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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날의 식탁
by 한솔 Oct 01. 2018

딱 가을만큼 매운맛

초가을의 밭, 그리고 고추다지미


절이 또 한차례 변화를 겪는다. 어느새 하늘은 언덕 하나만큼 높아졌고, 넓은 붓 끝에 하얀 물감을 살짝 묻혀 그은듯한 새털구름들이 가득하다. 녹음 짙던 산과 들의 채도는 한층 낮아졌으며, 싱그럽던 논도 어느새 노란 물감 몇 방울이 섞였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벼들을 보고 있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늦둥이 매미들의 짝 찾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린다. 해가 머무는 시간이 부쩍 짧아졌고 노을은 더욱 깊고 진하다. 어쩐지 쓸쓸한 초가을밤의 저녁, 텅 빈 공간이 풀벌레 우는 소리로 메워진다. 그렇구나. 어느덧 가을이다.



할아버지의 고추밭 /  2018, 9월




외갓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할아버지의 밭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배추며 무, 깻잎, 배추, 도라지 등 풍성한 결실이 가득이다. 식재료가 필요할 때면 오토바이를 타고 밭에 와서 조금씩 가져간다.





올해 콩 농사는 글렀다. 고라니가 모두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콩이 있어야 할 자리가 썰렁하다. 밭두렁에 범인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해콩과 할머니의 콩잎 반찬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괜스레 아쉽다가도 얼마나 먹을 게 없으면 이까지 왔나 싶어 가엾다. 할아버지는 김장할 배추만큼은 지켜야 한단 생각이셨는지 그물망으로 울타리를 두르셨다.





그마한 고추꽃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예쁘다. 청초한 꽃이 진 자리에 녹두알 같은 작은 열매가 맺는다. 꽃은 졌지만 땅에는 별 하나가 떴다.





고추는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하였다. 그만큼 자주 돌봐주어야 결실을 맺는 농작물 중의 하나다. 병충해와 습해에 약하므로 어지간한 보살핌으론 어림도 없다. 다른 작물의 배는 되는 정성을 쏟아야만 한다. 싱싱한 고추는 단단하고 반질반질 광이 난다. 초록빛 고추는 아직 여름색 가득, 푸르다.





9월의 고추밭에선 꽃부터 갓 맺은 열매와 늙어 떨어진 열매까지 모두 볼 수 있다. 가을 문턱에서 만나는 환절기 그러데이션. 계절이 깊어질수록 고추도 붉게 물들어간다. 새빨갛게 익은 고추는 햇볕이나 건조기에 말려서 고춧가루로 만들거나 고추장을 담근다.


언제나 기분 좋은 생고추의 신선한 맛과 향. 익히면 전혀 다른 맛과 향이 난다. 다른 주인공을 돋보이게도 하고, 아삭한 식감과 혀를 자극하는 매콤함으로 요리에 재미를 더한다. 고추가 들어간 요리는 무궁무진하다. 생각해보면 어떤 형태로든 알게 모르게 매번 식탁에 오르는 것이 고추가 아니던가.


나는 밥도둑 하면 '고추다지미'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고추장물 혹은 고추다대기로 알려진 경상도의 향토 음식으로 멸치와 고추를 조려낸 일종의 양념장이다. 내가 사는 곳에선 '고추다지미'라고 불렸다. 어머니께선 종종 회사에서 내게 전화를 거셔서는 "저녁 반찬으로 고추다지미를 해줄 테니, 엄마 퇴근하기 전에 멸치와 고추를 다져놓아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믹서기를 사용하면 죽처럼 될 뿐 아니라 맛 또한 깔끔하지 않기에 힘들어도 꼭 칼로 다져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엄마표 고추다지미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손이 매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다졌던 기억이 난다.





고추다지미 (고추장물)

고추 300g, 멸치 50g, 다진 마늘 한 숟갈, 조선간장, 참기름, 물 300ml


멸치는 머리와 내장을 제거한 후 잘게 다진다.

고추도 깨끗이 씻은 후 씨를 제거 한 뒤 잘게 다진다.

팬에 참기름을 두른 후 다진 멸치를 넣고 볶는다.

물을 붓고 파르르 끓으면 고추와 다진 마늘을 넣은 다음, 조선간장이나 액젓을 넣어 간을 한다.

국물이 자작하게 졸아 들면 완성.



다진 멸치에서 나온 감칠맛, 고추의 향과 매운맛이 어우러진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는 밥도둑이다. 밥에 한 숟갈 턱 얹어 그냥 쓱쓱 비벼 먹어도 맛있다. 쪄낸 호박잎에 밥 한 숟갈과 고추다지미를 얹은 행복 한 쌈이면 12첩 반상이 부럽지 다.


고추다지미에 밥을 비벼먹다가 문득 파스타에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파스타 재료로 쓰이는 앤쵸비와 페페론치노. 고추다지미 속 멸치와 고추를 그것들에 대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탈리안 파슬리 대신 참나물을 사다가 고추다지미를 넣어 파스타를 만들어보았다.





참나물 고추다지미 스파게티

스파게티, 고추다지미, 참나물, 마늘, 버터, 치즈


끓는 물에 스파게티를 삶는다.

팬에 버터를 두르고 마늘을 넣어 향을 낸 다음 고추다지미를 넣어 살짝 볶는다.

삶아진 스파게티면을 팬에 넣고 잘 섞어주고, 면 삶은 물이나 육수를 한국자를 넣는다.

싱겁다면 고추다지미나 소금을 더 넣는다.

불을 끄고 참나물 잎, 송송 썬 참나물 줄기, 치즈를 뿌려 마무리한다.

좀 더 크리미한 소스를 원한다면 버터를 한 수저 넣고 섞어준다.





보통날의 부엌, 마늘과 고추다지미 볶는 향이 가득하다. 휘리릭 만들어 어머니와 점심 식사로 먹었다. 참나물의 향기도, 아삭아삭 씹히는 참나물 줄기의 식감도 좋다. 구수한 고추다지미 내음. 여리지도, 너무 맵지도 않은 딱 가을만큼 매운맛. 후루룩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어느새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육수를 더 부어서 촉촉하게 국물 파스타를 만들어 먹어도 얼큰하니 좋을 것 같다.





유난스럽던 올여름도 지나갔다. 매번 보내는데도 무언가를 더 하지 못해 마냥 아쉽고, 다가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설레는 환절기 기분. 사계절 뚜렷한 곳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건, 참 감사할 일이다. 9월, 가을을 마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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