표현하게 된다. 모태에서부터 신앙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으로 태어나서 아무래도 잘 믿어지지 않아서 다른 종교들을 조금씩 공부하고 알아본 뒤에 여러 고민 끝에 개신교 신자로 남은 사람이다. 내가 반기독교적이거나 반교회적이어서 이런 글을 쓰는 게 아니란 것이다.


나는 이 집회에 반대한다. 학부 시절 신문방송학과 전공수업에서 2분 30초짜리 뉴스클립을 만드는 과제가 있었고,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던 시절에 나는 한국의 1세대 트랜스젠더, 동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다가 바뀐 사람, 성소수자 등을 만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과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내 결론은 의도적으로, 단순히 성적 욕구를 충족받기 위해 성적지향성을 결정하는 사람은 없단 것이다.


그 문제도 깊게 들어가지 말자.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때면 항상 성적지향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데, 그에 대한 다툼이 없는 과학적 증거는 아직 도출된 바가 없다. 거기까지다.


차별금지법이 문제가 없을까? 아니다. 차별금지법은 문제가 분명히 있다. 그 문제점을 요약하면 차별금지법은 "직접적인 차별이 없어도, 특정인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아니어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말을 하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법률"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소수자의 문제만 부각이 되지만, 이는 사실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 대하여 '개독'이라고 말하는 것도 차별금지법에 의해 포섭될 수 있다. 이는 종교에는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기독교를 '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폄하하는 건 차별금지법상 차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채용을 안 하거나 실적이 좋아도 승진시키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기독교 자체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나 생각을 말하는 건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서 보장되어야 하는데 현시점의 차별금지법의 버전은 그것도 문제로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집회는, 개신교 신자의 입장에서 찬성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사실 너무 많은 교회들이 성경에 나온 내용을 지키지 않고 있다. 교회와 목사들이 성추행을 하고 난 뒤에도 버젓이 목회를 하고 그 교회에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목사들은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재산을 축적하며, 그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꼼수를 쓴다. 그리고 그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 심지어 목회자들의 세금 문제도 도마 위에 오르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맹목적으로 그 교회들에 나가는 상황에서 오늘의 집회가 열렸다.


이런 상황에서 시내 한가운데에서 길을 막고 집회를 하는 건 이미 기독교, 성경,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반감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기독교에 아무 느낌이 없던 사람들마저 '그럼 저 사람들은 차별에 찬성한다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게 과연 진리를,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가치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어떤 도움이 될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르게, 평화롭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대부분 사람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에 그렇게 큰 관심도 없기 때문에 일단 차별에 금지한단 사실 자체가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고, 당장 내 주말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집회로 인해 망친다는 것부터가 기독교에 염증을 느끼게 만들 것이다.  매주 KTX를 타러 갈 때마다 거리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개신교 신자인 나도 짜증 나고 피곤하게 만드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그 감정이 더 할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이런 집회까지 쌓는다면?


나는 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가르치는 사람이다. 누군가 내게 헌법이 개정되고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면,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이 합법화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제도화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도화하면 안 된다고 답할 것이다. 나의 신앙과 법제도가 형성되어야 하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이는 법이 바뀐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러고도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반박하겠다. 예수님께서 이 땅의 왕이 되시기 위해 오셨는가? 내게 그렇게 따지는 사람들과 예수님이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내가 이 분을 따르면 한 자리를 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뒤를 따른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정말 동성혼이 법제화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성경과 창조의 원리에 반하는 내용이 제도적 틀에 들어가는 게 싫다면 그걸 반대하기에 앞서 내가 믿는 진리가 진리임을 세상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님의 대표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결정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일상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설득력을 갖고,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인의 가장 크고 공통된 소명은 자신이 속한 자리에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어야 하며, 그런 사람들이 늘어날 때야 비로소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구현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넘어서 목회자들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다.


이 땅에 어떤 법이 만들어져도 진리는 진리다. 그리고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사후세계를 의미하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삶을 살아내는 과정과 사후세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 안에서 법제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는 법제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게 가장 중요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한 나라의 왕이 되셔서 전지구를 정복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그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런 목표를 갖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인일 수는 없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동성혼이 법제화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왜 이 상황을 이 땅에 허락하셨는가?‘의 문제다. 본인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말 그런 법이 만들어지면 절대로 안된다면 하나님은 왜 유럽과 미국에서 그런 법들이 만들어지도록 '허락' 또는 '방치'하셨을까? 차별금지법과 관련된 논의에서 교회들은 놀랍게도 이 문제를 빼놓고 이 땅의 법제도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만드는데만 혈안 되어 있다.


인류역사에서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가 다수가 되거나 힘을 가진 시기는 매우, 매우 짧다.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는 미국의 국력이 막강해지기 전까지는 핍박과 억압의 대상인 소수자의 종교였다. 하나님은 왜 기독교를 그렇게 방치하셨을까? 하나님의 기준에서 세력은, 숫자는, 세상적인 힘과 권력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말씀이 바로 세워지고, 말씀대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더 중요하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민족도 항상 이방인(주변국)에게서 억압과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벌하시는 내용이 구약성경에 많기 때문이다. 만약 권력을 갖고 자신들 마음대로 법제도를 만드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세상의 모습이라면, 그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 '폭력적인 하나님'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그 이면에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다. 자신들을 이집트와 이방인들로부터 계속 구해줬음에도 불구하고 편해지면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들의 욕구와 욕망을 쫓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극한으로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들을 치셨다.


구약성경에서 자칫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들이 썩어 들어가고 있을 때, 그 썩어 들어가는 부분이 다른 곳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썩은 부분을 잘라내시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잘라내고 벌하시기 전에 구두로 엄청나게 경고를 하신다. '너 제대로 안 살면 내가 너희 잘라낼 거야'라고. 세상에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예고와 경고를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그 경고는 '돌이켜라'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반성하고 돌이키는 척하다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고, 하나님은 정말 어쩔 수 없을 때 그들을 치셨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시도가, 유럽과 미국에서 반성경적인 법률의 제정이 왜 이뤄질까? 성경의 내용에 비춰봤을 때 그건 오늘날의 교회와 기독교가 그만큼 타락했고 성경에서 멀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믿는 게 '정상'이다. 이는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이 상황을 그대로 두고 지켜보시는 게 어떤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야 할 것은 세를 과시하기 위해 시민들의 불편함을 야기하면서 연합집회를 하는 게 아니라 함께 모여서 연합으로 회개를 하고, 말씀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며,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교회들 안에서 릴레이로 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상황을 '허락'하셨다. 그렇다면 그 이면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비춰봤을 때 그 유일한 이유는 오늘날 교회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타락했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는 '돌이켜라'라고 경고하시고 계신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만 타락하고 있는 게 아니다. 미국에서도 대형 교회들이 성과 돈의 문제로 타락해서 문제가 되었고, 전 세계에서 찬양으로 가장 유명했던 힐송교회도 내부적으로 썩고 곪아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 알려졌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성경에 반하는 법제도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교회들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게 정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로 나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보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가 다니는 교회,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게 먼저다. 그리고 차별금지법을 지금과 같은 내용으로 제정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놓고 눈물을 흘리며 통회해야 한다. 그게, 지금 이 상황과 현실에 대한 교회의 정상적이고 성경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얼마나 복음, 성경, 예수님과 멀어져 있는 지를 알 수 있다.  


그 사실이 나를 가슴 아프고 힘들게 한다. 이는 이러한 현실이 이 땅의 교회들이 얼마나 망가졌고 말씀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ps. 우리 교회 목사님은 그 집회에 참여하시기로 했고, 버스 한 대는 시청으로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인 한 분이 내게 집회에 가느냐고, 본인은 궁금해서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잠시 머뭇대다 나는 솔직히 이런 방식으로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 편하지 않다고 했고, 그러자 그 지인은 입을 닫았다.  


나는 이 집회에 반대하지만 그 집회에 나가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할 생각은 없다. 개인의 성향과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 이 집회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다름이 있을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편을 가르면서. 나와 생각이 달라도, 상대가 형제, 자매라고 믿는다면 그의 말도 들어보는 게 맞지 않을까?


밀린 설교들을 듣는데 목사님께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는 돌을 들고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을 품고 나갈 겁니다. 조용히 우리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이 불편하면 불참하시겠지만..."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이번 주일에 백만이 모이니, 이백만이 모이니 하지만 욕 바가지로 먹게 생겼어요. 정말 우리는 겸손한 집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가야지, 뭐가 우리가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낼 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있습니까. 세상을 근심케 한 게 교회지 세상을 안심케 한 게 교회였습니까? 그런 교회들이 모여서 집회한다고 세상이 무슨 큰 감동을 받겠어요. 한 목소리를 내야 되기 때문에 저도 가기로 하긴 했습니다만, 정말 지극히 조심스러운 게 우리의 입장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도 남에게 보이자고 하는 것이고,  세를 과시하자고 하는 것이고 과시하는 믿음이란 말이에요. 그것도 하나님이 싫어하는 믿음이에요. 너희들의 세를 과시한다고? 무엇 때문에 과시를 해요? 누구 때문에? 정말 우리가 낮아지지 않으면, 겸손하지 않으면 좋은 취지와 선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욕만 바가지로 먹는 것이죠."라고도 하셨다.


우리 교회에서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를 함과 동시에 요란하게 집단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은 게 이해가 됐다. 그리고 조금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상처 받았던 마음에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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