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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Mar 19. 2020

낯선 할머니께서 냉이를 캐주셨다

따스한 마음까지 함께 담긴 냉이 장아찌


며칠 전, 냉이를 캐러 근처 시골로 마실을 갔었다. 집중해서 열심히 냉이를 캐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길을 지나시다 걸음을 멈추시곤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젊은 사람이 쪼그려 앉아서 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신기하셨던 모양이다. 인사를 드리며 말을 건네니 반가워하시는 기색이다. 코로나 때문에 며칠을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산책을 나오셨다고 했다.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냉이 캐는 걸 멈추고 잠깐 할머니 말동무를 해드렸다. 꽃분홍색이 어쩜 이리 잘 어울리시냐고 했더니 쑥스러우신 듯 손사래를 치신다.


"아이고, 그런 말 말어. 내 나이가 이제 아흔셋이여."


연세가 그렇게 많으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그 잠깐 동안 할머니의 근 백 년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거듭 강조하신 말씀이 애는 최대한 늦게 낳고 인생 즐기라 신다.(ㅋㅋㅋ) 빨리 낳으면 같이 늙는다고. 할머니 신세대시라고 깔깔 웃으니 할머니도 활짝 웃으신다.

손녀같이 예쁘다며 감사하게도 평소 냉이를 캐시는 곳을 알려주신다. 할머니보다 내가 더 즐거운 대화였는데 늙은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 하신다. 항상 느끼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처음 뵌 분이라도 조금만 말동무를 해드리면 다 퍼다 주실 기세다. 그만큼 평소 외로우셨던 걸까, 아니면 손주들이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 걸까. 우리 할배, 할매 생각도 나고......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찡했다.



할머니께서 알려주신 곳을 가보니 정말 냉이가 많았다.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오시더니 할머니도 냉이를 뜯으신다. 한 손으로 지팡이 짚으시며 뜯으시는데 맘이 안 좋았다. 내가 캐다 드리려고 '할머니 찬거리 하시게요?' 여쭤보니 나 주려고 그러신단다. 송구스러운 마음에 내가 하면 된다고 몇 번을 말해도 소용이 없다. 둘이서 먹을 거라 이제 됐다 해도 멈추질 않으신다. 얼른 할머니 손을 잡아 끌고 나왔다. 잘 보니 할머니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손으로 닦아 드리다가 눈물이 왈칵 나는 걸 꾹 참느라고 혼이 났다.


아니,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나 정말...... 할머니들은 왜 이렇게 정이 많으신 걸까. 그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냉이 캐러 나왔다가 분에 넘치는 행복을 선물 받았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서로가 있는지 잘 살펴보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할머니가 안 보일 때까지 아쉬운 마음에 계속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가져온 냉이로 장아찌를 담갔다. 이 냉이만큼은 오래 두고 먹고 싶은 마음이었다. 냉이가 부드러워서 삶지 않고 그대로 담기로 했다. 끓인 장물을 붓자마자 기분 좋은 냉이 향이 온 집에 퍼졌다. 익어야 하는데 그걸 못 참고 바로 먹었다. 입안에 봄향이 한가득이다. 지금도 맛있는데 익으면 얼마나 맛있으려나. 반찬으로 먹어도, 고기랑 함께 먹어도 좋을 것 같다.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까지 함께 담겼으니 더할 나위 없다.


아, 할머니도 맛 보여 드리고 싶다. 차마 댁이 어딘지 여쭤보지 못했는데 후회가 된다. 그 길로 더 열심히 산책을 다녀야겠구나. 먹을 때마다 봄처럼 따뜻했던 할머니 미소를 떠올리며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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