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010년, 부유하던 날들

가라앉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채 떠 있던 시간을 더듬어본다.

by pilot


2009년과 2010년의 시간은 말 그대로 가라앉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채 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럴싸한 목적도 없이. 돌이켜보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를 나 스스로에게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멈춤의 상태에서. 살아 있고자 잔잔한 물 밑에서 같은 곳에 있기 위해 발장구만 살짝 쳐댔다.


2009년엔 휴학을 했고, 2010년엔 복학해서 다시 학교를 다녔다. 그 사이 꿈일기의 기록은 눈에 띄게 줄었다. 적을 힘이 없었던 건지, 적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건지. 그런데 꿈은 계속 왔다.




같은 장면이 반복재생되는 꿈


2009.01.21


하지만 가끔씩 난. 너에 대한 꿈을 꾸는데, 그건 어떤 장면들이 반복재생된다.

——인데 꿈속에서는 현실의 모든 이야기들, 기준, 갈등들이 모두 사라진 채 그 장면과 감정의 반복만 무던히 계속된다. 계속 같은 말을 하거나 같은 행동을 하고, 어떨 때는 나만 빼고 멈춰있다. 난 그때의 너- 만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꿈속에서의 너는 지금의 너-다. 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감정태그 : 그리움



이건 첫사랑의 이야기인 것 같다. 입 밖에 내뱉으면 사라질까, 글로 적어내려가면 날아갈까 그렇게 숨기던 이야기로 말이다.





주드 로가 내 파파였던 꿈


2009.01.15


꿈속에서 주드로가 내 파파였다, 주드를 만난 건 처음이었는데 그가 젊었을 적, 아름다웠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내 파파였는데 난 그의 눈을 마주하기 위해 부단히 말을 걸었다. 그는 특유의 너무 예쁜 눈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에게 키스해 달라 했다. 그는 딸 이마에 사랑스럽게 입을 맞췄고, 나는 이 상황이 황홀하기도 하고 어찌한 편으론 아쉽기도 했고 슬펐다.

정말 그의 눈빛을 마주하게 됐을 때의 황홀함이란.

그가 한국에 온다면 난 꼭 그를 실제로 보고 싶다.

그리고 그다음 꿈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거기선 선샤인 등등을 만났다.

하지만 내용은 정말 기분 나빴어. 다음엔 레슬리도 만났으면 좋겠다.


감정태그 : 자기애, 이상화


이때 즈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봤던가 했을 거다. 왕가위를 좋아하는 나는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이 주인공인데, 어쩌면 중경삼림에 나오던 양조위의 마지막 모습과 이 영화에 나오는 주드 로를 왕가위 유니버스 속 동일인이라 느끼며 감상했던 것도 같다. 리플리와 알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속의 주드 로를 상당히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버지로 나오는 꿈을 꿀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 황홀했지만, 동시에 닿을 수 없는 방식으로만 가까웠다는 것이 이상하게 슬픈 꿈이기도 하다.





비어있는 편지


2009.01.25


설날 전에 꾼 스펙터클한 꿈. 그래 난 오후 3시까지 늦잠을 잤다.

꿈을 두 편을 길고 오래 꿨는데, 두 번째 꿈은 기억나지 않고.

첫 번째 꿈은 내가 읽었던 편지의 내용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꿈꾸면서 생각이 든 게 어떻게 이렇게 꿈속에서 세세하게 편지내용에 신경이 쓰인 걸까 했다. 그 사람은 꿈속에서라도 나한테 전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건가 하고 생각도 들었다. 일어나자마자 금방 메모해뒀어야 했는데, J언니집이라 뭐 딱히 쓸 데도 없고..

편지는 한 장이었고, 조금 빽빽한 라인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편지지 라인의 4분의 3 정도의 양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하얀색 선만 주욱 읽어 내려갔다.

빈 부분은 대체 무슨 뜻일까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써진 종이 부분이었지만 눈이 그 선을 따라 죽죽 내려갔다. 맨 밑부분에 몇 줄의 글이 써져 있었다. ——————라고 해서 –––––––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때때로 난 너를 ––––– 뭐 그런 것들.

대충 그런 맥락이었다. 꿈속에서 편지를 받았다. 꿈속에서 편지를 받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다. 더 많은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리기 전에 이렇게 메모해 둔다.


감정태그 : 그리움



첫사랑 이야기. 그래 그랬다. 그 사람은 그렇게 내 꿈에선 얼굴을 비추기보다는 편지로 더 자주 나왔던 것 같다.

이 꿈을 다시 읽고서야, 지난 편에서 누구인지 가늠되지 않는다고 적었던 그 편지의 주인도 같은 사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놀이공원 직전에 깬 꿈


2009.11.19


딱 놀이공원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꿈을 꿨다. 들어가자마자

눈이 떠졌다. 어쩌면 무료로 꿈속에서 놀이기구 탈 수도 있었는데 공원에 들어서기까지 너무 길게 꾼 꿈이었다. 눈 뜨면서 좀 아쉬웠다.


감정태그 : 아쉬움



이때의 나는 그렇게 형편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더 아쉬웠나 보다. 꿈속에서나마 들어갈 수 있었던 놀이공원이었으니까.





2009년의 꿈이 반복과 공백에 더 가까웠다면, 2010년의 꿈은 내가 사랑하던 얼굴과 장면 속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첫사랑이 손톱을 깎아준 꿈


2010.06.10


그제 꿈속에서 누워 졸고 있는 상태였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첫사랑이 무슨 말을 하면서 또각또각 손톱을 깎아줬다. 그 느낌이 너무 포근했나. 마냥 좋았던지 실실 쪼개며 졸던

나. 아 풋내 난다. 비록 봄과 겨울이 함께였지만 그래도 좋았더랬지. 벌써 몇 번이나 돌고 돌았던 여름이 다시 오네. 전혀 다를 바 없었던 여름으로.

올해 여름엔 바다라도 갈래?

Y도 보러 가고 싶은데 그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감정태그 : 기쁨, 그리움



웃기다. 자조적이다. 누구에게 바다를 가자고 물어본 건지도 모르겠다. 첫사랑에게는 감히 연락해 무얼 하자고 요청할 수 있는 포지션도 아니면서 일기로나마 적어 내려 간 요청이 상당히 안타까워 보인다. Y는 당시 일본으로 유학에 가 있던 상황이었다. 이때까지도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본 경험이 없었던 난 Y를 핑계 삼아 해외를 나가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형편이 맞지 않았고, 여권을 만들고 발권을 하고 숙소를 잡고 등등의 소비가 많이 부담되었으므로 무리라고 자연스레 체념했네.





이과수 폭포와 해피투게더


2010.08.31


특유의 푸른빛과 이과수 폭포와 그리고 piazzolla의 음악.

널브러진 아직 아휘의 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그 방에서 덩그러니 남겨져 구겨지는 보영.

내가 사랑하는 그 영화의 모습 딱 고대로! 내 꿈에서. 실로 전율이 일어난다. 이보다 더 좋은 꿈이 어디 있으랴.


감정태그 : 기쁨


2010.09.01


오늘도 나왔다. 그래서 더 오래 꿈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깊이 들어갔다. 더 오래 눈에 담아두고 싶어서 계속 봤다. 흐르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서 일어나기 싫었다. 너무나 생생했다, 마주했던 눈이 너무 고와서 울고만 싶었다. 눈 뜨기가 너무 싫었다. 4월도 아닌데.. 맞다, 생일이 다가온다.


감정태그 : 슬픔, 기쁨, 그리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왕가위의 해피투게더이다. 지금도 내 방 벽엔 해피투게더 포스터가 붙어있을 정도니까.

언젠가 죽기 전 꼭 가보고 싶던 곳 또한 이과수 폭포이다. 현실에서 갈 수 있을 리 만무한 이십 대 초반의 난 꿈속에서라도 그렇게 마주하고 싶었나 보다.


해피투게더 속 아휘가 혼자 찾아가 쏟아지는 폭포수의 물줄기를 맞던 장면 그대로 나 또한 그렇게 꿈속에서 오랜 시간을 이과수 폭포의 물줄기를 맞으며 그렇게 폭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꿈이다. 거기에 이어져서 꿈속에서는 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내 눈앞에 상영해 주며, 보영과 아휘의 공간으로 초대했다. 난 그 낡은 방 한 칸에 서서 서슬 퍼런 빛이 들어오는 문 열린 창가의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어간 꿈 속에서는 아휘를 잃고 슬퍼하는 보영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더 깊이, 깊숙이 꿈은 나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현실에선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깨고 싶지 않았던 거다.



전화 너머 숨소리


2010.11.28


오늘 받았던 전화 너머 목소리가 자꾸 웅웅, 오버랩된다.

다행히 전화가 끊기고 눈을 떴을 때 꿈이었어. 식은땀이..

아빠의 숨소리를 찾았고 아주 금방 편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감정태그 : 두려움



한 달 넘게 지난 꿈 속에서 난 누구와 통화를 했기에 식은땀에 젖어 깨었는가.

그때 우리 집은 아주 작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방 너머 잠든 가족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숨소리는 항상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 세상을, 그 순간에 아직도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우치게 하기 때문에.




부유하던 시간이었다. 현실에서는 멈춰 있거나 정신없이 달려야 했지만, 꿈은 같은 속도로 계속 찾아왔다.

같은 장면을 반복하고, 비어있는 편지를 보내오고, 좋은 것에 닿기 직전에 깨워놓고, 가끔은 이과수 폭포까지 데려다주기도 하면서.



그리고 그 부유의 끝에서 나는 식은땀에 젖어 깨어나, 방 너머 아빠의 숨소리를 찾았다.



그렇다면 부유에서 빠져나온 2011년의 나는 또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