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메디오스 Sep 30. 2021

치아

내 몸에 대한 도발적이고 발칙한 이야기들

이빨로 맹세해,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팽이버섯처럼 생긴 어금니로 오래 씹어주면 좋겠어 

피 냄새, 달 냄새, 정액 냄새, 무덤 냄새

가장 어리석은 암컷으로 널 기억할게 

사랑한다면 이빨을 전부 뽑아줄 수도 있어      

- 최금진, <고독한 뼈, 즐거운 이빨> 중에서 -      



앞니가 깨졌다. 


술래가 눈을 감고 미끄럼틀에 올라타 다른 아이들을 쫓는 ‘탈출놀이’를 하다가 생긴 일이다. 신축 아파트 놀이터의 미끄럼틀은 높고, 구조는 복잡했으며, 나는 스스로의 신체적 직관을 지나치게 맹신했다. 그 결과가 앞니의 박살이라니, 그것도 고작 10살 나이에.      


이미 벌어진 일은 뒤로 하고, 나는 어머니의 불호령이 무서워 몸을 떨었다. 어머니께서 이 사태를 알게 되신다면 몇 년 치 꾸중을 다 들은 후에 동네 치과에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당시 치과란 그 어느 공포영화 속 장소보다도 두려운 곳이었으며, 치과의사란 프랑켄슈타인이나 빨간 마스크보다도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위이잉-, 사각사각-, 끄으으-끄으으-, 그 어떤 끔찍한 의성어나 의태어들로도 표현할 수 없는 치과 특유의 소음들 또한 나를 겁먹게 했다. 그러나 초등학생의 참을성이란 고만고만한 것이었고, 나는 결국 단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저녁식사를 하다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어머니께 들키고 말았다. 그 날 얻은 배움이란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 어떤 소프라노의 목소리보다도 높고 날카롭게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어머니의 혼쭐에 내가 아무리 울어도 옆집에서는 신고해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치과치료는 매우, 매우 무섭고 고달프며, 비싸다는 것이었다.    

  

반짝반짝한 세라믹 치아를 타고난 내 것처럼 달고 산 지도 20여 년째, 사고 당시의 고통도 치과 방문의 고통도 가물가물하건만 간혹 양치를 하다 거울을 볼 때면 까맣게 변색된 잇몸 색깔이 보여 움츠러든다. 십수 년 전에 생명력을 다해버렸을 본래 이의 흔적은 흉터처럼 고스란히 남았다. 슬슬 다시 치료를 받아야 할 터인데 육아에 직장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에 타임머신이라도 빌려야 할는지 고민이 많다. 건강이 최고라지만, 건강을 지키려면 시간이 필요하며, 시간보다 소중한 건 돈이고, 돈을 가져다주는 건 직장이라는 이 불합리한 굴레를 나는 앞니를 볼 때마다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다.      


20대 중후반 당시 지역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할 때에도 내 이는 콤플렉스의 중심에 있었다. 아나운서의 얼굴을 드라마나 영화마냥 클로즈업할 일은 없기에 앞니는 오히려 우려의 대상이 아니었으나, 문제는 송곳니였다. 다른 이들에 비해 크기까지 큰 덧니였기에 평소에도 튀는데다, 웃는 표정을 하면 입술 부근의 입 속 살이 덧니에 걸려 미묘하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이미지 컨설팅 학원에서도 덧니만 교정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일거리들이 들어올 거라며 유명한 치과와 성형외과들을 소개해줬지만 뭉그적거리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결국 지역과 인터넷만 전전하다가 방송인 생활을 끝내고 만 건 툭 튀어나온 송곳니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생각해보고는 한다.      


최근 우리 집에 놀러온 친구가 세 살배기 딸의 치열을 유심히 보더니, 교정을 알아봐야겠다고 한다. 송곳니 덧니가 심하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덧니가 애교스럽다며 선호하는 경향도 있었다는데, 21세기에는 오히려 결점이라니. 덧니가 있으면 음식물도 잘 끼이고, '정상' 치아보다 세균 수치도 높아 구강질환을 유발한다는 친구의 열변에 한숨이 나온다. 십년 넘게 치과 간호사로 재직 중인 이의 조언이라 그냥 흘려보낼 수도 없고, 하필 유전이 되어도 이런 게 되었나싶어 착잡하던 차, 눈과 코를 힘껏 찡그리며 입을 크게 벌린 채 씩 웃어대는 딸의 얼굴이 꽃처럼 곱기만 해 웃음이 나온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