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경제상황이 안 좋아져서일까? '워라밸'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과거에 비해 잘 들리지 않는 듯하다. 다들 힘들고, 대기업들이 인력을 줄이는 작업을 하는 걸 보면 중소기업들의 상황은 더 안 좋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일단 직장을 유지라도 해야 돼'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건 아닐까 싶다. 이직과 창업을 놓고 고민하던 내 지인들도 일단은 몸을 사리기로 마음을 먹었더라.
그런데 워라밸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은 양극화가 되어있는 느낌이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 유럽은 애초에 평균적으로 일보다는 삶의 질과 여유를 강조하는 문화가 강하다 보니 워라밸에 대한 얘기가 한국이나 미국만큼 나오는 것 같진 않다. 분명한 것은 '워라밸'에 대한 논쟁이 있는 사회에서는 일은 돈 받은 만큼만 하고 내 삶을 챙기겠다는 입장과 그렇게 살아서는 발전이 없다는 입장이 대립하는 느낌이다.
워라밸을 둘러싼 논쟁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흐름으로 인해 우리가 놓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선 워라밸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전제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워라밸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우선 '일은 재미없고, 돈벌이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애초에 이 지점부터가 문제가 있고 잘못되었다. 물론,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은 힘들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서 내 주머니로 옮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상대에게 맞추고, 어떻게 해야 상대의 주머니를 열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재미가 없거나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워라밸을 챙기면 발전이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자. 그들은 일에서 보람, 가치, 의미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 모든 일이 재미없고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돈벌이 수단이 되는 일도 개인이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돈을 버는 노동의 고단함과 함께 보람, 가치, 의미, 재미 중 한 개 이상을 느끼고 누리게 될 수 있다. 지금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본인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버텨낸 지금 나는 힘들긴 했지만 보람, 가치, 의미, 재미 중 몇 가지는 느껴지는 일들만 하면서 밥벌이를 하며 생계를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벌이에 만족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들에서 주관적으로 느껴지거나 받게 되는 비금전적인 보상은 내가 이 길을 계속 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적지 않게 존재한다. 대단한 일을 하거나 성공한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금전적인 보상이 조금 적더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 곳곳에 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대단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삶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그들은 보람, 가치, 의미, 재미 등을 별로 느끼지 못하면서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단 그들의 삶이 주는 행복과 만족도가 크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보람, 가치, 의미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을 하고 워라밸을 철저히 챙기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까? 절반은 그렇고 절반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방송인이 한 유튜브 채널에서 강연을 갔을 때 한국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걸 찾아요?'라고 질문을 해서 너무 놀랐다고 하더라. 그렇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자신이 보람, 가치, 의미나 재미를 느끼는 것을 찾을 기회가 박탈된 삶을 산다. 그런 학창 시절을 보낸 학생들에게 직업은 돈벌이 수단으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돈을 받는 만큼만 일하겠단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다만, 여기에서 '돈을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계산이다. 그런 말은 조직이 어떻게 이윤을 창출해 내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는 사람들은 '내가 0시간 동안 일했고, 이렇게 힘이 들었으니 받은 만큼 일한 거야'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런데 능력치나 숙련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같은 시간 동안 숙련된 사람들보다 일하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자신이 힘들어하는 일을 숙련된 사람들은 쉽게 해낼 수 있는 태스크일 수도 있다.
만약 그 사람이 실제로 생산한 가치를 기준으로 연봉을 받는다면, 대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받는 연봉에서 상당 부분이 삭감될 것이다. 본인이 일한 시간과 강도가 곧 그만큼의 가치를 생산한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사실은 본인이 퇴사해서 조직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돈을 벌어보면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깨달을 수 있다. 본인의 연봉이 곧 본인의 실제 능력치를 의미하진 않고, 자신이 속한 조직이 속한 시장과 그 조직의 능력 덕분에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당시엔 몰랐지만,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이 오롯이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람, 가치, 의미나 재미를 느끼거나 자신이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의 보상이 중장기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믿거나 그 일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워라밸을 챙기지 않게 된다. 단적인 예로 나는 얼마 전에 바람을 쐬러 제주도에 갈 때도 노트북을 끌고 내려가 카페에서 일을 했지만 그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서울에 와서 내가 일하면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냈던 카페의 컵을 주문했을 정도로 그 시간이 행복했다.
워라밸만 생각하고 일은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회사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동기부여를 할지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노력해야 하냐고? 그 회사가 그 사람을 선택해서 채용했고, 자신들이 버는 돈의 일부가 그 사람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회사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면, 거기에서 최대한의 효율과 효과를 뽑아내야 하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 효율과 효과는 윽박지르고 근무시간을 강제로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동기를 부여해야 뽑아내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동기부여가 되고 바람, 가치, 의미나 재미를 느끼면서 일을 하거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
'워라밸'이 강조되는 회사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시스템이 구성원들이 아니라 조직만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데 있다. 물론, 회사라는 조직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조직이 우선되어야 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기업의 경우 직원들이 10년 차가 넘어가면 본인이 승진할 수 있는 한계를 인지하게 된다. 내 첫 직장 입사 동기들 중에도 임원이 벌써 된 사람들도 있고, 팀장이 된 사람과 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지점에서 어떻게 하면 팀장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시킬지는 회사의 몫이다.
사실 '워라밸'은 회사가 먼저 챙겨줘야 한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조직에 들어가서 돈을 버는가? 자신이 조금이라도 안정적으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회사는 구성원들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성과를 낸다면, 자신의 가정과 일상은 챙길 수 있는 업무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일을 몇 시간 하는지 보다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성과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회사에 얼마나 오래 있고, 윗사람에게 충성을 하는지에 따라서 보상을 제공한다. 그러한 환경에서 과연 '나는 이미 뒤처졌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기 위한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기업의 오너들이나 경영자들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자유를 주는 만큼 책임도 진다면 그렇게 기업을 운영할 수 있을 텐데 직장과 직업은 그저 돈만 버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자유가 주어지면 신뢰를 저버리는 일들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재택근무한다고 해놓고 배민이나 쿠팡 라이더로 배달하러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은 제대로 안 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서 수익을 내기도 하고, 평일에는 칼퇴근을 하면서 주말근무를 등록해서 수당을 챙기는 등의 행동을 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은 모든 기업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노동법의 특성상 그런 이유로 그들을 해고하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구성원에게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서 문득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너무 경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처럼 어제까지 웃으며 보고를 받다가 내일 갑자기 해고하고 모든 권한을 박탈하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무책임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해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노동시장이 유연화가 된다면 사람들이 비양심적인 행동을 지금처럼 쉽게 하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노동시장이 유연화되는 게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나라는 노동시장이 워낙 경직되어 있다 보니 사람들이 이직이나 퇴사를 쉽게 하지 못하는 경향도 있다. 지금 그만두고, 다시 일을 찾으려고 했다가 낙오되면 백수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만약 노동시장이 유연하게 변하면 자신이 확실한 능력치가 있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쉽게 다른 업계나 직종으로 옮기거나 번아웃이 와서 잠시 쉬기 위해 퇴사를 결정하고, 또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게 지금보다 수월해진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더 맞는 직종을 찾아서 퇴사하고 구직을 할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사람들이 다양한 업종을 오가며 이직을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노동시장이 경직되어 있다 보니 사람들이 우연히 발을 담그게 된 업계에 실질적으로 평생 묶여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서도 딜레마는 당연히 있다. 노동시장이 유연화되면 기업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부당해고를 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보호장치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이처럼 '워라밸'을 철저히 챙기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는 이면에는 교육에서부터 노동시장을 규율하는 법제도까지 다양한 요소들이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워라밸'에 대한 논쟁이 종식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와 기업, 국가에 여러 변화들이 종합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이 글에서 살펴봤듯이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람들이 서로를 쉽게 신뢰하기 힘든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워라밸을 챙기는 것이 자신이 일하기 싫어서, 아니면 그냥 놀고 싶어서가 아니라 회사의 일에 부람, 의미, 가치, 재미 중 어느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기업문화가 엉망이기 때문인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자신의 능력치를 객관화하고, 플랜 B와 C까지 생각해 놓고 경제적으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만들어 놓은 뒤에 모험을 하는 게 단기적으로는 힘들어도 장기적으로는 그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안전장치가 있으면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그냥 모험을 하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에 보람, 의미, 가치, 재미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다시 돈만을 벌기 위한 직장으로 들어가 오히려 연봉이 깎이고 커리어가 망가지는 경우도 봤다. 그래서 나는 이런 모험을 하려면,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때는 모험을 했을 때는 거기에 올인을 하고 돈이 아니라 나의 몸과 시간을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버틸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인생을 걸고 모험을 걸어보고, 자신이 가려는 방향에서 정말 최선을 다한다면 어디로든지 길은 열린다. 이걸 장담할 수 있는 건, 정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들어오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 일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하게되기도 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말, 진심으로 모든 걸 걸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 과정에서는 당연히 실패를 할 각오도 해야 한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시간도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패턴 속에서 버티고, 자신의 능력치가 조금씩 쌓이다 보면 그렇게 버티면서 최선을 다했던 것들이 자신의 자산으로 돌아오더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보다 주위 사람들이 더 잘 아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나도 몰랐던 나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고 일을 주면 먹고 살기 위해 일단 했던 일들이 놀랍게도 자신에게 잘 맞고 자신이 보람, 의미, 가치나 재미를 느끼는 방향성이 잡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 과정을 학창 시절이나 사회초년생 때 거치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챙겨야 할 것도 많아지고, 물리적으로 몸과 마음의 근육이 약해져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힘들어지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10-20대들에게 그렇게 모험하고 도전하기보다는 마치 인생에 정답이 있고, 직업은 결국 돈벌이에 불과하며, 안정만을 추구할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환경에서는 워라밸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