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했다. 학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전공만 듣고 한 교수님께서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할 생각이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셨지만, 당시에 내가 이미 취업을 한 상태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어도 정치영역에 발을 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지난 반년은 달랐다. 지난 반년은 내가 인생에서 가장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시기였다. 법을 공부했고, 연구하고 있으며,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는 탄핵심판의 결론은 다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 보니 유튜브에서 시사프로그램들을 한 번씩 챙겨보게 되더라.
탄핵심판에 대한 결정이 나온 이후에는 당시만큼 시사프로그램을 듣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챙겨주는 알고리즘 때문에 정치에 아예 관심이 없던 시절보다는 정치뉴스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새 정부가 집권초에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일부는 흥미롭고, 일부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법률이나 정책을 추진하는 내용을 접하면서 이 패턴이 계속 이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구체적인 법률이나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법을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 얘기는 논문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법률과 정책에 대한 내용을 접하면서 흥미롭군, 그래 저런 법도 필요하겠네, 저런 정책이나 법이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까 등 다양한 생각을 하다 문득, '이게 정말 장기적으로 우리나라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경제상황이 좋지 않고, 경제영역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야 하는 시기도 맞다. 언어와 자료의 한계를 고려했을 때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기술이 어디까지 확장해 나가고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물음표가 있다. AI가 발전하려면 그만큼 많은 자료를 학습해야 하고, 언어적인 측면에서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영어가 결국 기본언어로 자리를 잡아야 할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산업구조의 특성상 AI를 주요 산업 중 하나로 설정하고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산업'에 대한 투자와 발전이 전부이고, 그게 가장 중요할까? 경제가 발전하는 것, 굉장히 중요하다. 일단 먹고살아야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생활수준이 엄청난 수준으로 올라와서 지금보다 삶의 질이 후퇴한 환경에서 살지 못하기도 하고 살고 싶지 않기도 할 테니까. 그런데 정말, 특정 산업군이 발전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니다. 이미 언론에서 많이 다뤄진, 17개국에서 진행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일하게 물질이 행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무려 14개 국가에서 가족을 1순위로 응답했고, 많은 사람들은 이 조사를 근거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체계가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물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질을 다른 요소와 결합해서 생각하는 경향성이 강할 것이다. 결국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야 가족도, 친구관계도 잘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물질을 1순위로 꼽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경향성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모님께 효도관광을 보내드리거나 가족 간에 선물로 현금을 주는 문화, 결혼식에 축의금과 장례식에 조의금을 내는 문화는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돈이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문화가 자리 잡은 건 우리나라가 그만큼 궁핍하고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비용이 상당히 필요하다 보니 이웃끼리 돈을 모아서 주던 것이 문화로 자리 잡았고, 문화생활을 할 여력이 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돈이 가장 필요했기에 선물로 돈을 주는 현상들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우리나라는 워낙 가난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돈을 주는 게 상대를 위하고 돕는 수단이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삶의 수준이 높아지는 과정에서 그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돈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경향이 있단 것이다.
돈은 당연히 중요하다. 5월이 되면 나도 종합소득세를 어떻게든지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적게 일하고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돈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박사과정 시절에 돈이 없어서 5만 원짜리 시계를 살 때 손을 벌벌 떨었고, 심지어 공부하는데 필요한 책을 살 때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돈은 분명 내가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우리에게 선물해 주는 행복과 기쁨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물질로부터 오는 행복과 기쁨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많은 연구들과 경험으로 이미 증명이 되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삼시 세 끼를 그 음식으로 먹으면 질리지 않나? FRIENDS라는 미국의 시트콤에 출연했던 한 배우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고 성공하면서 소위 말하는 American Dream은 분명히 이뤄졌는데 그 성취에서 오는 행복감은 정확히 6개월 만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돈이 중요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돈에 집착하지 않을 때 돈은 우리에게 자유를 살 수 있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돈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기 시작하면서 나의 다른 것들을 포기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돈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도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는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그중에서도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돈을 버는데 쓰고 어디까지 돈으로 무엇을 누릴 지에 대한 주관적인 기준점을 절대로 설정할 수 없다.
나만의 그러한 기준점을 잡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공부와 고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직접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온몸과 마음, 감정으로 현실과 부딪혀 가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작업은 초중고등학교, 길게 봐도 대학교에서 마무리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그런 작업을 권장하지 않는다. 초중고등학교는 그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관문으로만 여겨지고, 부모들도 공교육시스템과 교사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약간의 다름도 존중받지 못하다 보니 모든 시험은 줄 세우기에 편한 객관식으로 출제되고, 논란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의 생각을 요구하는 문제는 내지 않는다. '주관성'은 채점을 어렵게 하고 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이런 교육시스템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우리나라 부모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교육시스템을 아무리 바꾸고, 교사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현실은 바뀔 수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우리나라에 정말 필요한 건, 성인이 된 사람들이 한 걸음 물러나서 내가 어떻게 살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작업들이 과거보다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이뤄져 있고 사적영역에서도 그런 프로그램들은 일부 존재한다. 하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이 상담을 받거나,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의 전환이다. 예를 들어보자. 젊은 사람들이 왜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가? 그게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과 이후가 피곤하고 힘들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리가 없는 생각이 아니다. 결혼을 하는 과정도, 결혼한 후의 삶은 물론이고 아이를 가진 이후의 삶은 분명히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일정 수준의 고통도 수반한다. 하지만 기혼자들과 아이를 가진 '정상적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결혼생활과 육아의 과정은 그만큼 다른 영역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행복, 기쁨과 즐거움도 선물해 준다.
100만 원을 투자했을 때 50만 원은 잃겠지만 나머지 50만 원에서 수익이 300% 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 투자처에 투자를 할 것이다. 기혼자들과 부모가 된 사람들의 경험에 의하면 결혼과 육아는 그런 것이다. 잃는 것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다른 종류의 행복,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
서로 합을 맞출 수 있는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고,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반드시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아이들에게 해주는 것들을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사람들은 결혼, 출산, 육아를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위로 끌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그 일을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런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할 때 새로운 산업군이 만들어지고, 각 영역에서 창의적인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고와 가치의 전환을 통해 물질만능주의적인 경향성을 되돌리는 것이다. 사람들의 가치체계가 바뀌어야 결혼도 더 하고, 아이도 더 넣고, 투자가 아닌 투기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줄어들면서 많은 시장들이 안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현실적으로 단기, 중기적으로 투자가 필요한 법률과 정책에 더해서 초장기적인 차원에서 인문학적인 연구와 교육에 필요한 투자도 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그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사고와 가치체계에 변화가 온다고 한들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고를 한다고 해도 현실이 객관적으로 최악의 상황이면 소위 말하는 '원영적 사고'가 가져올 수 있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법과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새로운 틀로 자신과 현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도 행복하지기는 힘든 것도 현실이다. 반면에 새로운 눈으로 현실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고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현실의 변화를 위한 투자는 사람들의 가치체계의 전환과 병행될 때 우리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AI관련 회의에서 대기업계열의 VC대표를 맡았었고, 지금은 대기업 IT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AI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자를 하고, 기다려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 기간이 얼마나 필요할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의 사고와 가치체계에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과 많은 투자가 필요하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인문학과 사람에 대한 교육에 대한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