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파일럿을 탔다. 혼다의 대형 SUV. 3세대로 바뀐 신형이다. 작년 말에 출시했다. 북미에서 인정받고 한국에 들어온 모델이다. 2세대는 몇 년 전에 타봤다. 당시 미국에서 팔던 그대로 한국에 들여왔다. 식욕 왕성한 거대한 대륙의 차가 한국에서 통할까, 싶었다. 일단 대형 라인업을 구축한다는 데 의의 둔다는 정도로 판단했다.
대형 SUV는 경쟁자가 적다.
혼다는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었다.
물론 구매자도 적긴 하지만. 틈새를 노려볼 만했다. 시기도 잘 맞아떨어졌다. 레저 열풍과 맞물렸다. 실어야 할 짐이 늘어났다. 보다 덩치 큰 SUV는 탐낼 만한 존재였다. 기아 모하비가 나이 먹어갈수록 스테디셀러로 군림한 이유이기도 하다. 덤벼볼 만했다. 하지만, 기아 모하비보단 포드 익스플로러를 조준했다.
포드 익스플로러는 수입 대형 SUV의 터줏대감이다. 올해 상반기 판매량만 봐도 알 수 있다. 2,609대. 수입 자동차 모델 중 열 번째로 잘 팔렸다. 포드 판매량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다. 몇 배 많은 세단 판매 대수엔 비교할 순 없지만, 대형 SUV로선 발군의 장악력이다. 혼다 파일럿으로선 쉽지 않은 싸움이다.
북미에선 혼다 파일럿의 위상이 한국과 다르다. 2003년 출시한 이후 매년 10만 대 이상 팔렸다. 포드 익스플로러와 잘 싸워왔다는 소리다. 3세대 혼다 파일럿은 2009년 출시한 2세대에 이어 7년 만이다. 2세대까진 고수한 각진 디자인을 내려놨다. 혼다 패밀리 룩을 적용한 결과다. 현대적이면서도, 도심형 SUV 느낌이 물씬 풍긴다.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3세대로 오면서 혼다 파일럿은 확실히 세련되게 변했다. 여기서 세련됐다는 말은 꼭 디자인에 국한된 말은 아니다. 인테리어 방향, 서스펜션 성향, 엔진 질감 모두 포함된다. 운전석에 앉아 운전하면, 손끝에서 엉덩이에서 의도가 읽힌다. 마침 2세대 파일럿도 동시에 운전할 수 있었다.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2세대는 정통 SUV 다운 질감으로 가득했다. 원형 아날로그 계기반은 투박하지만 정감 있다. 절벽처럼 휙 깎인 센터페시아는 외관의 각을 실내로도 연장시켰다. 절벽 위 클라이밍 말뚝처럼 삐죽 박힌 기어 노브 역시 거대한 기계 부속다웠다. 2세대 파일럿에 앉으면 매끈한 아스팔트를 가더라도 울퉁불퉁한 자갈밭이 겹쳐 보였다. 가솔린인데도 걸걸한 진동과 팽팽하게 조인 서스펜션도 그 느낌을 배가했다. SUV의 순수성을 고수한 셈이다.
3세대는 다른 지점을 충족시킨다. 보다 쾌적한 공간, 보다 편안한 주행 질감, 보다 진일보한 주행 보조 장치들. 지금 대다수가 SUV에 원하는 요소들이다. 변한 세대만큼 다음 세대의 변한 취향을 반영했다. 2세대와 완전히 다른 성향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3세대 혼다 파일럿은 시대별 SUV 변천사의 표본으로 삼아도 될 정도다.
3.5리터 V6 직분사 엔진
빼놓을 수 없는 효율적인 연비 또한 챙겼다. 리터당 8.9km를 달린다. 숫자만 보면 고개를 갸웃할 거다. 하지만 혼다 파일럿은 5미터에 육박하면서 무게는 2톤에서 딱 35kg 모자란다. 덩치와 연비의 상관관계는 상식이다. 따져보면 평가가 달라진다. 게다가 3.5리터 V6 직분사 엔진의 풍성한 출력도 즐길 수 있다.
2.4 에코부스트 엔진 품은 포드 익스플로러가 리터당 7.9km 달리는 것과 비교하면 더욱. 거동은 민첩하다기보다는 묵직하게 밀어붙인다. 초반에는 더디다가 중속 이후로 폭발한다. 덩치 큰 SUV를 호령하는 맛이 진하다. 부드럽게 조율된 스티어링 휠의 느긋함도 주행 성향과 맞닿아 있다. ‘인텔리전트 트랙션 관리 시스템’도 추가됐다. 지형에 따라 네 가지 모드로 바뀐다. 일반, 눈길, 진흙길, 모랫길로 구성했다. 이 정도면 어딜 가도 어지간하면 두려울 일 없다.
보통 자동차는 세대 변경 때 많은 게 변화한다. 알면서도 3세대 혼다 파일럿의 변화는 사뭇 인상적이다.보통 성향은 유지하면서 발전된 기술을 장착한다. 완전히 다른 차로 느껴질 정도로 변화하긴 쉽지 않다.혼다는 파일럿을 통해 과감하게 노선을 틀었다. 상대에 맞춰 전략 짜는 복서처럼 대중 취향에 완벽하게 대응할 지점을 단련했다. 혼다가 제대로 된 선수를 내보냈다. 대형 SUV 시장의 힘겨루기는 이제 시작이다.
글 김종훈(<아레나> 피처 디렉터)