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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지 May 10. 2021

신호등의 법칙

파란신호등에서는 브레이크 밟을 준비를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운전면허를 딴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앞의 큰 트럭에 가려져 신호등을 보지 못한채 사거리를 지나다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옆 자리에 앉아서 불안하게 있던 친구가 나를 대신해 "선생님, 제 친구가 초보운전인데, 앞의 신호를 보지 못했어요"라고 항변해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호가 바뀔 것 같으면 거리를 두고 따라가셔야죠"  결국 운전면호를 딴지 일주일도 채 되지않아서 '딱지'라는 것을 끊고 말았다.


나는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좋아하지 않는 운전에서도 가끔 인생을 배운다.


면허를 취득하고 운전을 하기 시작한지 25년이 넘었다. 첫 운전길이 눈밭이었기에 조심성이 늘어서일까. 아직까지 큰 사고 없이 안전운전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나는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잠시 운전을 즐겼을 때도 있었다. 스틱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던 90년대 중.후반, 왠지 기어를 바꾸는 내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고, 영화의 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운전을 하곤 했다. '1단, 2단, 3단, 5단'. 클러치와 악셀(엑셀레이터)를 번갈아 밟으며 속도를 올리는 재미도 즐겼다. 

한번은 옆에 탔던 동생이 "형이 모는 차는 키트같아요" 라며 다시는 안타겠단다. 당시 브라운관에는 미국드라마들이 유행이었는데, 미래형 자동차가 나오는 '전격 Z작전'이라는 시리즈물에 나오는 차처럼 거칠게 운전한다는 표현이었다. 20대 초반이었고, 집안이 어렵게 된 후 아버지께서 집을 팔고 빚을 청산하던 중 가져오신 '엑셀'이라는 차는 문은 조금 찌그러지고, 특별한 기능이 없는, 색만 바꾼 운전면허 학원 차량 같았지만, 가족에겐 생계수단이자 내게는 짧지만 영화속 주인공을 흉내낼 수 있게 해주었다. 


출퇴근을 하며 앞에서 운전을 하는 수행비서를 바라보다 문득 궁금했다. 운전을 정말 좋아하는지. "의원님, 저는 개인적으로 운전은 좋아하고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모시고 하는 운전은 오래하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한 답변이었다.


"자기야 다혜 운전면허 합격했데요"

원내대변인이 되고 나서 일정과 하루 60~70통 되는 기자들의 전화에 적응이 안되어서인지 3주 만에 몸의 이곳 저곳이 고장나고, 피곤함에 집에 들어온 날. 아내가 자랑스럽게 큰 딸아이의 면허시험 합격 소식을 들려준다. 사실 큰 아이의 대학 합격 소식은 놀랍지 않았지만, 운전면허 합격 소식은 놀라웠다. 워낙 운동신경이 없는데다 20살이 다 되도록 버스를 혼자 탈 때면 마음을 졸였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딸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고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해 기능시험을 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의 넓은 오지랖에 운전을 가르쳐 주겠노라며, 아내의 차를 끌고 주말 아침 싫다는 아이를 이끌고 집 인근에 위치한 큰 주차장으로 나섰다.  이게 아빠로서 아이에게 남길 수 있는 좋은 이미지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자전거를 처음 가르치던 초등학생 때처럼. 그런데 현실은 많이 달랐다. 아이의 온갖 짜증을 견뎌내며 가르쳐본다. 남편에게 운전을 배우며 상처 받았다는 아내분들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딸에게 운전가르치다 상처 받았다는 아빠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운전을 가르치며 딸에게 크게 상처를 받았다.

엑셀을 밟아 속도를 내는 단계도 아니었고, 겨우 오른쪽 왼쪽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단순한 주행을 하는 동안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를 느끼고는 좌절감이 왔다.  영어나 독일어와 같이 체계적인 문법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걸음마를 떼듯 안전벨트를 메고, 시동을 켜고, 전방을 주시하며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D'에 놓으면 차는 채 10km도 되지 않는 속도로 출발한다.  그리고 좌회전과 우회전을 반복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다. "아빠, 그만해요. 그냥 제 방법대로 할게요"


생각을 해보니, 단순한 운전조차 옳은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르치기보다 아이가 하는 것을 거들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좋아하지 않는 운전을 하면서도 가끔 인생을 배우곤 한다.


빨간 신호등에 빨리가야 할까요

파란 신호등에 빨리가야 할까요.


"끽~"

덜컹거리며 타고있던 차가 급정거를 한다.

뒤에서 잠시 졸고 있던 나는 몸이 앞으로 급격히 쏠리며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받으려던 중 차가 급정거를 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수행비서가 미안해한다. 내 잠을 깨워서일까. 아니면 신호위반을 할 뻔해서일까.

"괜찮아, 우리가 조금 늦었나 보지?" 미안해 하는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다.

"아닙니다. 신호가 안 바뀔 것 같아 달렸는데, 생각보다 신호가 빨리 바뀌었습니다."

문득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랜 기간 운전을 하면서, 멀리 사거리 신호등이 파란불일 때 크게 갈등했던 기억이 있다. '더 빨리 밟아서 건너야할까' '이대로 가다 신호가 바뀌면 멈춰야 할까' '이 속도로 가다보면 중간에 신호가 바뀌면 더 위험하지 않을까' 등 여러생각이 들곤했다. 바로 이 질문을 지인에게 했었다.

"차를 몰다 멀리 파란불이 보일 때와 빨간 불이 보일 때, 어느때 속도를 내야할까요?"

물론 질문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었다.

"글쎄요. 생각해본 적이 없긴한데, 파란불일 때 빨리 건너야하지 않을까요?"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파란불일 때는 오히려 속도를 유지하며 언제든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를 해야하고, 빨간불일 때는 곧 신호가 바뀔 수도 있으니 먼저 신호등 앞에 가 있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도 맞는 말은 아닐 수 있다.

다만, 이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것은 인생 앞에 파란불이 켜졌다고 생각했을 때는 더 빨리 밟아 기왕 불 들어왔으니 달려보자는 생각보다 언제든 브레이크에 발을 얹고 혹시 빨간불로 바뀌었을 때 급제동 하지 않을 준비를 하고, 빨간불이 켜져있다고 해서, '빨간불이네' 하고 멈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파란불이 켜졌을 때 멈춤 없이 달릴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준호형, 형은 더 튈 수 있을텐데, 왜 항상 뒤로 빠지고 남을 치켜세우세요?"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질문은 비슷한 형태로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 하곤 한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는 방법이 있는데, 항상 한 계단을 오르고 나면 엎드려서 주변을 살펴, 혹시 내가 올라보지 못한 이 위치에서 무엇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지"

이 방법은 분명 더디다. 올라갈 때 올라가야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쌓은 것을 잃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평가가 쌓이면 그때는 내가 오르지 않아도 누군가 손을 잡아 올려주더라는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방법도 차를 타고 신호를 건너는 방법도 어찌보면 나는 무척 신중한 성격이다.

그런데, 이는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 한 것을 바라보는 시점은 이렇다. '계단을 오른 다음...' , '달리는 중 신호등을 보았을 때...'

그런데 내가 신경쓰는 힘을 줘야 하는 시점은 조금 다르다. '계단을 오를 때...' '달릴 때...'


열심히 노력은 하되 멈춰야 할 때는 잠시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더 높이 오르고,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언어의 영역에서도 항상 비슷한 이야기로 강의를 하곤 했었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흔히 '술술 이야기한다'라고 하듯 막힘없이 이야기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나는 오히려 말은 잘 멈출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멈춰야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멈춰야 상대가 내 이야기를 소화할 시간이 생긴다. 그래서 언어 영역에서도 '말을 하거나 일을 하는 것을 잠시 멈춘다'는 의미의 'Pause'라는 전문 용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달릴 때가 아니라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 이게 내가 말하고 싶은 '신호등의 법칙' 이다.


얼마전 잘 관리했다고 생각하던 치아 다섯군데에 금이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순히 스케일링을 하러 20년간 다녔던 친구의 치과에 들렀는데, 20대 후반부터 진료를 해주던 친구가 빙긋 웃으며 치아를 스캔해서 하나 하나 보여주며 치아의 상태를 설명해준다. "여기 보이지? 어금니가 세개, 그 옆이 두개 금이 가있는데, 신경치료까지는 아니지만 더 방치하면 안되겠어" 비용도 비용이지만, 지난 1년 간 공직자로 살아오며 쌓인 스트레스가 결국 치아 손상으로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미련스러웠던 1년을 되돌아 보게되었다. 생각을 해보니 얼마 전 과학기술부 장관의 인사청문회를 마치고 자정이 다되어 걸어나오는데, 옆에 있던 비서관이  "의원님 그냥 하루 푹 쉬시는 것이 어떠세요?" 라고 했을 때 마음 속에서 나오던 '그러게 나도 쉬고 싶다' 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난 1년을 너무 파란 신호등만 보고 내달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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