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되면 특별히 할 일이 없어도 의례 집을 나선다. 목적지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인도의 새로운 모습을 만난다. 그날도 아무런 생각 없이 나선 거리에서 충격적 모습을 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상여를 매고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 상여를 마주쳤을 때는 ‘인도에도 상여 문화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전부였다. 해외에서 만난 상여 문화가 신기해서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우리나라의 상여 문화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느낌의 정체를 알았다. 상여를 따르는 사람 중에 우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미소짓는 사람이 많았다. ‘어찌 된 일일까? 왜 이들은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상여 뒤를 쫓았다. 그들은 마치 작은 축제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이승에서 고생 많았다며 더 좋은 곳으로 간 것을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상여를 따르는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번 생은 참 힘드셨지요? 이제야 이번 생이 끝났네요. 여기 일은 그만 잊고 모든 것은 다 여기 두고 가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더 좋은 일들로 가득하길 바라요.’ 이런 생각으로 보내주지 않았을까?
필자의 아버지는 중학교 때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장례식 내내 울기만 했다. 아버지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앞으로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계속해서 나왔다. 지금까지 해드린 것이 없어서, 앞으로는 그 기회마저도 없기에 눈물이 흘렀다. 그 후에도 가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도 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그들을 떠나보내는 데 있어 항상 눈물이 앞선다. 사랑하는 가족, 친지, 친구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 의례 눈물이 흐른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떠난 것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좋은 시절이 다가오려고 하는 데 힘든 삶만 살다 가는 것을 알기에 그 즐거움을 다 누리지 못하고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 결과를 다 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슬픔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죽은 자에게는 아쉬움도, 고통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은 자에게는 죽음이 슬픔일 수 없다. 슬픔을 느끼는 것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나의 관점에서 죽음이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다. 내가 지금 흘리는 눈물은 남아있는 자로서의 슬픔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세계관에서 영혼은 100년간은 흩어지지 않고 머문다고 여겼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았을 때 약 3대에 걸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제사는 고조부까지 지낸다. 3대를 걸쳐 100년이 지나면 영혼은 그 형체를 잃고 사라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도의 세계관은 ‘모든 것이 순환한다’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에너지는 일정 기간을 두고 뭉쳐짐과 흩어짐을 순환한다고 생각한다. 죽은 자의 영혼은 다시 흩어지고 어느 시점, 어느 곳에선가는 다시 뭉쳐져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는 이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삶과 죽음은 순환하는 과정 중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이번 생이 끝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언젠가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죽은 자는 다시 육체를 얻어 환생한다고 본다.
죽음은 슬픈 것일 수도 있고 슬프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을 누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인도인들은 삶을 순환의 한 과정에서 잠시 머무는 것으로 생각한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현재의 삶이 그리 긴 시간이 아니고, 이번 삶이 마지막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 삶이 끝나면 태어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고 세상의 순환 속에서 언젠가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죽은 자가 안타깝다며 너무 슬퍼하지 말자! 우리는 모두 죽음 그 후의 세계에 대해서 모른다. 그것을 알아낼 방법도 없다. 정작 죽은 자는 자기 죽음을 아쉬워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다.
남은 자의 슬픔은 죽은 자를 향해서가 아닌 자기 삶의 아쉬움에서 나온다. 죽은 자를 두고 축제를 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덜 슬퍼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